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36. 즐기시게 놔두렴.
복장이 예전과 달라져 잠깐 몰라볼 뻔했다.
이전과 달리 척 봐도 귀하신 분 느낌이 드는 아이보리에 가까운 하얀 사제복을 입고 있는 게… 아무래도 직위가 한 단계…는커녕 최소 두 단계 이상은 오른 게 아닌가, 그리 짐작해본다.
금발에 하늘을 담은 듯한 벽안은, 더욱 풍부하면서도 깊어져… 간단히 표현해 성숙미가 두드러졌다… 랄까. 아무튼 이전엔 밝으면서도 어딘가 어른스러운 면이 돋보였다면, 현재의 그녀는 그윽하면서도 깊어진 것 같은 특유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음, 이전에 수녀였다면 지금은 뭐랄까, 신앙에 몸 받친 사제라는 느낌?
당연 이전도 매력적이었지만…….
“정말 오랜만이네요.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오셔서 더욱 놀랐습니다.”
“자네가 이곳에서 재미 보고 있는 거야말로, 예상하기 힘든 일이었지. 안 그런가?”
밀레니아가 툭 던지는 어조로 쏘아붙이자, 에드릭은 하하 웃으며 태연자약을 가장했다.
음, 대체 무슨 용건들이려나?
애초에 이 조합, 짐작도 안 되는데.
‘반갑기야 반갑다만.’
반가움이 계속 이어질지, 껄끄러움이 추가될지는… 나중에 가면 밝혀진다 치고.
사실 멜레니아만 없었다면 껄끄러울 건더기가 있으려야 있겠냐만.
대충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릴리에나 또한 전부 안면이 있는 이들이다 보니 가벼이 목례로 예를 대신했다.
“관광이지.”
관광?
멜레니아는 그렇다 쳐도.
“…딸려 왔죠. 재수 없게.”
“캬하하하!”
코넬의 푸념에 멜레니아가 파안대소한다.
저기요, 그게 웃을 일입니까?
“저는….”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인 카멜린은.
“순례길에 오른 참입니다.”
“음, 그러니까….”
“종교 특성상 일정 직위에 오르면 외부로 싸돌아다닌다잖아. 안에 파묻혀 있으면 배움이 얕아지고 사람이 좁아진다 하니, 외부로 내보내는 거지. 보고 듣고 배워라. 이런 거?”
멜레니아가 대신 답해줬다.
“그렇다 쳐도 여기까지 오는 건 조금 불편하지 않으셨나요?”
“나야 편하고 자시고 상관없지만, 그녀는 편의를 위해 순례를 하는 건 아닐테만? 오히려 고행을 했으면 해야지. 안 그런가, 시스터?”
우리 세계에서의 카톨릭에선 예로부터 여성이 윗선은커녕 주교며 신부조차 되지 못하는 게 일반적.
그걸 극복한 예가 있긴 하나, 반응은 그리 좋지 못했다.
반면 이곳 세계에선 여성이 교황까진 아니더라도 대주교급의 인물이 된 예는 여럿 되는데, 특히 성녀며 성처녀라 해서 타고난 몇몇 존귀한 이들은 추기경 이상, 교황 아래라는 기묘한 포지션을 차지하곤 한다.
“옷이 바뀌어서 그 이상으로 올라선 줄 알았습니다만….”
“종교계가 편협한 게 어제오늘 일인가? 어차피 권력 놀음하려는 목적 아니라면 직위엔 신경을 꺼야지. 안 그런가?”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카멜린이 담담하게 그리 이야기하자 멜레니아가 짧게 혀를 찬다.
“사람이 너무 좋아도 문제야. 이용당하기만 하고, 보답은 못 받으니 원. 성직자로서 수도자로서 보답을 바라지 말라,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그저 누구누구님 뜻을 충실히 이행하라! 성의, 배려, 사랑! 좋은 말이지! 그걸 윗선이 솔선수범해야 하는데 처 알아먹질 못하고 돼지 새끼처럼 배만 불리고 자빠졌으니… 쯧쯧!”
그 종교계 인사가 코앞에 있습니다만?
악담에도 카멜린은 미소를 지을 뿐, 따로 반론이라던가, 반박 의견을 토로하는 일은 없었다.
