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29. 경력 넘치는 신입.(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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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은 언제쯤 코넬 경처럼 유능하게 자기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될지 모르겠구나.”
“…저를 왜 저 인간하고 비교하시는지요?”
“어허! 저 인간이라니! 대체 그 근본 없는 말버릇은 누구에게 배운 것이더냐?”
“흡!”
얌전하고 침착하다는 인상이었는데 말이지.
프리지아를 본 릴리에나의 첫 소감은 분명 그러했다.
또래보다 어른스러운 듯한 인상을 받았음에도, 막상 에드릭과 그녀의 어머니라는 젊은 여성이 개입되니 그 이미지는 단박에 깨졌다.
…저번에 사장실에서 봤을 때도 그렇고 묘하게….
“프리지아 영애께선 잘 하실 겁니다. 시간이 더 필요한 일이니 느긋하게 지켜봐 주시는 건 어떨지요?”
“어허! 그런 막연한 칭찬을 좋지 않다네, 코넬 경.”
잠시간 침묵한 에드릭이 짧은 침음성을 냈다.
“…저기, 평소처럼 부르시죠, 테티아나 님?”
테티아나라 불린 데이엔 가의 가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고고하게… 릴리에나 기준으로 태연자약하게 능청을 떨어댔다.
“어허, 무슨 의미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코넬 경? 본인은 전혀,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겠네만?”
“끄응.”
에드릭도 다른 귀족 가문 사람들을 대하는 것보다 훨씬 인간적인 태도로 가문의 가주와 여식을 대하고 있었다.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운 걸 보니 정말 연기가 수위급에 오른 거 같다는 인상을 받은 릴리에나였다.
‘보통이 아니야.’
여태껏 지켜본 바에 따르면 그는 여자들을 아주 잘 구워 삶아대고 있었다.
그게 의도적인 건지, 단순 매력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외모만 보면 여자들이 딸려올 법한 외모긴 하다. 릴리에나 자신도 에드릭이 생판 남이었다면 상당히 좋은 인상을… 아마 그 이상의 뭔가를 꿈꿨을지도 모르겠지만….
‘전부 연기야. 연기라고!’
자신이 그렇듯 그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 그는 연기를 한다기 보단….
‘아니아니, 그건 더 말이 안 되지.’
역할극에 충실하다 못해 거기에 개입돼 몰입하는 거야 이곳 세계에선 일상적인 거니.
그래서 본사 측에서도 너무 몰입하지 않도록 카운슬링을 제공하는 거 아니겠나!
…별소용도 없던 거 같지만.
“그보다 중요한 용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에드릭은 곧장 본론을 물었고.
“내 일전에 경하고 나눈 이야기가 있었지 않나?”
“…이야기야 많이 나눴습죠?”
“이 아이에게 전반적인 것들은 다 맡겨놨네. 중요한 안건이야 겸사겸사 조언을 주면 되는 걸 테고.”
“음? 그 말씀은…?”
“준비가 끝났다 이 말일세.”
“준비라 하심은?”
“눈치채지 못한 척하려는 건가? 이제와서 그러면 내 얼마나 섭섭한지….”
“하하하….”
에드릭은 적당히 웃어넘기려는 듯 보였다.
‘뭐길래?’
릴리에나는 궁금해졌다.
에드릭의 뒤에 시립해 가만히 서 있던 그녀는 뒤이어 튀어나온 이야기에 순간 귀를 의심했다.
“자네 씨를 받겠다고 하지 않았나?”
“아, 예. 기억하고 말고요.”
뭐지? 몰래카메라? 아니, 씨가 그거… 무슨 희귀한 식물의 그거… 그 씨앗을 말하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귀족 가문의 그, 가주되는 분이 자네 씨를 받겠다고 하다니? 그런 쪽으로 의구심을 가지는 건 너무 실례되는 내용이 아닐까, 릴리에나는 순간 진지하게 고심했다.
“날짜는 언제가 좋은가? 시기가 근접해오니 한동안 이곳에 체류해 관계를 맺었으면 하네만.”
“하하하.”
이 새끼야! 바보같이 웃지만 말고 저 여자가 지금 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는지 제대로 설명을 해!
아무리 되짚어봐도 잘못 들은 게 아닌 듯 들려왔다.
아무래도 이거…….
“저야 바라디 마지않은 결과이긴 하니… 문제는 없습니다만, 프리지아 영애는 괜찮으신지요?”
“뭐요? 동생 생기게 되는 거요?”
확정됐다! 착각이 아니었어! 딸아이가 직접 말했다!
세상 말세라더니 대체 이게… 어찌 된 영문이란 말인가!
릴리에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생길리 없는 현기증 증세마저 치밀 정도로.
‘뭐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건데?!’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데이엔 가의 가주님 왈, 나는 준비가 됐으니 어서 네 씨를 주거라! 어떻게? 밤일해서!
데이엔 가의 여식 왈, 동생 생기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게 뭐 어쨌다고요?
“…….”
편두통이 치미는데 기분 탓인가? 분명 여기 판타지 세계 맞지? 내가 뭐… 성인물로 버무려진 이상야릇한 세계로 차원 이동했다던가, 그런 거 아니지?
꿈이였다면 이거 참… 괴상한 걸 하도 많이 접해서 그런 걸지도. 얼마 안 됐지만 휴일 날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쉬어 심신을 재충전하리라고, 릴리에나는 다짐했다.
물론… 이게 꿈일 리는 없었기에 상황은 계속해서 전개됐지만.
