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28. 부지런히 그렇고 그런(?) 일상 이어가고 있나이다.(3)
그러면서 소주잔에 직접, 팀장님이 술을 따라주는데 괜스레 망극한 기분이 들어 양손으로 고개를 수그려가며 받게 됐다.
“주임도 한잔 받고.”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팀장님!”
“…징그러우니 감사한 걸로 족하게.”
자기 술잔에 소주를 따르려는 그녀를 잽싸게 만류한 선배가 조심스레 소주병을 강탈해 양손으로 그녀의 잔에다 술을 채워 넣었다.
“자작이라니요! 평생 솔로로 살고 싶으신 겁니까?!”
“…하는 소리하고는.”
피식 웃는 그녀가 술잔을 들자 우리도 덩달아 술잔을 들었다.
“아무튼 기회가 됐으니, 다들 각자 역할에 맞춰 잘들 해주고 있어 그 점은 자랑스럽게 생각하네. 언제나 초심을 잊지 말고, 분발하다 보면 더 나은 기회가 올 것이니… 맹자 양혜왕 상편에 따르면.”
“저기 팀장님, 좋은 말씀, 술잔 들고 하기엔 저기, 팔이 좀 아픈데….”
“…미안하군. 버릇이다 보니.”
버릇으로 맹자를 논하는 건 조금… 이상하지 말입니다?
“알았네. 잘들 해줄 거라 믿고, 지금은 편히 먹고 마시며 즐기도록!”
“…그리 말하시니 왕께서 신하들에게 연회나 잔치 즐기라며 선포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군요.”
“자네는 그 입 좀… 후우!”
…말을 잘하는 게 항상 득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걸, 부득이하게 실감한 계기가 됐다는 게 조금 웃겼지만, 아무튼 고기는 맛있었고 편하면서도 적당히 기분 좋은 긴장감에 휩싸여 이것저것 묻고,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정직원이 돼서 회포 풀게 된 건 이번이 생전 처음이어서 그랬던 것도 있지만, 확실한 건 선배든 팀장님이든 전부, 좋은 분들이셨다는 거다.
…본래는 선배라기보다는 직속 상사, 사수 부사수 관계여야 할 텐데 말이다.
규모가 커지고 할 일이 구체적으로 정해지면 나중에 관계가 다시 재정립될 수 있다고 선배며 팀장님은 말했지만, 과연 내가 주임이며 대리를 달고 내 아래, 부사수나 후배 직원이 생길 날이 올지… 그것도 조금 걱정됐다.
…괜한 걱정일지도 모르겠지만.
--------
집으로 귀환하니 괴상한 소문이 돈 모양이다.
무역 회사에 취직했다더라.
외국제 기업에 취직해서 이곳저곳 오고 간다더라.
뭔가 비밀스러운 일 하는 거 아니냐?
심지어 배 타고 나가는 거다, 등대에 처박혀 알바 한다 하는 식으로까지 온갖 소문들이 퍼져 나갔는데,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조사를 한다 쳐도 제대로 맞출지도 의문이지만.
여행 다녀오신 게 무척 좋았는지 집에 돌아오기 무섭게 밥상 상태가 장난 아니었다.
“몸은 좀 어떻고?”
“저야 한창때잖아요.”
한창은 무슨. 자고 일어나면 삭신이 다 쑤시는데. 흑흑.
이젠 하루하루가 부담인 나이.
스물이 꺾이고 맨 앞자리에 3이 붙게 되면 슬슬 감이 올 거다.
아, 운동 안 하다가 정말로 가겠구나, 하는 게.
청춘은 끝났고 이제부턴 내리막길만 남은 상황. 내리막길조차 안정적으로 가고자 노력해야 하는 시점.
근데… 나보다 배는 오래 사신 분들 앞에서 이런 약한 소리, 헛소리를 늘어놓을 순 없으니 건강하다고 밝히는 수밖에.
“그렇긴 하지. 내가 네 나이 때엔 벌써… 몇 살이었더라?”
