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32. 데이엔 가의 그렇고 그런 사정.(4)
일이라는 것도 처음 할 때는 뭐가 됐든 전부 힘들게 느껴지지 않나.
하나부터 열까지.
게임도 마찬가지고, 뭔가를 배운다는 건 항상 그런 식이다.
시작부터 경력 넘치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경력 넘치는 신입?
으음… 사회 초년생들처럼 등 처먹기 쉬운 10년 차 된 경력자 모집 같은 개소리하고 자빠진 거지. 확 때려버릴라.
‘생각만 해도 짜증나네.’
경영자, CEO, 사장이라는 사람들은 그래도 저 말에 그럭저럭 공감한다는데, 난 그딴 게 돼본 적이 없어서 아직도 공감을 못 하겠더라.
지금도 마찬가지고.
‘인재를 키우기도 바쁜 판에.’
그런 의미에서 우리 본사는 인턴 시기 내내 돈도 주면서 완전 집중마크 하듯 교육에만 집중하니, 이런 곳이 또 있을까.
“수고했다.”
담담하게 프리지아를 치하한 테티아나.
프리지아는 다시금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수그리곤 루플레시안과 함께 자리를 떴다.
“그래…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우린 마저 산책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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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물 때쯤, 교회 쪽에서 성직자가 찾아왔다.
“오래간만입니다. 테티아나 님.”
“예, 그간 별일 없으셨는지요?”
둘은 단순히 구면인 걸 떠나 상당히 친한 듯 보였다.
의사라는 직업은 치료사라는 개념으로 신성력을 지니지 않은 이들이 약품과 외과적 지식을 함양한 이들을 말하는데, 우리 시대의 의사보다는 훨씬 입지가 약한 편이었다.
그도 그럴게 교회의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전통 및 미신적인 방식으로 치료를 진행하는 예가 적지 않은 터라, 저명한 치료사라 불리는 이들도 손에 꼽을 판에, 신성력을 다루는 공인된 성직자며 사제의 경우, 곧장 기적과도 같은 능력을 발휘하니 치료사의 입장이 고만고만할 수밖에.
심지어 단순히 능력 만능주의가 아니라 외과적 지식까지 함양한 상태였던 지라 사실상 이곳 세계의 의사들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실제 인간 왕실 어의가 저명한 치료사인 동시에 성직자인 것도 그런 맥락.
그러나 개나 소나 성직자의 자비와 도움을 받을 순 없는지라, 수요 자체를 놓고 보면 치료사의 입지가 압도적.
‘필레인’ 이라 자신을 소개한 여성은 검은 사제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시스터 카멜린이 입었던 수녀복, 수도복보다 훨씬 정갈하고 두꺼워 보이는 차림이었다. 말을 들어보니 외출복이 원래 훨씬 두툼하단다.
구도자의 길을 걷는 이가 사사로운 몸짓을 노출하거나, 삿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몸가짐을 바르게 함은 물론, 그럼에도 애써 드러낼 여지 자체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저런 차림을 한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매우 흡족했다.
‘옷은 두툼해야지!’
덕분에 그녀를 보는 내 시선엔 만족스러움이 한가득.
그건 그렇다 치고.
‘건강 검진도 아니고 뭘 이리 복잡하게.’
그나마 피 뽑으랴, MRI 찍는답시고 귀찮을 건 없어서 좋았지만, 테티아나가 이번 일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헤아릴 수 있게 된 터라 마음이 살짝 무거워졌다.
의외로 귀족 가문이 아이를 가지고자 할 땐 따지는 게 상당하단다.
날짜, 시간, 몸 상태, 날씨에 별자리까지 따져대며 기운을 정갈하게 한다는 의미로 술에 취하거나 험하게 몸을 굴린 직후라던가, 스트레스 등으로 심신이 피폐할 땐 절대 합방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데… 조선 시대도 아니고 이게 뭔….
