〈 75화 〉21. 그녀가 귀여울 수밖에 없는 이유.
의외지만 에우리에하고는 2번 정도 이어간 게 고작이었다.
한두 차례 가고 너무 곤히 잠들어서… 뭔가 건드리기 미안해진 나는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사정 뒤엔 피로감이 밀려들곤 하나 체력을 단련해둔 게 괜한 건 아니었는지 별문제 없이 주위를 뒤적이다 수건으로 쓸 법한 걸로 그녀의 땀이며 몸을 닦아주고, 흥건히 젖은 이불이며 천은… 음,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별 방법이 없었기에 그대로 쓰되 젖지 않은 부근으로 그녀를 이동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침대 사이즈가 상당했기에 가능했던 건데, 덕분에 한두 차례 정리하자니 내 쪽도 피로가 몰려와 그녀의 옆에 누워 그녀의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육신을, 특히 가슴 부근을 만지작대며 아무 생각 없이 그 촉감을 즐기다 그대로 잠들고야 말았다.
아침에 눈을 뜨기 무섭게 여전히 잠들어 있는 그녀를 발견하곤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한숨과 함께… 더 자도 상관없으려나 하는 생각을 은연중 하며, 노곤함에 취해 잠들 듯 말 듯한 상황을 유지하는 가운데서도 나는 여지없이 그녀의 몸을 만지고, 더듬는데 열중했다.
만져도 만져도 질리지가 않아.
가슴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냥 온몸이 부드럽게 느껴져 그 자체로 기분도 좋았고, 마음이 안정감을 찾아가는 느낌이었기에, 그냥 그게 좋아 계속 그러고 누워 있었다.
그러다 잠깐 잠들었다 느끼고 눈을 뜨니 멀거니 자신을 응시하는 에우리에를 보며, 에드릭은 살짝 침음했다.
“으음,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베개에 머리를 맡긴 채 그러고 있었기에 그녀의 은발이 그녀의 얼굴과 머리 사이로 미동하며 은은하게 존재감을 불러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은발 사이로, 백옥 같은 피부며 아름다운 얼굴 사이에 자리한 자수정과도 같은 자줏빛 눈이 유독 아름다워서, 무심코 계속 쳐다 보고야 말았다.
“…….”
그러다 그녀는 간지럽다는 듯 살짝 몸을 틀었는데, 이러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녀의 가슴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무려 한쪽이 아니라 양쪽을.
옆에 누운 채 왼팔은 그녀의 등 아래로 집어넣어 어설프게나마 건너편 가슴의 옆 부근을 만지작대고 있었으며, 오른손으론 바로 코앞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두 눈을 응시하고 있었기에, 에우리에 기준으로 본다면 이게 참 기이한 광경이었을 거다.
“…좋아?”
“예. 좋아요.”
“어떻게 좋아?”
“말이 꼭 필요해요?”
“응. 듣고 싶어.”
“어디 보자. 우선 말랑말랑하고 부드럽고, 육감적이면서도 감촉이 기분 좋고, 향도 좋고….”
“…낯부끄러운데.”
“말해달라면서요?”
그런 식으로 우린 날이 훤해질 때까지 잠들 듯 말 듯, 도란도란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껴안은 채 다시 눈을 붙이는 식으로 휴식을 취하다 일어날 시간이 되자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몸을 일으켰다.
나는 출근, 그녀는 할 일 재개.
그러나 무리할 필요가 없을 거 같아 보였기에, 나는 가져온 대용 스마트폰을 살펴 시간대를 보곤 그녀에겐 조금 더 쉬라 일러주곤 자리를 떴다.
마탑은 오전보단 오후가 훨씬 활성화된 느낌이 드는 게 일단 이 시간대는 마주치는 이들 태반이 좀비처럼 흐느적대며 움직이고 있었다. 걸어가다 눈을 마주치면 불쑥 소름이 끼칠 정도로 눈 밑이 까무잡잡하게 죽은 이들이 파다했는데, 이쯤 되면 에우리에 쪽이 오히려 쉬엄쉬엄 일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다들 상태들이 말이 아니었다.
‘대학원생.’
왠지 모르게 ‘그들은 나쁘지 않단다. 단지 선택을 한 번 잘못한 이들일 뿐이란다.’ 하는… 상냥하면서도 냉엄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지만, 기분 탓이겠거니 싶었다.