수긍해서 그런 건가? 아님 포기한 건가?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
“왔다 갔다 하기엔 여긴 그리 좋은 곳은 아닙니다만….”
“사람 사는 곳인데 못 싸돌아다닐 이유가 있나?”
…아니, 여긴 인간보단 타 종족들이 훨씬 많고, 그 인간이라 분류되는 존재들도 당신들 대륙 기준으론 전부 인외종입니다만?
아마 이쪽 대륙을 살피다 보면 우리와 비슷한 부류의 인간, 인종들이 튀어나올 수도 있겠지.
…과연 그때가 언제고, 그들이 우리에게 호의적일지 의문이지만.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말 거라. 사람 좋다는 게 무엇이더냐?”
캬하하하하! 하고 파안대소하며 옆에 있었음 어깨며 등짝이라도 퍽퍽 때렸을 기세다.
“그건 그렇고….”
그러다 멜레니아 옆에 있던 코넬이 눈살을 와락 찌푸린다.
“무슨 냄새인가요?”
“냄새?”
에드릭은 자신을 빤히 보며 그리 물어오는 코넬에게 살짝 당혹감을 느꼈다.
“엄청난 악취가 나는데….”
“악취?”
멜레니아가 킁킁 하며 의아한 듯 주변을 둘러본다.
“이곳 특유의 냄새 아닌가? 그거 외엔….”
“아뇨. 엄청 더럽고 짜증나고 기분 나쁜! 아무튼 그런 냄새가 진동을 하네요. 사장님, 뭐 이상한 오물에다 몸이라도 담그고 나오셨나요?”
“……?”
정말로 짜증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터라, 의아해지고만 에드릭이었다.
--------
사업장을 둘러보고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기로 한 멜레니아.
카멜린과 코넬도 그런 멜레니아를 따르게 됐는데, 어차피 경로상 에드릭이 머무는 마을에 들려야된다 하기에 나중을 기약하며 우선 자리를 뜬 에드릭과 릴리에나였다.
“늦은 감은 있죠.”
릴리에나가 그리 첫선을 뗐다.
온 김에 식사까지 겸하기로 한 둘은 인적이 드문 식당 겸 선술집에 자리 잡아 상황을 점검했다.
“대륙 내에서 종교로 이리저리 티격태격하는 것보단 이곳 파라메라 대륙으로 와서 자기들 세를 굳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겁니다.”
“…청교도 마냥?”
“종교 숫자도 다양한데 파벌도 여럿으로 갈리고, 복잡하죠. 그러나 이곳은 신성력이란 게 존재하기 때문에 저희 세계보다 훨씬 권력의 기반이 튼튼해요. 어지간히 타락하고 퇴폐적이지 않는 한, 바뀔 일이 없겠죠. 종교 개혁이며 혁명이 뒤처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하긴.”
시대적 흐름만 보면 여긴 아직도 중세.
그나마 상식을 초월하는 능력들을 갖췄으며, 권력의 진입 장벽이 워낙 공고하기에 어지간해선 선을 못 넘는다 뿐인 거지. 종족도 구별돼 있고.
“인구수가 불면 자연스럽게 갈등이 생겨날 테니 이건… 시간에 맡길 문제겠죠. 적당히 베푼다면 오래 흥할 것이고, 돼지처럼 자기들 배를 불리기 바쁘다면, 불만이 터져날 거고요.”
“면죄부는 언제쯤 팔려나.”
“헌금 가지고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그러겠죠. 뭔가 큰 사업하려 한다던가. 이걸 개인이 진행하냐 윗선에서 주도하냐에 따라 파급은 차원이 틀려질 테고요. 또 성직자들 수가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그런 움직임을 보일 겁니다. 원래 영업이나 마케팅이 격화되면 막장이 되는 거니까요. 본사에서 만약 그런 종교 부패, 퇴락을 유도하려 하면… 아마 말도 안 되는 규모의 예술품, 건축물 등을 짓게 유도해서 그런 식으로 자금을 끌어당기는 요소를 귀띔해준다면… 어떨까요.”
“…무서운 소리하지 마라 좀. 거기에 휘말리는 이들은 뭔 죄냐?”
