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취직하니 떡을 침. 이세계에서 (122)화 (122/454)



〈 122화 〉32. 데이엔 가의 그렇고 그런 사정.(3)

“이런 기회가 흔치는 않을 겁니다.”“…그렇겠죠.”



릴리에나는 코웃음을 쳤다.

“결혼도 안 한 새파란 꼬맹이가 임신 출장이라니. 현실이라면 상상조차 안 될 일이죠.”
“…그렇게 이야기하니 뭔가 엄―청 부도덕하게 느껴지는데요?”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맞는 거 아니겠습니까? 양심에 대고 물어보시죠.”
“…끙.”


출장 계획은 세우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휴가 겸 복귀 타이밍을 잡는 게 미뤄졌다는 게 흠이지만.

현실로 돌아가 팀장님도 보고 부모님도 뵙고… 다 좋지만 여기, 이곳 세계에서 살아가는 시간은 매 순간이 충실하기에 말 그대로 질리는 느낌이 들질 않는다. 바쁘고 분주해도 사는 맛이 난달까.


여러 속설들을 살펴보면 유명 기업 회장, 권력자들이 여자놀음 한다며 시간마다 사무실에 젊은 여성이 오고 갔다는 누구 회장 이야기서부터, 야밤에 어쩌구저쩌구 하는 경우를 원한다면 누릴 수 있는 입장이긴 했지만, 내 개인이 그걸 그다지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도 조금은 신기했다.


분명 나 또한 평범한 사내고 그런 것에 로망이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돈이며 능력이 생기면 그런 걸 마음껏 누려대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말이지.

거기다 이곳 세계에선 우리 세계처럼 그런 걸 눈치 보며 할 필요도 없고 말이지.

이곳 아르세이유만 해도, 투표로 뽑힌 이들을 추려보면 인성이며 청렴도보단 걸출한 능력과 리더 십, 또 자기들 말 잘 들어주는 이를 표로 뽑아주고 있으니 말이다.

거기다 각 나라들을 둘러보면, 여전히 왕권이 하늘이 내린 거라는 편견이 팽배한 시기이기도 했다.

백성들도 그리 생각하고, 왕들도 그런 걸 적극 표면에 내세우려 애를 써대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중국식 황권 대의명분 개념인 천명(天命)보단 한없이 낮지만, 차이가 아예 없다 하기도 애매했다.

민주주의의 근본이 시민, 백성, 민중에게 있다 하나, 민주주의는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에 뼈대를 두었기에 자본의 힘에 좌우되며 그렇게 움직이게끔 힘 있는 자들에 의해 변질돼왔다.

그러나 그런  명분으로 삼으면 정당성  대의, 예컨대 대의명분이며 정의가 휘청대기에 민주주의를 표면에 내세운 건데, 덕분에 자본주의 개념에선 이놈의 민주주의 때문에 여간 손해 보는 일이 적지 않아 왔다.

허나 기득권층과 지배계층은 예로부터  본질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연구해온 이들. 당연 거기에 휘둘리기보다는 그걸 이용하고 악용하는데 초점을 잡아가기에 이른다.


…이것도 파고들면 참 재미있는데 말이지.

이 부분도 현재까지도 찬반 중립 논란이 끊이질 않지만, 공산 체계가 무너지며 사실상 현대를 장악한 개념이자 가장 발전한 개념이기에 이걸 부정한다는 건 현대의 모든 근간을 부정하는 것과 매한가지.

그러기에 유럽권은 의외로 이걸 반대하기보다는 적극 수용, 이후 사회주의의 이점까지 추려 민주주의 정책에 입안, 참고, 적용하는 예로 발전하게 된다. 사민주의도 그렇고, 몇몇 정책에 사회주의 정책이며 자본주의 개념에선 학을 뗄 복지 국가 기준 정책을 밀어붙이는 것도 그런 맥락.


어느 게 옳고 그른 것인지를 논하고자 한다면… 시행 뒤 결과를 본 다음, 당대 사람들과 훗날의 역사가 고루 평가해야  터다.

그리고 이곳 세계도 언젠간 그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대혼란이 초래되겠지.



‘내가 죽은 이후에나 그러겠지만.’



어쩌면 이러한 현상, 체계가 유지되도록 본사가 의도적으로 조정할지도.
사실 대가리들만  굴러가면 전제주의는 국가 발전에 유용한 체계인 건 확실했다.


…그러기가 불가능하니 문제지만.


상인을 포함해 자본가는 그런 변화의 흐름에 민감해져야만 했다.
예컨대 변혁엔 항상 갈등, 분쟁, 전쟁이 뒤따랐고, 전쟁은  돈이 된다.
어느 시점에 거대한 전쟁이 발발할 테지만, 내가 죽은 다음에나 일어나줬으면 싶다.



“정말 안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예, 데이엔 가 저택에 머물 예정인데요 뭘.”
“흐음.”



릴리에나는 불안한지 이것저것 물어댔다.
기본 이상 짐을 챙겨 마차에 싣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그녀의 불안감을 해소해주는데 열중했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흠….”
“당분간은 선배 쪽 일을 돕거나… 자유 시간을 가지던가 하세요. 휴식을 취해도 좋고 일을 따로 해도 좋고…  점은 자유롭게.”

