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35. 신대륙으로 파견된 썰푼다.
“그래서 몸을 순순히 건네줬다 이 말이더냐?”
업무차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내 모습이 썩 미묘했는지 구태여 재확인하는 테티아나 여사님.
“이런 걸 쌓아두면 병 되잖아요. 풀어낼 때 풀어내야죠.”
“흐음!”
못마땅한 건지 잘 풀리고 있는 건지, 테티아나로서는 상당히 헷갈렸던 모양이다.
“여자끼리 사귀는 건 그렇다 치는데, 남자의 몸을 가지고 애인과 관계를 맺는다 라….”
“…….”
결과만 놓고 보면 이거 참 제정신이 아니구나 싶었다.
“그건 그렇고 조만간 이곳을 뜨게 된다는 소문을 접했는데….”
“저도 들은 건 최근입니다. 이곳이 안정화 됐으니 다른 쪽에 가서 영향력을 넓힐 겸, 또 견문을 쌓고… 여러모로 그런 명분으로 어디로 보내려는 거 같더군요.”
“…애써 공들여 탑을 지어놨건만, 그걸 누군가가 염치없게 빼앗으려는 건 아니고?”
“저하고 원수질 게 아니라면 그런 짓은 안 하겠죠.”
본사가 까라면 까야 하니, 그렇게 되도 할 말은 없다만, 여기서부터는 신뢰 문제다.
나하고 교류하며 관계를 다져갔던 이들이 새로이 누군가에게 똑같은 짓을 해야 한다? 그런 피로감과 스트레스를 줬다간, 다른 의미로 공든 탑이 무너질 여지가 있었다.
인수인계도 잘해야 하겠지만, 나중에 돌아온다는 인상을 심어줘야지, 이걸로 땡! 하면… 저들로선 다른 의미로 자기들을 물 먹였다 생각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우리 세계처럼 자기 역할이 운명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태반이니.’
특히 귀족들은 더욱 그런 것에 집착하는 족속들이다.
가문에 태어나 가문의 이름을 안고 죽어가리.
이렇듯 허물없이 가문을 위해 목숨마저 내놓는다.
…정작 그런 상황이 온다면 어떨지 의문이지만, 표면상으론 그렇다는 거다.
그러기에 자신의 자리를 마구 갈아 치우고, 방치하는 이들은 저들 기준으론 혐오의 대상이다.
예컨대 프라이드.
그 다음 책임감.
이 2가지가 공존하는 삶이야말로 그들 기준으로 훌륭한 삶, 준수한 삶이라 이건데.
…우리들 세계도 별반 다를 게 없다지만.
“일자는 정해졌는가?”
“아직요. 그래도 한 달 내로 결정지어질 거 같습니다.”
“그런가.”
척 봐도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지만.
“그래, 무릇 사내란 젊은 적에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껴보는 게 중요하지.”
그녀는 그 또한 타당하다 생각했는지 금세 아쉬운 표정을 갈무리했다.
“하면 그것들 정리하느라 여간 바쁘겠구나.”
“벌써부터 인수인계 작업이 한창이죠.”
의외로… 그 때문에 여유가 심심찮게 나고 있는 건 조금 의외였지만.
그러기에 요즘은 줄기차게 이곳저곳을 오고 가는 일에 한창이었다.
“밀리엄 대공께서 반년 이전엔 방문한다 하셨는데, 정작 방문 목적에 해당하는 자네가 이곳을 떠나서야 원….”
“따님 보러 오시는 거겠죠. 워낙 유능하신 분이시니.”
“멜레니아 아가씨 말인가. 유능은 하지. 겉은 무도회장이나 사교 모임에 적절해 보이나, 성격은 전장이 딱 알맞을 법한 인물이니.”
“…하하하.”
멜레니아 측근들은 업무량이 초월적이라는 걸로 도시 내에선 소문이 자자했다.
버티면 승승장구, 출세가 보장되기에 안간힘들을 쓴다지만, 못 버티고 나가떨어지거나 과로해서 쓰러지고 혼절해 실려 가는 게 일상.
도시민들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명분까지 주어졌음은 물론, 멜레니아 본인이 워낙 일 중독자여서 그런지, 그녀의 뒷조사를 하던 이들조차 그녀의 업무 열정에 질려버렸다는 것도 사뭇 유명한 일화다.
거기다 괴상한 소문이 돌고 있는 점도 그렇고.
‘수면 중 누가 오면 죽여버린다지?’
…이건 뭐 조조도 아니고.