“끄응, 조금 더 일찍 말씀해주셨으면….”
“일찍이고 뭐고 이 이야기는 한참 전에 확정된 사항 아니었나? 아님 뭔가? 경이 그때 한 이야기는 단순 겉치레, 듣기 좋은 사탕발림이었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에드릭도 슬쩍 보니 난감함을 애써 억누르는 듯한 기색이었다.
“하여간 신기해. 사내 되는 자들은 어떻게 하더라도 여자들을 눕혀 덮칠 궁리만 일삼는데, 이건 어째 자리를 마련해준다 해도 쉽사리 손을 대려 하질 않으니….”
탄식하는 데이엔 가의 가주님.
이를 지켜보던 프리지아가 탄식인지 한숨인지 모를 반응을 선보인다.
대체….
이 집안은 어찌 굴러가길래 이런 콩가루 같은 사태가….
릴리에나는 데이엔 가 저택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 좀처럼 그 의구심, 의문을 해소할 수가 없었다.
마차에 탑승해 가문을 나선 둘은 한동안 골치가 아픈지 말을 잇지 못 했다.
에드릭은 에드릭대로, 릴리에나는 릴리에나대로.
“대체 뭡니까, 그… 막장 상황은?”
“끙. 예전에 말입니다.”
에드릭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프리지아 영애의 사랑과 자유에 대해.
예컨대 테티아나 가주께서 영애와 관계를 맺어 아이를… 끄응.
거기까지 간 것만으로 릴리에나는 기가 막힌 판인데, 이후 전개는 설상가상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서… 가주님 젊으시니 직접 애 낳으시면 되겠네요? 결론은 그렇게 이야기했고 그걸 설득 시켰다 이겁니까?”
“…어쩌다 보니요.”
“어쩌다 보니는 아닌 거 같은데요? 상식적으로 다 큰 여성이! 그것도 한 가문의 우두머리인 자가 뇌가 없는 것도 아니고! 자존심이 없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런데도 오히려 그런 점을 적극 어필하며 관계를 요구하고 있는 이 상황이 정상으로 보이세요?! 이건 정말! 싸구려 신파극에서도 볼 수 없는…… 하아. 상상을 초월하네요. 대~단하십니다.”
“아니, 이걸 비꼬시는 건가요?”
“비꼬다니요. 너무도 엄청나서 할 말을 잃은 거죠.”
“그래도 그 상황에서 영애에게 가장 득이 되는 방법은 그거밖에 없다고 여겼다고요. 그 이후로도 제가 가주님께 얼마나 많은 사내며 잘난 사람들을 소개해드렸는데요?”
물론 에드릭 입장에서 테티아나와 그렇고 그런 관계랄까. 아무튼 떡을 치는 거엔 관심이 없으래야 없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매력적인 여성이었고, 본인은 나이를 먹었다지만 솔직히… 30대가 꺾이기도 한참 남았는데 무슨 놈의 나이는….
여자는 사랑을 하면 아름다워진다고, 뭔가 삶의 낙이나 의욕을 고취 시켜드리기 위해선 연애를 즐기게 함이 어떨까 싶었는데 이것도 안 되고, 연애가 아니면 아예 애정으로까지 번질 수 있는 관계 알선에도 애를 썼으나 전혀 소용이 없었다.
보통 저런 규모의 부를 지녔다면 사치 향락을 누려도 전혀 하자가 없어야 했는데도 그녀는 뭔가 의욕 같은 게 그다지 안 느껴졌다.
이건 아마도… 그녀가 가문을 물려받게 됨으로써 생겨난 부작용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가 프리지아를 대할 때를 보면 그 흔적들이 어렴풋이 고개를 빼들기에, 관찰력 나름대로 물이 오른 에드릭으로선 겉으론 모르는 채 하고 있지만, 눈치를 못 챌 수가 없는 입장이기도 했다.
“제가 보기엔 말이죠.”
릴리에나가 말했다.
“가주님이 그냥 사장님에게 단순 호감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에 매력을 느낀 게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설마요. 뭐 호감은 인정해도 매력까지야. 아들이 있었다면 저 같은 아들이 있었으면 싶었다, 그 정도면 모를까….”
“여자는 말입니다. 남자의 가능성도 매력의 일부로 여기거든요?”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인데요?”
“남자는 예쁘기만 하면 눈깔 뒤집히잖아요? 우리들도 비슷하긴 하지만… 그걸 포함해서 능력까지 갖췄다 싶은 사내가 있음 호감이 가겠어요, 안 가겠어요?”
“그,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라니까요? 요즘 시대가 어느 때인데….”
“이곳 세계는 중세 시대 흐름이죠? 르네상스로 접어들기엔 아직 제대로 된 과학을 비롯한 학문의 발전, 혁명도! 사상을 대하는 방식도, 그에 걸맞은 종교적 혁명도 안 일어났고요.”
“마, 마법이나 이종족들을 전부 고려하면 이곳 세계가 훨씬….”
“열등하죠! 다양성은 풍부하지만 순수 인간만 있는 건 아니고 피고름 짜내며 서로 치고 박아대지도 않고 있으니까요!”
에드릭이 의뭉스러운 어투로 그녀의 표현을 지적했다.
“…그거 좀 심한 편견 아닙니까?”
“직설적인 겁니다.”
“…….”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에드릭은 침묵으로 응수했다.
아무래도 경호원 겸 비서로 온 이 후배, 성격이 조금…… 끄응!
거기다 발전된 세계에 있다 보니 그곳 특유의 우월 의식도 적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