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28. 부지런히 그렇고 그런(?) 일상 이어가고 있나이다.
그 뒤로 며칠을 더 묵은 알리샤가 돌아가기 무섭게, 귀신 같은 타이밍으로 에우리에 누님의 일정이 살짝 완화됐다. 덕분에 애정 행각에 굶주린 그녀가 한창 엉겨온 덕에…… 이건 이것대로 행복했다.
엘프들 주거지로 출장 가는 것도 슬슬 끝물.
아쉬운 점이 있다면 뮬리아하고는 끝까지… 못 했다는 거였다.
아니, 이렇게 보면 내가 거기에 미친 거 같잖아?!
…맞나?
그녀는 자신의 술이 완성됨으로써 그걸 다른 하프 엘프들 포함해서 아직 풋풋한(?) 엘프들에게 널리 퍼트리고자 여러 곳을 둘러보게 됐다며 나중을 기약하자는 짧은 메시지만을 전달받았다.
인연이 있다면 또 보겠지만… 왜 그리 아쉬울까.
축제 비슷하게 한자리에 모여 회포를 풀 겸 잔칫집에 온 것처럼 이것저것 먹고 춤도 추고 노래도 듣고 부르고… 아무튼 요란하게 놀다가 엘프 거주지를 떠나게 됐다.
거기다 나는 엘프들에 대해 나름 과소평가한 듯 했는데… 의외로 다종족이 한데 어우러져 사는 구역엔 그렇고 그런 거리(?!)엔 엘프들의 그렇고 그런 가게들도 제법 규모가 상당한 편에 속했다.
인간이 한때 세계의 중심이라는 과대망상에 빠져 이곳저곳 민폐를 끼쳐대던 당시, 노예로 붙들려온 여엘프들은 여러 가지 의미로 현실을 맛보게 됐다.
우리가 흔히 노예 엘프하며 떠올리는 비참한 상황, 그러한 편견은 보통 10에 5.
여기서 나머지 5, 반에 해당하는 노예로 끌려갔으나 오히려 인간 쪽에서 매혹당해 사랑에 빠져 부인으로 삼거나 정실이 아니더라도 처로 삼는 한이 있더라도 곁에 두려는 움직임이 빈번했는데, 문제는 이들 대부분이 남편인 그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는 거다.
당연 자식들도 예외는 없었기에, 이로 인해 인간 귀족 가문의 1/6이 엘프가 안주인 겸 어르신, 또는 가문에 주인이 되는 기이한 상황이 펼쳐졌는데, 이로 인해 순혈주의에 입각한 인간 나부랭이들이 영토 욕심, 영지 욕심으로 정치적 시비를 걸어 적당한 명분까지 유지해 종교까지 등에 업고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로 인해 상당한 규모의 전쟁이 발발.
이게 이곳 세계에선 꽤 유명한 사건인 혼혈 분쟁, 이후 순혈 전쟁이라 불리는 상황으로 이어지게 된다.
여기서 엘프를 필두로 한 타 종족들, 하프들이 엮여 이게 또 터무니없는 군사 동맹으로 연결되는데, 이로 인해 제국은 여러 갈래로 찢겨 전쟁이 끝난 지 무려 백여 년이 지난 아직도 몇몇 나라들은 우리가 진정한 제국의 계승자, 후예다 뭐다 하는 웃기지 않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한다.
…동로마 서로마가 각자 우리가 진정한 로마 제국이다! 하고 주장하는 게 문득 떠올랐다.
그나저나 엘프 파워가 의외로 대단했다는 걸 헤아리게 됐는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자, 그럼 아까 언급한 이들에 속하지 않은, 나머지 엘프들이 있다.
그리고 슬픈 건지 감탄해야 할지 조금 분간이 잘 가지 않았지만, 몇몇 엘프들은 인간의 과도한 성욕에 의해… 여러 가지 의미로 눈을 뜨게 된 이들이었다.