“그걸 또 기억 못 해요! 하이고! 이 진상아!”
부모님께서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눈에 담으며 난 조용히 김치찌개와 쌀밥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말 그대로 일상 그 자체네.’
그림으로 그려 놓은 듯한… 가끔 보면 정겹지만 자주 보면 헛웃음이 슬그머니 나오고야 마는, 그런 일상이었다.
이렇게 보면 당장 받는 급여에 만족해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집값은 살인적이고 노후를 생각하고 이러면 비축해야 하는 돈만 최소 억 정도는 준비해둔다 치더라도….
‘결혼 안 한다 쳐도 그 정도는 있어야지.’
목표를 10억 정도로 잡고… 도시에 굳이 집착할 거 없이 시골에다 집 짓고 적당적당 살면 되려나?
땅 투기하는 사람들이 서울 집값 비싸다고 이제 지방 쪽에 사람들 몰릴 거 대비해서 그쪽 땅 사서 시세 올려놓고 있다며 한창 논란인 와중인데, 어떠려나.
“아들.”
“예.”
“네 걱정이나 하세요.”
“예?”
“자기 앞가림도 이제 막 하게 된 놈이 또 또 머리 굴리는 꼬락서니하고는.”
“머리 굴리다니요? 그냥 밥 먹으면서 이런저런 생각도 좀 하고….”
“쓰잘데기없는 생각 말고 일이나 잘해! 그러다 잘려서 또 방구석에 처박히게? 정장 입고 면접 보고 이력서 넣고 이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아, 그래서 취직 잘 했잖아요! 왜 또 그래요?”
“그래, 밥 먹는데 소화 안 되게 너무 그러지 말고….”
“조심하라는 거지! 살다 보면 언제 어떤 일이 생겨 미끄러지고 떨어지고 넘어질지 모르는 일이라니깐?!”
“어허! 거 부정 타게 이상한 소리 그만 좀!”
“그럴 수 있다는 거지! 뭔 말을 못 하게….”
“하하하.”
그저 웃지요.
예전에는 듣기 불편했는데, 여유가 생겨서 그런 걸까.
듣는 내내 난감하다기보단 뭔가 걱정하여 이런저런 덕담이랍시고 해주는데, 그게 원하는 것처럼 나오지 않아 말하면서도 답답해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예전엔 이런 것도 잘 못 살폈는데, 다시 보니 주름도 늘어나신 거 같고… 피부도 괜찮으셨던 거 같은데 벌써….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있으니, 지금이라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밥 한그릇을 뚝딱 비웠다.
“더 먹어.”
“예? 아뇨, 배부른데요.”
“사내새끼가 그거 먹고? 일 별로 안 하나 봐? 한국인은 말이야, 밥심이야 밥심!”
“……예예,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한 그릇 받아 다시 배를 채워가며, 나는 다시금 다짐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효도까지는 못 하더라도, 불효자 안 되게 아들 노릇 정도는 열심히 하자고.
-------
일주일 늘어져 여독을 풀고 영화며 게임 좀 하니 벌써 출근 날이 찾아왔다.
보통 출근하면 전날서부터 몸이 피곤하고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야 하는데… 기이하게도 기대감과 들뜨는 느낌이 앞섰다.
‘현실에선 떡 못 치지만 거기선 그냥… 크흠!’
오죽하면 현실로 취직 이후론 야동은커녕 마스터베이션조차 안 하게 됐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지.
출근하는 동안은 여전히 지루한 감이 있었지만, 역시나 음악 감상 시간이란 맥락으로 보내니 그럭저럭 살만한 느낌이다.
…일전에 출근할 때도 이런 기분이었던 거 같은데.
매번 데자뷔를 느끼는 건 웬 말인가.
본사로 들어와 선배와 팀장님과 한 차례 미팅한 다음, 다시금 저쪽 세계로 향한다.
그렇게 나는 안태민에서, 오늘도 에드릭으로 변모한다.