물론 그딴 거 상관없이 술 퍼마시고 떡 쳐서 아이를 가지는 예도, 무심코 성욕에 불끈 휘둘려 떡 치다 생겨나는 경우가 훨씬 많은 편이지만, 그렇게 나온 애가 심성이 어긋나고 재주가 미천하면 역시나 하고 혀를 차며 까댄다고 하니 애는 뭔 죄인지.
“둘 모두 몸에 이상은 없어요. 오히려 워낙 건강하셔서… 좋은 결과가 있을 걸로 생각해봅니다.”
필레인 사제의 따스한 결론에 테티아나는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조금 머쓱해져 허허하고 노인네처럼 웃어버렸다.
“소문이 자자한 분을 그래도 이런 식으로 보게 되어 기쁘네요.”
“자자할 거까지야… 전부 과장된 소문들이죠.”
이후 간단하게 서로 티타임을 가지곤 해가 완전히 저물어 달이 하늘에 자리잡을 때쯤, 그녀는 앞서 방문했을 때처럼 수수한 마차를 타고 저택을 떠났다.
필레인 사제를 배웅한 후, 테티아나의 방으로 돌아온 우리는 마저 앉아 막바지 조율…이랄까. 아무튼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했다.
“준비를 아주 단단히 하셨네요.”
“누구 아이인데. 당연한 소리를.”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론 그 이상으로… 기대감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래서… 마지막으로 묻건대 정말 괜찮은 건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 점에 대해선 어떠한 의혹도, 문제도 없음을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죠. 다만….”
“다만?”
“확실하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흐음, 어떤 이야기를?”
“왜 굳이 저인지, 그게 궁금합니다.”
“그건 전에도 이야기하지 않았나?”
“제대로 듣고 싶습니다.”
“제대로 라. 일전에 이야기한 거 정도로는 기대에 못 미쳤나?”
“충분하죠. 그러나, 이 경우는 제 호기심인 동시에… 제가 어떤 실수를 하게 될까 두려워 그런 점도 있음을 앞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두려움? 실수? 어떤 점을? 내 소문에 대해선 이미 들을 만큼 들었을 터, 무엇이 더 궁금하단 말인가?”
크게 내색은 안 했지만, 그녀가 내뱉은 말 자체가 이미 자조적인 의미를 품고 있던 터라, 나는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미약하게 손사래 치며 마저 말을 이어갔다.
“예,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세부적인 내용까지도요.”
“그래? 어떤 내용들이었지?”
“언니 분이 가주 위를 내려놓은 뒤, 본의 아니게 그 자리에 앉으시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 내가 남자들한테 굴러다녔다는 이야기 말인가? 어머니의 뜻에 따라?”
…너무 노골적으로, 담담하게 이야기한 터라 나는 침착함을 유지하면서도 유심이 그녀의 기색을 살피려 노력했다.
“처음은… 그래. 좋지 않았어. 아주. 아주 좋지 않았지.”
그녀도 딱히 감추려는 기색은 아니었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나’ 였기에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느낌이었달까.
“내가 어머니와 달리 지금 이 시기까지 남자들과 난잡하게 뒹굴지 않는 이유가 거기서 기인했다는 걸 부정하고 싶진 않구나. 그래, 내게 있어 그 행위는… 안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으니까.
추억이라 포장할 수 있는 것조차 그 결과로 내가 데이엔 가의 가주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었으니까… 응당 대가를 치렀다는 개념으로 받아들여 그렇게 넘기고 있는 셈이지.”
“…….”
한창 젊고, 가장 민감하고 날카로운 시기에 말이지.
불쑥, 가슴에 묵직한 돌이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그걸 그대가 그 정도까지 민감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터인데, 다 지나간 일이고, 이는 내가 감당해야 했던, 일종에 시험과도 같은 거였으니까.”
“시험 말이죠.”
귀족 가문 특유의 병폐.
