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29. 경력 넘치는 신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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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에나의 출근길은 에드릭과 같은 마차에 탑승함으로써 막을 열었다.
…알고 봤더니 그 저택이 본사 인물들 공용으로 사용하는 곳이란다.
에드릭의 경우 예전 집이 따로 있었다는데, 현재는 사람들 눈이 있어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단다.
저 유명한 백화점 사장이 정작 사는 곳은 초라하더라?
있는 자가 절제하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게 미덕이 되는 건, 아무래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짝짝꿍하며 포퓰리즘에 입각한 행각을 보일 때 필요한 거지, 공직자도 아닌데 청렴하게 살아가는 건 미덕이 아니라 오히려 추태에 해당했다.
귀족, 부호, 있는 자들을 타겟으로 한 백화점의 사장이 정작 밑바닥 삶을 살아간다면, 그들이 백화점을 뭐라 생각하겠는가?
이렇듯 본인이 원하건 원치 않건 이 부분은 회자 되기 딱 좋은 가십거리였기에, 기사며 잡지 개념이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은 세상이더라도, 귀족이며 부호들은 자기 나름대로 그런 소문과 정보들을 수집해 상대의 가치를 점치고 메기는 게 일반적인 시대다.
결국 이미지 자체가 전부 브랜드 가치로, 돈으로 연결되기에 에드릭은 본의 아니게 잘 사는 척, 돈 많은 척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는 듯 싶었다.
자랑하는 기색 없이 담담하게, 하소연하듯 주절댄 터라 릴리에나는 그 소리를 잘난 척으로 받아 들이진 않았다.
…그래도 부럽다면 부럽고, 불쌍하다면 불쌍한 셈이지만, 아무래도 부럽다는 쪽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본사가 배정한 역할극이라 하더라도, 누리는 건 진짜 아닌가.
비록 역할이나마 공주님, 부호, 고위 귀족이 될 수 있다면야….
출근하기 무섭게 여엘프, 내근 비서 코넬에게 외부 일정에 대한 정보를 전달받았다.
그걸 수첩에 다 받아 적을 때가 되니 곧장 외출해야 한단다.
전용 기사 마냥 마부도 집에서부터 외출하는 내내 따라붙게 됐는데, 그러다 보니 인사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아, 안녕하세요?”
“예, 반갑습니다!”
큼지막한 체구에 선해 보이는 인상의… 늑돌이.
…정확하게 그는 수인(獸人)이었다.
회색 털이 푸짐한 그는 릴리에나가 오기 전까지 외출 한정 호위와 마부 역을 동시에 했었다는데, 릴리에나가 온 뒤론 마부 역할만 하게 돼서 일이 한층 편해졌단다.
“말 타는 건 좋아하거든요.”
푸드럭이라 불리는 사내인데, 실상은 이제 막 성년을 눈앞에 둔 청소년이란다.
…체구가 커서 성인이라 착각했는데, 솔직히 겉만 보면 성인인지 청년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4두 마차는 크기도 상당했는데, 내부에서 누워서 자도 될 정도의 크기였다.
…그렇다고 진짜 그리 누웠다가 마차가 덜컹대서 넘어지면 답도 없어질 테지만.
“글자는 다 숙지하셨죠?”
“예, 공용어 정도는요.”
“익숙해지세요. 아, 제가 말 안 해도 그 점은 잘 알고 계실 테니… 배울 거 있으면 미리 말씀해주세요. 기간이 짧은 만큼 미리 다 배우고 오긴 힘드셨을 테니, 여기서 겸사겸사 배우시면 될 거예요. 처음부터 일 완벽하게 잘 안 하셔도 되니 그 점은 염려 말고요.”
“그 점은 좋네요. 경력 있는 잘난 신입만 찾는, 그러면서 주는 것도 없는 X소기업 마인드만 아니라면 저는 뭐가 됐든 상관없다고 봅니다.”
“그 점은 안심해도 될 거예요.”
“…표면상으론 윗분이신데 저한테 존댓말 하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대할 때는요. 역할에 임할 땐 말 놓을 테니 그 점은 참고해두세요.”
사적으로는 서글서글, 느긋한 느낌을 받았는데 공과 사를 잘 구별하는 듯 느껴졌다. 덕분에 조금 불안했던 마음이 한결 가신 릴리에나.