의외로 제국 기준으로 노예의 처우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중에 정실부인이 되고 후첩으로까지 들인 걸 테지.
노예는 정당한 소유물이고 합법적 재산으로 취급받았기에, 이걸 학대하고 함부로 대하는 이들은 자기 사물을 함부로 대한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터라 여러 의미로 안 좋은 소문이 돌곤 했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에게 갑질을 안 하고, 인간적 대우를 해줬냐 하면… 그건 개인차가 있겠지만 공부를 통해 파악한 바로… 오히려 노예인 그들이 식민 지배를 받던 백성들보다 훨씬 조건이 나았다는 건 확실했다. 단지 자유가 없으며 시키는 걸 제대로 이행 안 하면 처벌이 뒤따랐다는 게 어느 의미론 지옥 같았을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순리와 조화로 평생을 지내온 엘프들은 그런 인간들이 형성한 굴레, 틀, 규칙에 의해 지옥 아닌 지옥을 맛보았고, 드물게 몇몇 소수는 체념하고 숨을 끊는 일 또한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다른 의미로 그 상황에 적응한 이들이 있었는데, 주인을 짓눌러 그들을 매혹 시킨 엘프들이 역사의 밝은 면(?)을 상징한다면, 시작부터 끝까지 주인의 밑에 깔려 버둥대다 거기에 익숙해진 건 물론, 거기에 완전히 놀아나고 적응해버려 그러한 삶이 삶에 의미가 되어버린 엘프들도 분명 존재했다.
문제는 노예를 돌보기 힘들거나 팔아 치우거나, 방치하는 이들이 부쩍 늘어나고, 거기다 순혈 전쟁 이후 노예에서 해방된 엘프들에겐 여러 선택지가 놓였는데, 비극적이게도 이들은 순수성과 조화를 잃었다는 이유로 인간보다 더 폐쇄적이고 극단적인 순혈주의 하이 엘프들에 의해 배척당해 내쫓기는 신세가 되어 오고 갈 수도 없는 입장이 돼버렸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터를 꾸려야만 했는데, 쉬운 일은 아니었다.
거기서 다시 자발적으로 성적 쾌락, 취향에 심취한 엘프들이 홍등가며 윤락 업소로 스며드는데, 당연 인간들 기준에선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마을 규모가 부풀고, 일개 도시가 환락가로 변질되는 사태로까지 이어지는 진풍경이 발생한다. 오죽하면 이로 인한 불만이 마구 터져 나와 다시 내쫓기는 신세가… 개중에 몇몇은 또 각 영주의 후처가 되는 사태로까지 이어지니!
…듣다 보면 정말이지 저세상 이야기로 들렸는데,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란다.
“썩 달가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워낙 오래 전 이야기라. 그래도 요즘 신입들은 순수하게 자기들이 지원해서 온 거니까 우리하고는 또 다르지. 복 받은 녀석들이라니깐.”
한 번 찾아오라 해서 찾아간 업소가… 일전에 나와 공개적으로 섹스했던 엘프, 다프넬이 몸담은 곳이었는데, 다프넬은 한창 일 하고 있는 중이라 선배인 자신하고 이야기하자며 방 하나를 잡은 상황.
물론 방에 왔다고 무작정 떡칠 생각은 아니었기에, 그럭저럭 마음을 바로잡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와중이었다.
“엘프 중에도 색녀라고 할까, 음란한 애들이 있었으니까. 나도 옛날엔 좀 그게 심했는데, 나이를 먹다 보니 옛날만큼은 안 땅기더라고. 그래서 지금은 애들 관리나 하고 있지. 예의 없는 것들 버릇 고쳐주는 것도 겸해서.”
그때도 그랬지만 엄청 매력적인데도 어딘가 무거운 느낌이 들었는데, 상상 이상으로 나이가 드는 축에 속했나 보다. 인간의 기준으론 잘 구별이 안 됐지만 말이다.
“그래도 너 때문에 다프넬이 제 역할을 해내고 있으니까 그건 다행이다 싶어.”