삼국지 조조의 일화 중 암살자가 두려운 나머지 잠결에 사람 죽인다는 소문을 퍼트렸는데, 이걸로는 부족해 잠꼬대로 하인 불러선 그 하인을 참한 뒤 다시 자고는, 깨어난 직후 슬퍼하며 통곡하는 시늉을 함으로써 소문을 사실화했다는 일화인데… 차이점은 멜레니아의 하인들이 암살자들 시체가 여럿이 널린 방에서 태연히 자고 일어났다가 깜짝 놀라는 그녀를 목격하곤, 이런 소문들이 완전히 구체화 돼 퍼져나갔다는 거였다.
사실이든 아니든, 이 일화는 그녀가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로 남자를 낚아챈다는 악의적 소문마저 격파하는 기염을 토하게 만든 바.
덕분에 그녀에게 몰려든 혼인 신청들이 대거 전멸했단 점이 재미있었다.
‘본인은 어떨지 의문이지만.’
몇 차례 만난 그녀는 생각 이상으로 담백했다.
물론 자주 만나기엔 너무 부담이 심한 존재였지만.
하프 엘프지만 인간 쪽 혈통이 더욱 부각 돼서 그런지, 엘프적인 성향보단 인간적 성향이 더욱 두드러졌던 점도 그렇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다시금 예고 없이 몸이 바뀌어 잠깐 당황했지만, 이것도 두 번째로 겪다 보니 그러려니 하게 됐다.
거기다 내가 떠난다니까 이런저런 회포를 풀자니 뭐니 해서 온갖 곳에 불려 다녔는데… 사람 만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저물곤 했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인연을 맺은 그녀들하고 막바지 회포를 풀고자 매일 같이 하반신을 혹사(?) 했지만, 즐거우면 된 거 아닌가?
그렇게 한 주, 두 주가 흐르고.
“이번에 가게 될 곳은 조금 빡셀 거다.”
“어딘데요?”
알푸스 선배가 스마트폰을 통해 공문서를 전송해줬는데, 내용을 짧게 요약하면.
[파라메라 대륙으로 향할 것.
금광을 포함해 몇몇 희귀 자원, 추후 전략 자원으로 쓰이게 될 것들을 사전 확보하기 위한 사전 지반 조사 및 해안측량 목적이 다분.
원정 기간 최소 3~5년.
(사정에 따라 기간은 변경 여지 있음.)
역할은 추후 설립되는 무역 회사 설립의 기틀을 다지기 위함으로 이를 위해 원주민, 토착 종족들 간의 관계 네트워크 형성에 사력을 다할 것.
현장 업무를 보조하고 그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
초기 회사 설립 16인의 임원 중 1인으로서, 맡은 바 역할이 중대하니 업무 진행에 차질이 없도록 분투할 것.]
‘16인의 임원?’
파라메라 대륙.
인간보단 인외 종족들이 더 많다는 그곳이다.
이곳이 알그리타 대륙, 그곳의 맞은편에 놓인 파라메라 대륙은 아직도 미개척지가 90% 이상에 육박하는 지역이었다.
그 외에도 대륙이라 불리는 곳이 2곳이나 더 있는데, 아직 이들 기준으로 대륙보단 세계라는 게 익숙해서 그런지, 알그리타 대륙을 인간계라 부르고 있으며, 이곳 대륙에 가장 많은 종족들과 문명이 밀집해 있다 보니, 이곳이 아무래도 중심이자 본 대륙이라 보는 시각이 부지기수였다.
‘안 그런 이들도 많지만.’
우리 세계 인간들조차 민족을 운운하며 우리가 최고다 뭐다, 선택받았다, 신의 후예다 이러면서 타인종을 멸시하고 차별하는 경우가 널린 걸 보면, 여긴 대놓고 종이 나눠진 상태니 그러기도 훨씬 용이한 건 말할 것도 없고.
거기다 전쟁을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야만 종족들까지 득실대는 걸 보면….
“끄응.”
“왜? 벌써부터 무서워 죽겠냐?”
“여기는 텔레포트… 순간이동 기능이 있으니 우리 쪽의 대항해시대 마냥 배의 점유율, 영향력이 그리 높진 않을 거 같습니다만… 어떤가요?”
“그게 만능이냐? 사람이야 이동시킨다 쳐도 물건은? 거기다 거리가 그 정도로 벌어지면 순간이동도 몇 차례나 걸쳐서 해야 하는데, 어지간한 권력자며 자본가 아니면 엄두도 못 낼 걸?”
“저도 그럼 뱃길 타고 이동하는 겁니까?”
“아니, 배 타고 가면 거기까지 가는데만 반년은 족히 걸릴 걸? 미쳤다고?”
반년….
“시대가 시대다 보니 마법 기술을 적용시키지 않으면 여기 배 타고는 한 세월 걸린다. 그리고 마법 엔진을 적용 시킨 배들은 대체로 군용 전함용이고. 상선으로 그 정도 규모의 배를 운용하는 건 정말 손에 꼽을 걸.”
“당연 본사가 그 손에 꼽히는 곳 중 하나겠네요?”