마르뎅 상회는 아침 점심 저녁 할 거 없이 분주할 때만 되면 쉴 새 없다곤 하나, 이곳의 오전 때는 역시나 활기가 끓어 넘치고 있었다.
…그냥 활기차다, 힘차다가 아니라 끓어 넘친다 이 말이다.
“물건 안 싣고 여태 뭐 하고 있었어?!”
“준비 안 해놨어?!”
“이거 상태 괜찮은 거예요?”
“내가 어떻게 알아!”
“아니! 담당자가 모르면 누구한테 물으라고!”
“멍 때리지 말고 빨리 움직여! 늦으면 그거 다 재고야!”
“거래처에서 왜 소식이 없는데?!”
“지금 출발합니다!”
“잠깐 기다려 봐! 가는 길에….”
혼란의 연속이지만 이게 오전의 일상적인 풍경.
참고로 새벽은 이보다 더 치열하고 박진감이 넘치는데, 보다 보면 폭력 사태가 벌어질 것 같아 처음엔 어찌나 불안했는지.
저렇게 난리 치더라도 막상 일 끝나면 사람들이 또 풀어지곤 하니, 직업 정신이 투철한 건지 이익에 민감한 건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었다.
“어? 왔냐?”
에드릭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집무실 내에 혼자서 서류들과 씨름하고 있던 그가 건성으로 인사말을 주었다.
휴즈는 종이 서류를 분주하게 살피고 체크하는데 한껏 열중하고 있었다.
“아, 온 김에 너도 이거나 좀 도와라.”
그러면서 수북하게 쌓인 서류 탑 중 일부를 대강 들어 건네는 휴즈.
조금이나마 문자가 익숙해진 마당이니 읽고 살피며 검토하는 정도는 크게 지장 없었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일인 건 확실했다.
그래도 이 짓을 해봐야 언어도 익숙해지고 업무도 능숙해질 테니, 군말 없이 착수.
옆쪽에 마련된 책상에 앉아 서류를 살피자 재고며 물자에 대한 내용들이 태반인데, 이건 엑셀이나 도표를 파악할 줄 안다면 크게 문제없는 내용들이었다. 실수 안 하고 계산만 잘해서 기입만 하면 되는 부류였기에 문자를 좀 몰라도 엄청난 지장이 있는 내용들도 아니었고.
깃펜을 들어 잉크를 묻히고 대략 암기한 내용을 차곡차곡 적어 넣는다.
물론 그런 표 말고도 다양한 방식의 서류들이 즐비했는데, 이렇게까지 많이 필요한가 싶어 의아했지만 이곳에 얽히고 엮인 일들이 많다 보니 이런 것들이 온전히 해결 안 되면 거래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직접 눈으로 보고서야 이해하게 됐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서류와 씨름을 해야 아랫사람들이 편하고, 대규모로 물자를 주고받는 서로가 불편하고 번거로울 일 없이 간단하게 숫자 놀음으로 셈을 칠 수 있으니, 이런 건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실무와 사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다. 둘 중 하나라도 개판 되면 일이 안 돌아간다. 규모가 작고 미흡하다면야 그냥 들이박으면 그만이지만, 규모가 커지면 효율을 위해서라도 별 도리가 없어진다.
“아, 정말 매번은 아니어도 이 짓 할 때만 되면 사람 미치겠다니까.”
서류의 산을 능숙하게, 두 시간도 채 안 돼 처리한 휴즈가 앉은 채로 기지개를 쫘악 펴며 투덜댔다.
반면 휴즈이 반에 반도 안 되는 분량으로도 에드릭은 쩔쩔매며 간신히 그와 비슷한 시간에 서류 작업을 끝마칠 수 있었다.
‘타이밍이 너무 기가 막히잖아?’
마치 자신이 이 정도 시간을 걸릴 걸 감안하고 이 정도 안건을 맡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타이밍이 너무 적절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아침 먹었냐?”
“…그렇지 않아도 배가 등가죽에 달라 붙을 거 같습니다.”
“먹고 오지 그랬어?”
“음, 그럴 일이 좀 있었죠.”
“잠 좀 줄여라. 하루 종일 자냐?”
“…충분히 줄이고 있는데요.”