차라리 그쪽 직종, 직군의 수가 포화 급이 돼 혼란이 초래되는 쪽이 귀여우리라.
우리 세계로 치면… 아니, 당장 우리나라만 봐도 매해 의사들의 수가 급증함에 따라 의사들이 직접 영업 뛰고, 변호사들이 법원 일대며 역전에서 명암 돌리고 블로그며 SNS질하면서까지 홍보 마케팅에 전념하는 예처럼 말이다.
분명 나름의 미래를 그리며 거기에 청춘을 갈아 넣은 거기에, 이는 정당히 보상받을 권리가 있을지도.
의사들 대학생 시절 공부량은 상상을 초월하고, 사법고시 보는 이들도 말이 필요 없는데, 그 머리 좋던 이들이 그것만 주구장창 매달려 년 단위로 공부 겸 암기만 하다 보면, 머리가 이상해질 수밖에.
더불어 그렇게 공부했는데 돈이 안 벌려? 인정을 못 받아? 억울해서 삐뚤어지는 게 정상이지. 나여도 그랬을 거다.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그러니 선 넘어도 이해해줘야 한다? 어쩐다? 이건 아니지.
둘러보면 노력하는 이들이 비단 그들뿐이겠나. 다들 열심히 살려고 날뛰는 세상이다. 그거 하나하나를 헤아려야지, 비단 누군가를 특별하게 조명한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형평성, 공평성에 어긋나는 거지.
이해와 공감 및 옹호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보상 심리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거다. 열심히 노력한 만큼 잘 살고 싶다, 돈 잘 벌고, 행복해지고 싶다는 논리는… 어찌 보면 정당한 것처럼 포장돼 있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허나 이걸 부정하면 평등과 질서, 공정과 기회를 강조하는 국가며 사회는 붕괴된다.
그러기에 권력자의 부정부패, 부정 행각에 시민들이 극도로 촉을 곤두세우는 거고, 동시에 위에 있는 자들은 그럼에도 그걸 이용해 돈을 벌려 하기 바쁜 거고.
이것도 보상 심리인 게, 올라가는 동안 들인 비용을 당연 이걸 통해 해소함은 물론, 더 많은 이득을 챙기려는 건데… 이게 과거적 매관매직으로 자리 꿰차서 백성들 뜯어먹던 탐관오리와 뭔 차이가 있느냐 하는 거다.
거기다 혼자 먹으려 하면 탈 나니, 결국 그걸 나누어 피해를 분산함으로써 자신에게 튀는 불똥을 최소화하려는 건데, 이런 구조조차 심지어 비슷하다.
비단 우리나라 말고도 세계 각국을 둘러봐도 이런 경우는 흔한 편인데… 물론 여기엔 윗 대가리들 나름의 고충이 있다지만, 그들이 말하는 고충은 기아와 빈곤에 휘둘리는 백성들 기준으론 배부른 돼지가 주절대는 헛소리, 투정에 지나지 않을 거다.
“멜레니아 아가씨는 솔직히 말해 기반이 튼튼하진 않지요. 때문에 정통성 자체로 보면 밀리고 있잖아요? 능력이 탁월한 거하고 정통성은 별개에요. 유력 가문이라는 건 일종에 종교적 형태와 유사한데, 멜레니아 님은 그 가운데 이단아 포지션이니까요. 불만이 많고 불협화음이 잦다면 그녀에게도 충분히 기회가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승산이 없다면 오히려 빠르게 신대륙에 진출해 기반을 다지자, 라는 계획을 속으로 갖추고 있을지도 모르죠. 오히려 그런 액션을 보여줘 그걸 역으로 무기 삼아 특정 누군가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식으로 떠보고, 나 신대륙 갈 테니 지원 팍팍 내놔! 하는 걸 협박의 재료로 삼아 경쟁자들을 말려 놓은 다음, 기 기회를 틈타 나름의 반전을 노릴 수도 있을 거고요.”
“즉, 입으론 관심 없는 척 그러며 물 먹일 수도 있다 이 말이지? 아니어도 상관없을 테고?”
하기 나름이라는 건가. 이것도 외줄타기 일 텐데.