현대인의 상식으론 도저히 납득도, 말도 안 되는 개 헛짓거리가 그들에겐 자부심이요, 전통이자 규율, 법칙이자 섭리로까지 여겨지는 걸 보면… 가정이란 건 역시 자그마한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걸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규모가 커지면 단순 모임의 한계를 넘어 종교, 사이비, 사회 집단이 될 것이고, 그게 현실로 굳혀 세력을 형성해 크게 부풀면 국가와 무엇이 다르겠나.
“그래도 프리지아 영애한테는, 그렇게까지는 안 하셨네요. 이유가 혹시 있으십니까?”
“…….”
거기서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문 채, 허공을 멍하니 올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로선 좀처럼 보이지 않는, 민감한 태도였기에 나는 차분히 그녀가 말을 이을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좋지 못한 일을, 구태여 시켜가면서까지 애를 망가뜨릴 순 없으니까.”
그녀도 자각은 있었는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댔다.
“내 어머니, 전 가주께서는 그것이 여성이 남성을 물어뜯을 독기를 품을 수 있는 비결이라 그러셨지만, 나는… 독기가 생겼다기보다는 울화가 터지더군. 나란 존재가 한없이 초라해지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졌으니까.”
“…….”
“강해지게 된 이유? 어머니의 말씀하고는 달랐지만, 계기가 되긴 했지.”
그녀가 문득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이가 생기니 내가 정신을 놓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내가 여기서 망가지고, 이 아이가 혹여 여아라면… 내 어머니는 그 아이가 제대로 자라기도 전에 필시 내가 겪은 바를 똑같이 강요하고도 남을… 강요가 아니지. 강제했을 텐데… 그걸 생각하니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더구나.”
“그러면…?”
“리지가 생기기 전까진, 나는 그저… 그렇지. 아이를 낳는 단순 도구에 불과했었으니까. 어머니도 순수하게 그걸 즐기지 못한 날 그런 취급했었고.”
천만다행인 점은.
“리지가 빠르게 내 안에 자리 잡았기에, 내가 실성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거지.”
“…….”
새삼 자책하듯, 한편으론 그런 자신의 유약함, 어리석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지금 생각하면 너무 유약했다고 내 스스로도 자책감이 들곤 하지만, 그걸 견디고 넘어섰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걸 테지. 하지만… 누구든 견디지 못하는 구간이 있었고, 당시에 나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을 상태로 강제로 붙들렸던 거니까.”
그녀가 프리지아를 낳은 나이를 짐작해 보면 더욱 그럴 거다.
언니가 가주를 이을 테니 이에 대한 마음에 준비며 대비가 되어 있을 리도 없었을 거고. 만약이란 게 있었겠지만….
“기대에 많이 어긋났다는 걸 제외하면, 나도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했던 거 같기도 해. 그녀 자신은 항상 우리에게 가혹했으니까. 언니에겐 더했지. 우린 항상, 그런 그녀가 만족스러워하며, 자랑스러워 하는… 그런 아이들이 되기 위해 노력했으니까.”
물론.
“그녀가 만족하는 순간은 사내를 밑에 깔아뭉개며 술잔을 기울일 때뿐이었지만.”
“그렇군요.”
“어떤가? 더 궁금한 건 없나?”
“아직 한 가지 의문을 해소 시켜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가? 내 정신 좀 보게. 무엇이지?”
“왜 하필 저였는지.”
“아, 그거. 간단해.”
그녀는 가벼운 어조로, 한편으론 기다란 한숨을 동반해가며 간결하게 응답했다.
“그게 너였으니까.”
“……?”
“정확하게는… 네가 리지를 안지 않겠다고 내 면전에 대고 소신을 밝혔을 때란다.”
그게 아니었다면.
“나는 리지를 안아도 무방할 또 다른 후보를 찾으려 했겠지. 그래, 이런 자리는 더더욱… 있을 수도 없었을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