“좋아요, 그러면 오늘 일정들 일러주시겠어요? 미리 숙지해두게요.”
“전달받은 내용 말씀드리면 되겠습니까?”
“예, 충분해요. 아, 그리고 오늘 복귀하면 최소 일주일 치 일정까진 정리해서 다 달라 하세요. 급해 보여서 아무래도 오늘 일정만 전해줬을 거 같은데….”
릴리에나가 수첩을 펼치다 에드릭을 보며 물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코넬 씨는 시키는 일만큼은 잘하니까요.”
달리 해석하면 능동적으로 알아서 척척, 비서로서 이것저것 챙기고 뭐고 하는 건 미흡하다 이건가?
말로 직접적으로 깎아내리기보다는 역으로 장점을 부각해 단점을 듣는 이가 쉽게 이해하도록 유도해내는 멘트.
…달리 말하면 내가 저 표현을 해석 못 하면, 에드릭은 이후로 표현을 직설적으로 변경할 테지.
즉, 너는 이 정도도 해석 못 하니 그냥 대놓고 말해줄게! 멍청아!
생각이 깊지 못하다는 걸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지적해대는 셈인데, 그 시점엔 이미 그렇게 속으로 까고 돌려대도, 상대는 전혀 짐작조차 못 하겠지.
릴리에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가장했다.
이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람을 이리저리 재고 있을 줄이야.
속으로 혀를 내두른 릴리에나는 급하지 않게, 지나가듯 태연한 어조로 응답했다.
“시키는 일을 잘하는 건 중요한 일이죠. 그걸 보조하고, 또 받쳐줘 그녀가 지금보다 더욱 능숙하게 업무에 종사할 수 있도록 받쳐주는 게, 제 역할 중 일부겠군요.”
나중에 비서실장으로서 코넬의 윗사람이 될 테니, 지금 이상으로 일 잘하게 만들겠습니다.
물론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 걱정은 붙들어 매시기를.
“훌륭하군요.”
그 속뜻을 이해한 건지, 에드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릴리에나는 그의 미소가 이전처럼 순수하게 와닿지 않았다.
실제로 조금 껄끄러워졌다.
단순 역할극의 연기 배우를 떠올렸는데, 이 어린 미소년은 아무렇지 않게 자기 역할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수행해내고 있던 탓이었다.
‘방심 금물.’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1년도 안 돼서 주임 단 인간인데, 그게 어설픈 인간이면 본사는 뭐 흙 퍼서 장사하나?
단순 가게 카운터만 맡기는 식의, 존재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부류의 일이라면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가 맡고 있는 일은 아무리 봐도… 그런 쪽하곤 거리가 있어 보였다.
릴리에나의 그런 의구심은 그가 연달아 귀족 저택에 들러 그쪽 관계자, 가문 유력자, 때때로 가문의 가주들을 만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걸 지켜봄으로써 더욱 굳혀졌다.
듣는 것만으로 머리 아파지는 소리들을 마구 늘어놓는데, 현대인 기준에서 저것들의 허풍, 허세 넘치는 개소리는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더욱이 식사를 같이 하게 됐을 땐, 미리 배운 예법임에도 목에 가시가 낀 듯 불편했기에 그녀는 먹었다는 식으로 대강 때워 에드릭의 뒤에 시립해 있는 걸로 만족했는데… 에드릭은 조용히 식사하면서도 대화를 적당히 유지하면서도 스스로는 입을 적게 열어 상대로 하여금 말을 계속 토해내게끔 유도해 상대로 하여금 정보를 실토하게 이끌었다.
허영심이 강한 그들로서는 이야기할 법한 상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기색을 풍기는 거 자체가 퍽이나 반가울 거고, 에드릭은 그 와중에 질문의 궤도를 비틀어댐으로서 그들도 모르게 몇몇 정보를 흘리게끔 이끌었다.
같이 듣던 릴리에나도 꽤 다양한 정보를 추릴 수 있었는데, 에드릭은 이런 면이 익숙한지 한술 더 떴다.