그리고 릴리에나는 시키는  없다고 멍 때리거나 울상을 짓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잘 알겠습니다.”

뭔가 물가에 내놓은 애를 보낸다기보다는… 멀리 떠나는 동생 혹은 오빠를 보내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기분 탓이려나?

데이엔 가에 도착하는 모습을 보겠다는 걸 구태여 따르지 말라 명령까지  나는, 곧장 어디 헤매고 할 거 없이 데이엔 가의 저택으로 향했다.


미리 기별을 넣어뒀기에 저택 입구에 도착하기 무섭게 많은 이들이 날 맞아주었다.

“이제야 오는구려. 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노라!”
“…호위 없으니 편하게 이야기하시죠?”
“흐흠! 그럴까?”



테티아나 님은 여전하셨다.



“프리지아 영애께서는?”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운 참이다.”
“많이 바쁜가요?”
“바빠야지. 일머리도 없는 게 안 바쁘면 일을 어떻게 배우겠나?”
“테티아나 님이 도움 주시는데도요?”
“수업료가 필요하니 처음엔 적자를 보더라도 지켜만 봐야겠지.”
“흐음.”

당장 눈앞만 보는 게 아니셨구나.




“연애 사업은 어떠신  같나요?”
“그건 그 아이가 알아서 신경 쓸 문제지, 우리가 신경 써줘야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음… 그건 그렇죠.”
“용족과 그렇고 그런 관계를 맺게 된  나로서도 의외지만… 유감스럽게도 암컷이라 하니.”


용을 암컷이라 대놓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려나.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안으로 들지.”



짐가방은 사용인이 미리 집어 객실로 보낸 터라 몸만 가면 충분.
점심 이후에 왔기에 사실상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앉아서 이후 어떻게 시간을 보내게 될지를 차를 마셔가며 논의하고, 그 외에 자잘한 것들을 이야기해가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저녁 식사를 하게 됐다.

식전 와인, 식중 와인, 그리고 식후에 도수가 살짝 나가는  다른 와인을 음미하니 이게  색달랐다.


“이 녀석은 마시는 게 아니라, 방울을 머금는 듯한 느낌으로.”

식전엔 입가심이라면 식중엔 고기와 같이 그렇게 머금는 느낌이 무척 독특했다. 육즙이 촤악 터질 때쯤 살짝 혀를 축이는 용량을 입안에 넣어 버무리니, 이게 참… 진미였다.




“이런 것도 여유롭게 즐기게 된 걸 보면, 자네도 어엿한 귀족이  됐군.”
“이거야 원활한 거래를 위한 일종에…  그런 거죠. 직위며 신분 같은 건 예나 지금이나 크게 신경 안 쓰렵니다. 편견에 사로잡히면 시야가 좁아지니까요.”
“특히  도시에선 말이지.”




테티아나 님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품위 넘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식후주는 입안에 남은 기름기며 아쉬운 것들을  씻어내는 느낌으로.

애초에 술은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식사 중 따라진 와인 가운데 느낌이 애매하거나 불쾌감을 주는 녀석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말인즉  입맛을 고려해 사전에 와인을 엄선했다는 의미라 보면 되려나?


그런데도 굳이 이런 점을  내지 않는  그녀의 품격이랄까.

적당히 티도 내고, 생색도 내야 사람은 그것의 가치와 귀중함을 이해하곤 하는데, 이미 그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있지? 하고 날 시험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것 또한 굳이 티 내지 않고 적당적당 넘어가 주는 게 이쪽 세계지.

…이걸 모르는 귀족 자제들은 일일이 입으로 떠들어대는데, 그걸 외부인이 보면 뭐랄까… 자기 과시를 못 해 안달이 난 부류로 보일 거다.


우리 세계의  연극들을 보면 이런  대놓고 희극화해서 비꼬는 요소가 곳곳에 박혀 있다.


웃긴 건, 저렇게 행동하는 본인들은 또 그게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눈치채곤 자신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그런 극을 쓰고, 연기를 해대는 것들을 욕해대지. 근데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누워서 침 뱉기 아니려나?


식사를 끝마치고 소화 시킬 겸, 또 걸으며 이야기를 나눌 겸 정원을 산책하는 와중에 프리지아와 루플레시안이 귀가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오셨네요.”

프리지아는 떨떠름한 가운데서도 어머니인 테티아나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예를 보이며 인사를, 루플레시안은 살짝 목례하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어서 오세요. 식사는 하고 오셨나요?”
“…예, 식사 약속이었던 터라.”
“그래, 어떻게 됐느냐?”




나와 이야기할 때하고는 전혀 다른 음색으로 프리지아를 향해 말문을 튼 테티아나.



“다행히 그쪽에서도 저희 예측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프리지아는 차분히 테티아나에게 업무에 대한 내용을 보고했다.



‘흠, 이건 익숙해졌나 보네.’



예전엔 저렇게 조목조목 보고 내용을 읊는 것조차 힘들어했었으니까.
사실 힘들 수밖에 없는 게, 읊는 내용이 오죽 많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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