-------
그렇게 다시 복귀한 뒤 2주 정도가 흘러 백화점 완공을 눈앞에 둔 시점이 찾아왔다.
말도 안 되게 빠른 속도로 건물이 지어졌는데, 입점을 위한 가게들을 선별, 분류하고 또 사람들과 만나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이제야말로 제대로 밥값을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됐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니까.
덕분에 예전처럼 마음 놓고 떡 치러 다니지 못해서 내 쪽도 상당히 욕구 불만에 시달렸지만, 다행스러운 건 에우리에도 그런 맥락으로 가끔 찾아와 서로 회포를 풀었는데, 그녀의 체력이 미흡한 점이 내겐 큰 도움이 됐다. 그도 그럴게 다음 날에도 영향을 크게 받을 정도로 심하게 떡을 쳤다면, 휴즈가 눈치 주며, 완곡하게 돌려 까댔을 테니 말이다. 이게 군대 갈굼하고 느낌이 비슷해 듣다 보면 절로 혼이 쏙 빠져나간다.
사실 백화점 업무는 착수했어야 했는데, 선배는 사람이 바빠 봐야 일도 잘 배우고 정신도 차린다며 일부러 한 주 정도 일을 늦춰서 진행 시키게 하라고 한 걸, 휴즈가 억하심정인지 실수인지 2주 뒤 알려준 터라 아주 지옥을 맛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요번 달은 휴가도 못가고 50일 가량을 붙들려 있어야 했는데, 때마침 백화점 개업 당일이 3일 뒤로 다가오니 장난 아니었다.
집에 못 돌아갔기에 아바타에서 본체로만 돌아가서 전화로 사정만 설명하고 다음 달에 간다는 식으로 말은 해뒀는데… 이거 요번 달도 이런 식으로 흘러가다간 일머리에 치여 익사할 것만 같았다.
백화점 내부엔 이미 사무 업무를 볼 수 있는 공간은 전부 완성된 상태였기에, 이미 사장실에 입주한 나는 그곳에서 서류와 온갖 업무에 치여 여기서 숙식을 이어가고 있었다.
책상 명패엔 [마레아 백화점 아르세이유 점 대표이사, 에드릭 코넬]이라 적혀 있었다.
마르뎅 상회와 구레아 상회가 합심해 투자, 설립했다는 식으로 시나리오가 짜여 있었으며, 나는 그 2개를 이어주는 가교이자 총 책임자라는… 명목으로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셈이었다.
“힘드냐?”
“…장난 아니죠.”
선배는 예의 근육질의 금발 태닝 남이 되어 날 찾아왔다.
드라마에서 볼 법한 느낌의 사장실이었기에… 평생 익숙하지 않을 거 같았음에도 제법 익숙하게 느껴졌다.
선배 또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한숨 돌리고 있었는데, 내가 맞은편에 앉자 실무와 잡담을 섞어 가며 공무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탑은 너지만 실질적으로 내부 관리 및 경영은 내가 할 테니, 넌 대외적 활동이나 집중하면 될 거다. 높으신 분들 만나면서 아부 떨고 청승 좀 떨면서 할 일 잘하면 돼.”
“…그거 저보단 선배 쪽이 더 낫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본사는 너에게 그 역할을 맡겼지. 그만큼 실수에 대한 책임도 막중한 거고. 나는 짧고 길게 가는 게 모토니까, 그런 쪽은 영 아니거든. 관리직에서 꿀 빠는 게 내 희망 사항이기도 했고. 다 적성에 맞는 바가 있으니까, 할 일 해봐. 정 아니다 싶으면 너도 이런 쪽으로 오면 되는 거고. 기회라도 주는 게 어디냐?”
“음, 그도 그렇네요.”
“휴가도 이번엔 우리 둘이 아니라 너 먼저 가고 그 다음 내가 가는 식일 거다. 다녀오면 인수인계 받아서 백화점 경영에 대한 걸 아주 박 터지게 주입해줄 테니까 준비 단단히 해둬라. 아, 그리고 축하한다. 너 이제 주임이다.”