“…제가 도운 게 확실한 건가요?”
“그럼. 덕분에 얘도 섹스의 즐거움을 알고 지금은 꽤… 그렇단다?”
음, 묘하게 가슴이 아픈데.
“그 아이도 초원 엘프 출신이라 기질이 좀 험한 편인데 좀처럼 표현을 안 해서 말이지.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닌데 엘프가 자위하고 있는 걸 봤을 땐 나도 깜짝 놀랐다니까?”
초원 엘프들은 배척당한 엘프, 내쫓긴 엘프들이 모이고 모여 유목 부족을 이뤄, 나중엔 전쟁 용병으로까지 뛴 전투 민족에 가까운 엘프들을 말한다.
말을 타거나 마물을 길들여 그걸 부리는 것도 그렇고, 자연에 순응하고 조화를 꿈꾸는 엘프들의 기질이 거칠게 드러난 케이스인데, 자연에 순응하는 길이랍시고 적자생존의 길을 걸으며 인간이 조금이라도 눈살을 찌푸리거나 망설이는 것조차 이들은 거뜬히,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해버리기에 두려움의 온상이 되기까지 했다. 수가 적어서 망정이지 수가 좀 많고 뛰어난 지도자만 갖춰졌다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몽골 마냥 대륙을 휩쓸지 않았을까?
윅스타그램으로 선배와 이것저것 인스턴트 메시지 주고받다 엘프 이야기가 나와서 그쪽으로까지 이야기가 번졌던 기억이 난다.
“엄청 순해 보였는걸요?”
“그거 내숭이야. 엘프답지 않게 걔가 내숭 엄청 잘 떤다니까? 평소엔 입에 욕을 달고 살거든?”
“……정말요?”
“근데 남자 앞에만 서면 종족 불문하고 저런다니까?”
이건 이것대로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네가 애무 좀 했다고 아래로 물 줄줄이 흘린 것부터 뭐 이상하지 않니? 순진한 애가 민감해서 그렇다고 하기엔… 그때 좀 심했잖아?”
“그거야….”
전 제가 애무를 썩 잘하는 줄 알았죠.
역시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나 보다.
“거기다 네가 워낙 상냥하게 대했어야지. 걔도 그 덕분에 남자에 대한 이상형이 너로 바뀐 거 알아? 상냥한 사내일수록 막 달아오른다고 그런 부류만 보내달라고 얼마나 주책인지.”
“…그래서 그런 사람들 많답니까?”
“나이 든 인간들 중 조금 개념 잡힌 애들 위주로 보내주고 있지. 인간 남성은 어린 소녀라면 눈이 뒤집힐 거고, 다프넬은 자길 진심으로 좋아해주고 배려해주려는 남성이면 또 죽어나니, 조합적으론 괜찮다고 보거든.”
“…잘 풀리고 있다면야 뭐, 다행이죠. 크루넬 씨는 그럼 현재에 만족하시고요?”
“나는 그런 거 이제 모르지. 그냥 살다가 갈 때 되면 가겠지. 이렇게 말해도 아직 100년은 거뜬히 살겠지만. 우리가 늙어가기 시작한다면 그건 정말 죽을 날이 머지 않았다는 거니까. 예전에 비하면 나도 많이 익었지.”
그러면서 자신의 얼굴을 만져대는데…… 저기요? 주름 하나, 잡티 하나 없으시면서 그런 소리하시면 좀 그렇지 않나요? 피부조차도 탱탱하고 윤기가 번쩍이는데 말이죠?
“이상한 편견 가지지 말라고 부른 거야. 보다시피 엘프들 내에서도 인간 못지않게 음란한 녀석들 많으니까. 그쪽 거주지엔 나이 어린 엘프들 투성이라 아직 잘 모르는 애들 투성이라 그런 거지. 그런 애들마저 애를 낳길 종용하는 현 흐름이…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좋다고 서로 그러다가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거니 나도 뭐라 하긴 좀 그렇네. 그런 식으로 강해지면 어쨌든 우리처럼 무고하게 붙들려서 욕보는 일들은 없을 테니까.”