“허허, 말대답은! 자자, 그건 됐으니 빨리 배나 채우러 가자. 나머지 이야기는 식사 다 끝낸 다음 이야기하고.”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점이 휴즈의 장점이었다. 그는 일할 때는 좀 심하게 몰아붙이는 듯 했지만 일 끝나면 완전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강요하는 것도 없고 물 먹이는 일도 없이 방임 방치를 고수하는데, 말 그대로 ‘자기 일만 잘해라, 그럼 터치 안 한다, 진짜로!’ 이런 주의였다.
마르뎅 상회는 내부에 따로 식당 겸 배급소를 마련했는데, 거기서 적당히 배를 채운 우리는 휴게실 부근에 앉아 이후의 일에 대해 논의했다.
“너는 일단 배울 것들마저 배우면서… 여기 사람들 자주 만나며 기반 잘 닦아 놓고. 백화점 건물 완공된 다음에 홍보하고 이리저리 기웃거리면 늦으니까, 오픈 직후에 확 몰아치게 해서 아예 문전성시를 이루게 하려면, 지금부터 차곡차곡 작업 들어가야 한다. 그러니 귀족 가문들 잘 둘러 치고.”
“둘러치다니요?”
“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할 수 있으면 싹다 손을 비비건 발을 비비건 마음을 사두라고. 벌써 데이엔 가도 그렇고, 네이에라 가에게도 마수를 뻗쳤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마, 마수라뇨? 설마요. 아니, 그 전에 소문? 어디서 난 소문이죠?”
“윅스타그램 안 보냐? 이곳 도시에 활동하는 본사 직원이 몇인데. 나중에 살펴보고 도움받을 일 있으면 이런 거 저런 거 물어도 보고. 거 뭐냐, 찾을 땐 아르세이유 해시태그로 찾아보면 거기서 활동하는 애들 쫙 뜰 거다. 방문한 녀석들이라거나.”
“흐음, 그렇군요.”
좋은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한국인만 있는 거 아니니까 괜히 그런 걸로 눈치 보지 말고. 눈치 주지도 말고. 우린 다국적 기업을 넘은 다차원적 기업이다. 인종이니 종족이니 그런 걸로 구분 짓고 이런 짓하다간 너 바로 모가지 날아간다. 주의해.”
“예, 저야… 별로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요.”
그럴 시간도 없고.
타인을 배척하고 뭐라 비판하고 매도할 시간에 먹고 놀고 말지, 귀찮고 번거롭게 그럴 필요가 있겠나 싶었다. 나한테 당장 위해를 끼치거나 민폐를 끼치지 않는다면야, 사실 상대가 누구든 내가 크게 상관할 필요가 있을까 보냐.
“…하긴, 그러니까 엘프들이 오냐오냐 해준 거겠지. 아, 근데 너 엘프들 동네는 들러봤냐?”
“아직요.”
“시간 나면 가 봐. 도시가 제아무리 넓다고 해도 한 달을 넘게 있었는데 다 못 둘러본 게 말이 되냐?”
“에이, 저도 뭐 이것저것 배우다 보니….”
“어, 그래. 그것도 이해는 가네. 아무튼 시간이란 게 많은 듯하면서도 적으니, 부지런히 둘러봐야 될 거다? 기회가 되면 영향력 있는 명사나 귀족들하고도 연을 맺어 두고. 정말 꼰대 같은 귀족들도 많긴 한데, 그렇다고 외면하고 배척하다 보면 나중에 손해 본다. 다 우리 고객이니까 고객 응대한다는 마음으로 둘러치라 이 말이야.”
그런 식으로 공적인 이야기를 어딘가 가벼운 흐름으로 주고받곤 거기서 헤어진 나는 곧장 데이엔 가로 향했다.
오늘 순서는 그쪽이 우선이고, 이후 헤다 가에 가서 또 예법이며 이런저런 것들 소소하게 배우고, 다음엔 언어며 문화에다가….
그러고 보니 브리앙르가 사라져서 체력 단련 시간이 사라진 탓인지 의외로 스케줄이 빈 것도 같고… 끄응.
말이 그렇지 막상 이리저리 치이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시간에 쫓기겠지만.
라는 상념에 젖어 든 채로, 마차에 탑승해 바깥 풍경을 두 눈에 담으며 에드릭은 데이엔 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