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29. 경력 넘치는 신입.
때마침 마차에서 내려 육중한 가죽 가방을 들쳐멘 여성.
그녀가 뒤이어 마차에서 내린 금발의 구릿빛 피부의 사내를 향해 떨떠름한 시선을 줬다.
“저, 알푸스… 선배?”
“여기선 부사장이다. 릴리에나 사원.”
“…저는 저쪽도 이쪽도 둘 다 사원인 셈이군요.”
“왜? 싫어?”
“아뇨. 싫을 리가요.”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그녀.
그래도 뒤가 어지럽지 않도록 뒤쪽을 리본으로 묶어 내리고, 옆쪽은 적당히 내린 형태였는데, 지나가는 이들이 자꾸만 그녀에게 시선을 준 덕분일까, 조금 낯부끄러운 심경으로 머리를 손빗으로 빗는 시늉을 취했다.
“시선 모이는 건 익숙해져야 될 거야.”
“…어째서요?”
“아바타가 절세 미인이니 아무래도 시선이 쏠릴 수밖에?”
“…….”
미인 소리 들어 싫을 여성이 있겠냐만, 이런 식의 관심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을지, 조금은 걱정이 들었다.
물론 괜한 걱정이었고, 5분도 채 안 돼 즐기기까지 했지만.
“그런데 제 선배 겸 상사분은 주임이라 하셨죠? 여기선 대표이사, 사장님이시고요?”
“그렇지.”
“…부사장님은 부사장님이시고요?”
“실무는 내가 틀어쥐고 있으니까. 녀석은 이곳저곳 오가는 곳이 많으니 부사장이나 상무 직함보단 대표, 사장 쪽이 아무래도 좋지 않을까 해서 그렇게 정한 거니 그런 거에 너무 눈치 볼 필요는 없을 거다.”
“…그렇군요.”
또래 여성보다 머리가 하나 더 큰 덕에 그녀는 지나가는 남성들의 시선을 독차지하다 시피했다.
심지어 가슴도 평균보다 크고, 몸매 균형도 남성이 보기엔 절로 눈길을 사로잡고, 그러다 못해 입에서 침이 절로 흐를 정도로 매력적이었기에 그녀가 지날 때마다 사내들의 시선이, 여성들의 시선조차 몰려 그녀는 생전 겪어 본 적 없는 관심도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잘 생긴 남자들, 예쁜 여자들은 항상 이런 기분으로 산단 말이지?’
왜 그들이 목숨 걸고 몸을 가꾸고 피부를 신경 쓰고 그러는지… 이해가 됐다. 잘 생기고 예쁜 애들이 그런 거에 더 민감하다 들었는데, 확실히 이 정도로 주목받으면 어지간히 털털한 경우 아닌 이상 눈치를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게 느껴졌다.
조금 색이 옅은 흰색 천, 온몸 착 달라붙어 맵시를 살려주는 일자형 원피스인데, 기능성 복장이다 보니 움직이기는 무척 용이했다. 감촉도 좋고 재질도 좋아 본사가 제법 신경 써서 제공해준 옷이었던 거 같은데… 문제가 있다면, 이런 옷을 생전 처음 걸쳐본 덕에 위화감이 상당했다는 점.
집에선 항상 펑퍼짐하게 츄리닝만 입고 다녔고, 회사 다닌답시고 입는 옷은 항상 세미 정장이 전부였으니 오죽하겠나.
그나마 여긴 굽이 높은 구두를 안 신어도 되는 게 조금 편했다.
신발은 딱 봐도 철을 두른 듯한 철제 부츠를 신었는데, 속 안감은 부드러운 가죽으로 맞춤형으로 고정된 상태여서 그런지 적당히 공간이 남아 느낌도 좋았다.
신발 만드신 분이 말하길, 원래 제대로 된 신발은 발에 꽉 끼는 게 아니라 약간 여유를 남겨야 발이 편하며 오래 신을 수 있다고 설명을 해줬는데, 실제로 수제화며 맞춤 구두를 맞출 때도 웬수 오빠한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거기다 이건 단순히 편한 걸 떠나 그 자체로 상당한… 흉기였다.
무릎에는 못 미치지만 발목과 그 위를 감쌌음에도 마치 운동화를 신은 듯한 느낌이 든다. 판타지 세계에 아티팩트, 명장들이 만들어낸 장비가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마법 효과가 안 딸려 있는 게 조금은 아쉬웠지만.
“여기가 네가 머물 집이다.”
“오….”
제법 큼지막한 저택이었다.
마당에 한눈에 들어올 크기의 정원이 딸려 있었는데 관리를 해주는지 제법 청결함이 유지되고 있었다.
저택은 3층 높이였는데 눈짐작으로만 살펴도 방의 개수가 최소 10개는 넘게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중앙 홀이 눈에 띄었다.
…말 그대로 그림으로 그려낸 듯, 만화나 영화에서 봤을 법한 서양식 저택에 조금 현대적 감각을 섞어 놓은 듯한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자형 계단에 좌우로 나뉘는 양방형 계단도 그렇고….