“하나가 아니라 셋이지만.”
어이쿠 맙소사.
“아마 그곳이 우리 세계의 동인도 무역 회사 급으로 성장할 거란 전망이 있는 곳이니까, 알 잘 박아둬라. 시작은 금광, 이후로 석유며 온갖 희귀 광물들 나는 곳 땅 죄다 선점해서, 나중에 아예 그쪽 대륙 자체를 집어삼킬지도 모르고, 그 영향력으로… 이쪽 알그리타 대륙에 지대한 영향을 줄 정도 규모로 성장하고 나면….”
“…오히려 진짜 같아서 두렵네요.”
“본사의 목적 중 하나는 우리 쪽 출신의 왕국 5개를 대륙당 하나씩 건국하는 거니까.”
“…….”
그런 건 또 어떻게 아셨대.
“그렇다고 이곳 세계를 정복하겠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다만 언제든… 정복할 수 있는 힘을 갖추자는 게 포인트지. 참고로 말이야, 본사가 손대고 있는 세계가 이곳이 끝이 아니야. 다른 세계도 있을 거고… 그렇게 따지면 더더욱 본사의 규모가… 이건 말 안 해도 대강 짐작이 가지?”
“…그래서 저희한테 이런 중책을 맡기는 건가 보군요.”
솔직히 일개 사원… 아니, 주임한테 이런 자리를 맡긴다는 게 말이나 되는지.
“알았으면 잘 하라 이거야. 그래야 직급도 오르고, 연봉도 오를 거 아니냐?”
“보너스도요?”
“물론.”
그나저나.
“그러면 저 혼자인가요, 아니면….”
“그 부분은 본인 요청에 따라, 본래는 여기에 남을 뻔했는데, 후배도 네 옆을 따르게 될 거야.”
“…이쪽에 있는 게 그녀의 장점을 살리기 더 좋을 텐데요?”
남자들 후려가며 정보 빼내고, 그런 식으로 영향력을 살리고 말이지. 본인도 그걸 자원했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어느 쪽이 본인 출세에 이득인지 결정하라 했지. 몸이 조금 편하되 기회가 적은 곳이냐, 몸이 많이 불편하되, 기회가 넘치는 곳이냐.”
“…그렇게 이야기하니 엄청 위험지대로 보내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사람 불안해지게 말이지.
“위험한 곳 맞아.”
“…….”
“거기서 활동하려면, 그래도 믿을만한 이가 옆에 있어 주는 게 낫지 않겠어?”
“흐음….”
“물론 거기서도 네게 붙는 인원들이 생기겠지만, 그걸로 위안을 얻기엔 좀 그렇지?”
“그도 그렇네요.”
“우리 회사가 기 싸움이나 정치질이 그나마 적다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얕보이지 않게 신경 잘 써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 파견… 원정은 선택권이 내게 없었기에 거절은 불가.
말 그대로 본사 쪽에서 지령을 내린 거라, 싫으면 퇴사하던가 하는 외의 선택지밖에 없다고 하는데….
‘어차피 위험해봤자 아바타가 위험한 거지….’
그런 맥락으로 봤을 때, 오히려 이건 신대륙 진출 아닌가? 좋게 보자면 또 신선해서 좋고.
일주일 정도 여유를 두고 신변을 정리하고, 이런저런 준비를 거친 다음… 아무쪼록 이곳 기준으론 신대륙인 파라메라 대륙을 향하기 위한 여정에 올랐다.
여정이라 해봤자 인근 비행선착장에 도달해 비공선을 타고 며칠을 이동한 다음, 인근 마탑에 들려 장거리 순간이동 기능을 무려 4차례나 반복해서야 도달할 수 있었다.
몸에 부담이 가기에 2차례 이동 이후 휴식을 취해줬다.
그리고 다음날 2차례를 이어서 행한 터라, 사실상 일주일도 안 돼서 목적지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처음 도착해서 가장 먼저 느낀 건… 세상이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점이다.
“와, 처참하네.”
“신대륙이란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릴리에나가 무덤덤하게 그리 이야기했지만, 내심 좀이 쑤시는지 이곳저곳을 둘러보느라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여대는 게, 영락없이 먼 곳으로 놀러 온 아이를 보는 듯 했다.
아무튼 첫발을 내딛였으니, 이제부터는… 뭐 열심히 해야지 어쩌겠나.
‘그래도 다 사람 살만한 곳이니까 보냈겠지.’
물론 그렇게 여기기엔 예상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사람이란 건 적응하기 시작하면 뭐가 어쨌든 적응 잘하기 마련.
그렇게 반년.
또 다시 반년.
이곳에 온지 1년하고도 몇 개월이 지나니, 대충 적응이 됐다.
그렇게 또 다시 반년.
총 2년 정도 지나고 나니.
…여기가 제2의 고향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 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