“흐음, 잘 풀렸으면 싶네요.”
“뭘. 너도 노력한 김에 덕도 봤잖아? 떡도 많이 치고?”
“아하하… 저야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죠. 이런 저라도 신뢰를 주셨으니까요.”
“너는 공식적으로 허가된 인간이잖아? 아직도 전도유망하다고. 애초에 하이 엘프가 그걸 줬다는 거 자체는 아예 널 엘프들 심처로 끌고 가겠다는 심산이니까 긴장 늦추지 마라.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들면 본래 형식적으로 주는데, 하이 엘프가 직접 줬다면 이건… 좀 심각한 거니까.”
“…무서워지게 왜 그러세요?!”
“아니, 거짓말 아니라 평소엔 자연스러움이니 조화니 순리니 이런 거 논하는 애들인데, 뭔가에 딱 꽂히면 인간보다 훨씬 지독해지거든. 인간이 순혈주의 떠들어대도 이종족과 떡 치는 판국에 엘프들은 죽는 그날까지 안 그러거든. 그냥 순혈 엘프도 지독한 판에 하이 엘프, 순혈?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만으로도 몇 발은 쌀 거 같구나.”
“…….”
저 싼다는 건 지린다는 표현인 거지? 왜 쾌락으로 다른 걸 쌀 것 같다 들리는 걸까. 내 뇌도 드디어 맛이 간 걸까?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때마침 문을 열고 다프넬이 들어섰다.
“에드! 왔으면 나한테 곧장 달려왔어야지!”
…확실히 변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우선 그녀의 저 적극성을 보라.
단번에 내게 안겨 오는 그녀. 몸에서도 예전보다 훨씬 짙으면서도 뭐랄까, 페로몬 비슷한 그런 향기 느껴져 무심코 아래 쪽이 욱씬거리는 듯한….
거기다 얼굴을, 표정을, 눈빛을 보라.
…왜 보는 것만으로 마이 주니어가 발기가 되는 걸까?
그녀의 음란한 표정, 달아오른 눈빛, 마치 당장에라도 하자는 듯 재촉해오며 비벼오는 몸짓도 그렇고, 옷이 얇은 점도 그렇고!
“왜? 바로 할래?”
“그럼요!”
크루넬 씨의 말에 다프넬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저, 제 의견은요?”
“나랑 하는데 싫을 리가 없잖아?”
…어, 그야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나도 알고는 있어.”
그러다 돌연 비장한 분위기, 뭔가 안쓰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그녀.
“내가 에드의 옆에 오래도록, 영원토록 함께 할 수 없을 거란 건 알고 있어. 에드 너도 실은 좋아하고 평생 곁에 있고자 하는 여자가 있을 테고. 아직 확신은 없더라도, 생각 나는 여자들이 있긴 하지?”
문득 여러 사람이 떠올랐다.
그리고 탄식했다.
이러다 잘못 하다간 여럿 눈물 짓게 하는 건 아닐지.
……혹은 나야말로 거대한 착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지, 그게 또 내심 걱정되기도 했고.
“그래도 말이야. 오늘 여기서, 나하고 있는 시간만큼은 정말 나만 보고, 나만 사랑하고, 나만을 위해주는 거야. 나도 에드라면 여기서 우리가 같은 독을 마시고, 이 자리, 이 곳에서 같이 죽더라도, 그래도 여한이 없을 그런 사랑을, 애정을… 나누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에드는 그런 내 기대조차 부응 못 시켜주는 안쓰러운 남자였어? 내 첫 사랑인데?”
“…….”
못 본 사이, 남자 유혹하는 법을 아주 제대로 배우셨나 보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어찌, 어찌 마다하겠는가.
“그렇게 됐으니까요, 크루넬 님! 혹시… 같이 하시고 싶으시거나 그런 건 아니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