“몬스터들하고 치고 박을 때도 여긴 판타지 세계구나 싶었는데, 여기로 오니 이건 이것대로….”
“이쪽 세상을 많이 알고 싶다고 했었지? 다양하게? 그리고 출세까지 하면 덤이라 했던가?”
“예, 맞아요. 기왕 하는 거면 왕은 못 돼도 그 근사치까진 가야겠다 싶어서요.”
알푸스가 짧게나마 감탄사를 터트렸다.
“야망이 크네?”
반면 릴리에나는.
“평온한 노후 생활을 위해서죠. 본사에서 들었거든요. 차원 단층 일부에 사유 공간 매입이 가능해지는 시기가 올 거라고요. 그런 거 하나 얻어둬서 여유롭게 살고자 하는 소박한 꿈을 꾸고 있답니다.”
의외로 계획이 확고했는지, 막힘없이 줄줄 튀어나온다.
“…엄청 비쌀 텐데. 땅이 아니라 공간을 사고 거길 사람 살 만큼 꾸린다는 건… 단순히 건물 짓고 인테리어 뭐 이러는 거하고는 차원이 틀린 개념이니까.”
“그러니까 돈 많이 벌기 위해서 출세하고, 출세한 다음 뭐… 좋은 남자들 낚아서 오래오래 해피하게 산다? 그게 제 목표에요.”
“…남자들?”
릴리에나가 당돌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여자가 역하렘 꾸리면 안 되나요?”
“그거야 네 마음이지. 본사 규정만 안 어긴다면야….”
“결혼하지 말 것. 정착은 금물. 근데 애는 낳아도 된다니…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나한테 묻지 마라. 나도 그거 때문에 된통 데인 사람이니까.”
“어떻게요?”
“……그런 게 있어, 인마.”
뭔가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나 보다.
자신만만한 거하고 건방진 건 전혀 별개의 문제. 출세욕이 큰 만큼 처세며 대응에 철저해야 함을 숙지하고 있었던 릴리에나는 즉각 사과의 말을 건넸다.
“죄송해요. 아무래도 제가 너무 막 나간 거 같아요.”
“알면 적당하게 굴러가자.”
말 많고 별 걱정거리 없이 사는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이란 누구나 말하고 싶지 않은 개인사가 하나 둘은 있나 보다.
“짐 풀고, 온 김에 바로 네 직속 상사나 보러 가자.”
“…알푸스 부사장님 기준에선 부하 직원인가요, 상사인가요?”
“여기서는 상사. 현실에서는… 후배지. 딱히 사수 부사수 관계는 아니니까. 너하고도… 비슷할 거야. 맡는 분야가 다르니까. 현실 개념에선 그냥 선배라 부르고, 여기선 사장님 대우만 잘해줘. 어차피 네 역할은 녀석 보좌 겸 호위하는 거니까.”
“굳이 저한테 맡기시는 이유는요?”
“비주얼 뛰어나고 실력도 뛰어난데 두뇌 회전도 빨라. 거기다….”
알푸스가 히죽 웃어 보였다.
“하는 일도 비슷할지도 모르고. 어차피 너 출세하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될 거다. 그런 거까지 고려해서 녀석 밑에 맡기려는 거니까. 아마 시간 지나면 녀석이 오고 가는 곳이 꽤 엄중한 곳들이 될 것이고….”
“그런 곳에서 몰래, 은밀히 핵심 정보며 자료, 증거물이라던가, 염탐 같은 거까지 하라 이건가요?”
“그건 네 하기 나름이고. 할 수 있다면. 다만 들켰을 땐 야단 나니 무리는 하지 마라. 본사가 실수는 봐줘도 실책엔 엄격하다는 건 너도 잘 알지?”
“…예. 잘 알죠.”
덕분에 현실에선 신입 사원, 이곳에서조차 일개 말단병이었던 주제, 얼마 안 가 부분대장까지 됐었으니까.
“공을 세운 만큼 대우해준다. 기대한 것보다 더 퍼준다. 본사의 장점이지.”
“…열심히 해야겠네요.”
릴리에나는 푸르스름한 눈을 깜빡이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둘은 곧장 백화점으로 향했다.
“…여기가 더하네요.”
마레아 백화점 규모는, 그녀가 예상한 것보다 더 대단했다.
판타지 세계에서 백화점 내봤자 얼마나 할까 싶었는데, 이건 현실에서 볼 법한 백화점들보다도 규모가 큰 편이었다.
거기다 백화점 인근에 호텔 건물로 보이는 것까지 새로이 지어지고 있었는데, 알푸스는 테마 파크 겸 놀이동산도 만들고 있다 설명했다.
“본격적이네요.”
입구 크기만 해도 상당한데 사람이 빼곡했다.
인간을 포함해 온갖 종족들이 오가고 있었는데, 대부분 차림새들이 세련돼 보였다.
물론 외부 가판대, 노점 등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건 명백하게 떨어진 부근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널따란 공간은 무수한 마차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부들은 언제라도 출발할 것처럼 대기하고 있었는데, 짐 마차서부터 고급스런 이두마차, 사두마차… 아주 다양한 것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때마침 호텔 벨 보이처럼 짐을 한가득 메고 한 신사의 마차에 짐을 실어준 소년에게 신사가 팁인지 동전을 건네줬다.