“음, 어디 보자. 얼마 뒤 귀한 분이 들리시나 보군요. 방금 갔던 가문이 알레드 가문이라 하는데, 바로네 왕국 쪽 귀족이거든요? 오면서 들린 푸톨린 가문의 경우도 바로네 왕국 쪽 귀족인데 둘 모두 좋은 술에 자기들이 취급 안 하는 그럴듯한 옷감, 몇몇 특수한 가죽도 그렇지만 최고급 비단을 구하는 기색을 보인 거 보면 옷을 포함해 그 외에 관련 소지품 등을 전달할 요량인 거 같아요.
둘 모두 가문 대대로 양털, 가죽, 의류, 옷감 등으로 무역 일을 하고 있으니, 귀한 분께 이를 선물 드려 귀한 분이 그곳에 가면 그 자체로 홍보며 마케팅은 끝날 테니… 그러면 여기서 누가 오는가 인데, 둘보다 윗사람이라는 전제로 보면… 푸톨린 가문은 가죽을 통해 무기 수납구를, 검집, 칼집 등을 잘 만드는 편이죠. 반면 알레드 가문은 신발을 잘 만드니 가죽으로 부츠나 이런 걸 잘 만든다 치면… 이게 이제 선물용일지 사치용, 보관용, 직접 써먹을 것들인지를 조금 생각해볼 문제네요.
정보가 한정됐으니 확실시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조금 짚어보죠. 아, 일정은 그대로 진행하되 들리는 곳들을 조금 변경할 테니 동선하고 시간만 조금씩 조절하면 될 거 같아요. 길이야 푸드럭이 다 알고 있으니 위치만 알려주시면 될 거고요.”
듣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 왔다.
가벼운 마음으로 수첩을 작은 걸 구했는데, 아무래도 수첩이 아니라 바인더…는 무리이니 그와 비슷한 규모의 수첩으로 구해야겠다 싶었다.
“펜은 연필이 편할 거예요. 잉크 찍어 쓰는 건 책상 위에서나 하는 거죠. 휴대용 볼펜이나 만년필도 언젠가는 공개하겠지만, 그거 하나만 바뀌어도 필기구 일대에 혁명이니, 지금은 공개된 연필만으로 만족합시다. 사실 이것도 이미 과한 거지만, 업무 효율 때문에 본사가 종이하고 연필은 어쩔 수 없이 조금 빠르게 공개했다나 봐요. 연필 있는 거 아셨어요?”
“아뇨, 지금 처음 듣네요.”
“백화점에 있으니까 몇 개 챙겨두세요. 깎는 건 조금 불편하겠지만, 그건 그러려니 하고요. 조만간 연필 깎기 도구도 발매 예정이기도 하니….”
확실히 달리는 마차에서 잉크 찍어다가 필기하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휴대용 잉크 병에 툭 찍어서 쓰는 것도 익숙해지면 그닥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건 이곳 세계를 누비는 이들 기준이지, 저쪽 세계의 압도적인 편리에 적응된 우리 같은 경우는 이 자체로도 고문 아닌 고문에 가까웠다.
…거기다 마부가 네비게이션도 없이 이 복잡한 환경을 특정 위치만으로 어림짐작으로 도달하는 것도 그렇고. 영국 택시 기사처럼 네비게이션 없이 일일이 다 외워야 하는 전통을 가진 것도 아닐 텐데…는 무슨. 이 시대에 뭔 네비게이션이냐! 아니, 시대 이전에 네비게이션이 존재할 리가 없는 세계잖아!
꽤 오랫동안 이곳에 짱박혀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이런 생활권에 오게 된 건 최근이라 그런지, 모든 것이 생소했다.
그래도 적응은 빨랐기에 일주일 정도 지나니 릴리에나는 졸면서도 할 거 다 하고, 역으로 에드릭에게 때때로 조언 겸 도움말을 줄 정도로 성장했다.
“유능한 분과 함께 해서 제가 얼마나 편할 줄 모릅니다.”
“과찬이십니다.”
의외로 업무 궁합도 잘 맞아 릴리에나는 충실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거기다 그는 생각 이상으로 배려심 깊었고, 솔직히 연기가 아니라면 대단히 이상적인 남성이란 느낌마저 받았다.
그래서였을까.
……여자들이 상상 이상으로 너무 달라붙어 왔다.
무엇보다 데이엔 가문에 발 들였을 때가 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