“예? 벌써요?”
기겁할 만한 소식이었다.
“난 대리고.”
“…이거 고속 승진 아닌가요?”
1년도 안 됐는데 벌써?
“내가 말했지? 윤미라 팀장님 끈 잘 붙들라고?”
“그런 말 하셨던가요?”
“했어 인마. 기억 못 하는 척하기는.”
아니, 정말 기억 안 나는데….
“후임이 들어올 거야. 역할군이 다르니 지금까지의 나와 너처럼 선후배 관계 정도겠지만, 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상황 파악 잘하고.”
“어떻게요?”
“눈치껏?”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이해하란 말인가?
“근데 한창 나이라 그런지 키가 좀 큰 거 같다?”
“예, 그렇지 않아도 주변에서 그런 말하더라고요.”
“그 아바타는 외모적으론 SS급이니 잘 관리해라. 외모도 인마, 스펙이고 능력이야. 네 주변에 여자들이 달라붙는 이유가 뭔지 기억해둬.”
“끄응.”
단순히 내가 매력적이라 그랬다고 하면 염치에 없는 걸까?
그 매력의 대부분이 외모라는 게… 슬픈 일이다만.
“외모가 최우선, 그리고 관계를 이어가면 이제부턴 성격, 궁합, 화합, 조화… 이런 게 다 필요한 거니까. 그거 엘프들한테 배운다는 거는 제대로 배우고 있냐?”
“…바빠서 연습도 못 하고 있죠.”
“배우고 갖출 수 있는 건 다 갖춰둬. 가진 게 많아야 보여줄 게 많고, 그래야 남들한테 무시 안 당하고 우리 하고 싶은 걸 하는 거니까. 잘 생기기만 한 청년과 잘 생겼는데 힘도 쎄고 능력도 쩌는 남자, 어느 쪽이 매력적일까? 물론 능력 쩔고 힘이 쩌는 여자들은 오히려 약한 남자에게 끌릴 수 있겠지만… 그때는 힘을 숨긴 애송이인 척하면 되는 거고.”
그 유명한 ‘힘숨찐’ 컨셉을 말하는 건가?
“저쪽이든 여기든 스펙이 갑이라 이거죠?”
“인류가 사회를 구성한 이래 스펙은 항상 옳았다. 선사 시대에도 사냥 잘하고 힘쎈 남자가 우대 받았을까, 배척받았을까? 잘생긴 것도 당연 포함하면 말할 필요도 없겠지?”
“열심히 해야겠네요.”
“본사는 다 퍼주는 호구가 아니야. 명심해라.”
“이미 받은 게 많아 그것들 보답하는 것만으로 벅찹니다.”
“그래, 그 마음가짐이다.”
선배는 일 보라며 사장실을 나섰다.
그리고 나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네.”
넋 놓은 웃음이 사장실을 건조하게 채워가는 가운데, 할 일이 태산이었기에 별수 없이 서류 무덤 속으로 다시금 기어 들어가야만 했다.
…근데도 이 과정이 내 미래를 단단하게 받쳐줄 걸 생각하니, 불합리하다거나 절망적인 느낌은 일정 들지 않았다.
이 또한 단계에 일환.
마치 계단을 오르고 올라, 드디어 고지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은, 그런 심경이었다.
그나저나 지금이 입사하고… 그러니까, 반년째? 다 돼가고 있던가? 아니, 지났나? 모자란가?
“…뭔 의미가 있나.”
확실한 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는 거다.
그러니 열심히 분발하자.
억대 연봉이 아니라 수십억을 통장에 꼴아박아 안정적 삶을 구가하기 위해서라도!
---------
그리고 시간은 숨 가쁘게 흘러, 눈 깜짝할 사이 몇 개월이 지나더니, 마침내 입사 1년째를 찍게 됐다.
벌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