“음, 팁 문화는 극혐인데.”
“자발적인 거니까. 나중에 어떻게 변질될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에 길 잘 들여놓으면 저들이 열심히 일할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거니까. 우리 돈 안 들이고 사기를 높일 수 있는데 안 할 이유가 없겠지?”
“…그런 점은 약삭빠르네요.”
“지혜로운 거지.”
…말이나 못 하면.
입구가 아닌 뒷문, 직원들이 갈 법한 곳으로 향하니 보는 이들이 깍듯하게 인사해왔다.
“아, 괜찮으니 일 봐요. 예예, 수고하세요!”
마주치는 이들마다 반응들이 조금씩 달랐고, 알푸스 또한 그에 맞게 목례, 눈웃음, 함박웃음, 손을 흔들거나 양팔을 벌리는 식으로 맞춤형 제스처를 취했는데, 릴리에나는 그게 조금 신기했다.
“천연 인싸시네요.”
“인싸는 만들어지는 거란다. 내가 처음부터 인싸였을 리가 없잖아? 어, 안녕. 눈밑 죽은 거 보니 어제 힘 좀 썼구나?!”
“…팀장님이 말하기로 부사장님은 천연 인싸라 들었는 걸요?”
“그럴 리가! 나도 한때 은따도 당해본 사람이라고! 어, 그래! 휴식 시간 알차게 보내고!”
“상상이 안 가는데요.”
“원래 현실은 잔혹한 법이지. 아, 그래! 나중에 밥이나 같이 먹자!”
…이걸 보면 전혀 아닌데?
덕분에 가는 길만 한참이 걸렸다.
그나마 신기한 건 여긴 에스컬레이터, 무빙워크, 거기에 엘리베이터까지 구현되어 있었다는 거다.
릴리에나와 알푸스는 자연스럽게 윗 분용, 속칭 간부용 엘리베이터 라 불리는 걸 타고 바로 위층으로 향했다.
“하아! 이제 좀 살 거 같네!”
부사장실은 사장실과 인접해 있었다.
“여, 코넬! 잘 지냈나?”
“…으아.”
마치 비서처럼 ‘ㄷ’ 자로 된 데스크에 앉아 서류를 살피던 금발의 여엘프. 그런데 알푸스의 목소리를 듣고 그와 시선이 마주치기 무섭게, 어째 질린 듯한 표정을 짓는다.
“오셨네요.”
“…표정이 왜 그래? 나 다시 봐서 안 반갑고?”
“소름 돋아서요. 근육 너무 징그러워요.”
“…….”
능글맞은 알푸스의 표정이 그대로 무너진다.
“……후우.”
다른 이는 모르겠지만 릴리에나는 그의 표정으로부터 그의 억울함을 읽어냈다.
나라고 이런 근육 가지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이거 아바타라고! 아바타! 아니, 그보다 근육이 징그럽다니! 헬창들이 들었다간 너 참교육 당해 인마!
…그래도 관리 철저히 안 했다면 저 정도로 유지되진 않았을 텐데 말이지.
의외로 핵심을 짚은 릴리에나였다.
“…그래, 에드릭은 안에 있고?”
“예 있어요.”
“손님 있다거나 뭐 들어가면 안 되고 그런 건 없지?”
“음, 그건… 자유롭게.”
“넌 에드릭도 참 싫은가 보다.”
“바람둥이잖아요!”
그리 빼액 하고 외쳤지만, 릴리에나는 입으론 저리 말하면서 전혀 싫은 게 아니라는 속내를 대강 읽어낼 수 있었다.
저건 그러니까….
‘질투네.’
그녀도 상당한 미인이었는데, 엘프여서 미인인 건지 엘프 중에서도 미인인 건지는 아직 분간이 잘 안 갔다.
그녀가 이곳 세계에 온 직후, 엘프와 마주한 예는 그리 많지 않았고, 마주한 엘프들 대부분은 초원 엘프로 기질들이 어마어마했었던지라… 이야기 속 요정, 아름다운 엘프에 대한 인상은 진작 무너진지 오래.
“에드릭! 들어간다!”
뭔가 재미난 걸 발견했다는 듯 성큼성큼 문을 박차고 들어선 알푸스.
“어?”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 사장실로 들어선 릴리에나는.
“…….”
순간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그러니까…….
“변태?”
“아니아니! 여기엔 불가항력의 사연이…!”
뭔가 기대하고 있던 에드릭과의 첫 만남은.
어이없게도 10대 초반? 중반대인 그가 여자 셋을 깔아뭉갠 모습을 뇌리에 세기는 걸로 개막되었다.
거짓 한 점 없이 깔아뭉갠 상태로 당황한 채 한 손을 휘젓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릴리에나는 손빗으로 귀 아래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뭔 짓을 해야 넘어지면서 여자 셋을 덮치는데?’
…야동, 야애니 주인공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