예컨대 이곳에 온 거 자체가, 멜레니아 라는 존재의 정치적 활동, 행각으로 경쟁자들에게 비칠 여지가 크다는 의미일 거다. 실제로 관광 온 거라 하더라도.
그녀도 당연, 그 정도는 알고서 저러는 걸 테지.
권력자들의 하루는 빠듯하다. 하나하나가 미치는 영향이 평민 백, 천 단위가 백날 쌓아둔 걸 하루 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는 게 권력자의 변덕이니.
그런 존재가 시간을 낭비하려고 굳이 관광? 즐기기 위해?
순수조차 의심하게 되는 게 그들의 사고 방식이다. 본인들의 발자취, 발걸음 하나가 미치는 영향이 오죽 거대해야지.
여기도 멜레니아가 방문해 눈독을 들였다는 이유만으로도, 관심이 쏠리고 투자자들이나 개척자, 모험자들의 수가 불어날지 또 어찌 알리.
그녀가 이를 적극 어필하면 그 가능성은 더욱 확대될 건데, 이건 우리 쪽에서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아니, 억지로라도 부풀린 소문을 흩뿌릴 테지. 멜레니아가 이곳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녀는 얼마 안 가 이곳에 막대한 투자로 확고하게 기반을 다지려 할지 모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너희들도 어서!
…이렇게 보면 완전 물타기 아닌가?
정보의 순환이 특정 층에 한정된 세계인 만큼, 그런 정보 조작에 따른 확인이 어렵기에 이런 식으로 물 먹이는 게 마냥 어렵진 않을 거다.
…반대로 진한 신뢰를 주기도 어려울 테지만.
“상대들이 얕보이거나 방심해서 틈을 보인다면 그러겠죠. 기반이 잘 갖춰진 고향 땅의 지배자가 되느냐, 신대륙의 흔한 유력 개척자가 되느냐, 어느 쪽이 이득일지는 불 보듯 뻔한 일 아닙니까?”
“아이고, 머리 아파.”
그렇게 이야기하는 차에 요리가 나왔다.
통 오리 구이에 작은 새끼 돼지를 소스로 절여 만든 훈제구이까지.
“배 터지겠네.”
“먹을 때 먹어둬야죠.”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식사 때마다 고기를 섭취한다는 개념은 이곳에 발 디딘 이후 사라진 지 오래.
물론 고기를 아예 못 먹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각 잡고 요리해서 먹는 케이스는 흔치 않았다.
‘사냥해서 잡는다 쳐도 말리고 훈제 처리하고….’
이러면 요리해도 그닥이지.
잡아다가 잔치 벌이듯 먹는 게 유일한 낙이지만, 그게 매번 그런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우리는 땅을 개간하고 농업의 토대를 갖추는 작업에 열중하는 터라, 수렵 및 채집을 통한 먹거리 확보는 다른 마을 겸 여타 부족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그렇기에 반대로 한 번씩 식자재, 식료품을 보급할 때가 되면 주기적으로 잔치를 벌이곤 하지만, 현대에서 매일 같이 고기를 섭취하는 식생활에 적응해서 그런지, 아르세이유에서도 당연하게 그런 식생활을 누려왔던 둘에게 그건 상당히 고달픈 문제로 작용했다.
“참 생각할 게 많아서 피곤해.”
“오지에 있다 보니 생각할 필요가 적어서 그런 걸 테죠.”
…아르세이유에 있었을 때만 해도 이런 게 당연했는데, 하도 늘어지다 보니 반쯤 백치가 된 듯한 기분이다.
시간 감각이 이곳은 너무 느리다. 그게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가끔은 이것도 좋긴 한데, 역시 나는 도시 체질인가.”
“걱정 마세요. 여기서 늘어지며 이집 저집 들쑤셔가며 떡 쳐대는 것도 제법 어울리니까요.”
“그걸 당신 입으로 말하면 안 되죠, 릴리에나 씨? 당신이 가장 신바람 난 것처럼 이집 저집에다 대주고 있는 판에….”
“전 싫다는 투정 부린 적 없는데요? 이런 천국이 싫을 리가 없잖아요?”
“……아, 네. 미안합니다.”
한순간에 바보 천지, 눈치 없는 멍텅구리가 된 에드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