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37. 원래 귀한 건 아껴 먹는 법이랍니다.
멜레니아가 한 달 뒤 떠나겠다는 사실을 공표함으로써 에드릭은 더욱 분주해졌다.
“일단 대체 인물로는….”
현지 몇몇 종족들을 대표하는 이를 뽑아 우리에게 보내기로 했는데, 그를 후속 인물로 앉힐 생각이었다.
현지인들은 만족할 만한 인선이지만, 이주민을 포함한 우리 측 사람들로선 불만일 수밖에.
당연 자기들 중 하나가 그 중책을 맡을 거라 김칫국을 마셔댔던 녀석들로선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주도권을 넘겨줄 필요는 없으니.’
절묘하게 줄타기를 한다 쳐도, 결국 이쪽은 이곳 현지에 자리 잡고 있는 이들의 지지를 사야 하는 입장임을 이해했기에, 이런 결단을 내리게 된 거지만, 이것도 쉽게 볼 일이 아니었다.
“선택을 했다면 당연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지.”
“…맞는 말씀입니다.”
멜레니아하고는 임시로나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척’을 하기로 했는데, 그로 인해 요즘은 고의로라도 붙어 다니는 일이 잦은 편.
거기다 이러한 모습을 일부러 내비치고자 이곳저곳을 같이 다니며 적당히 친분 관계를 과시하는 쇼까지 감행하고 있는 실정.
그녀가 문란하고 음탕하다는 소문이 돌지 않도록 여러모로 신경을 쓰고는 있지만, 덕분에 이쪽 이미지만 안 좋아지고 있었다.
“사내는 음탕한 게 미덕이며 자랑거리가 되나, 본인은 그렇지 않으니, 도리가 있을까.”
“…저번엔 그런 거 일절 신경 안 쓰신다고 들었던 거 같습니다만?”
“물론 남녀 관계가 유별나다고, 그 자체는 크게 개의치 않네. 다만 여기에 정치적 색채가 깔리면 이야기가 틀려지지. 자칫 잘못하면 서로가 몸을 판다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 있으니까.”
“…그건 확실히 안 좋죠.”
뒤가 없는 에드릭보단 짊어진 게 많은 멜레니아 쪽이 타격을 확실히 클 수밖에.
“그렇다고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없지만.”
“…확실하게 흔적을, 기정사실을 만들고 가시겠다 이겁니까?”
“그게 그쪽이나 이쪽이다 좋지 않겠나?”
그야 그렇지만….
“왜? 이 몸이 돌아가서 기반도 지지 세력도 갖추지 못한 채 전락할 게 두려운가?”
“아뇨, 멜레니아 님께서 잠깐 자리를 비웠다고 기반이 모조리 무너질 정도로 어설프게 자리를 다져놨을 거라 생각은 안 듭니다만….”
“괜한 걱정거리지. 말 그대로.”
자신감인지 근자감인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정치 세력이랄까. 어쨌든 그런 부류들에게 달라붙을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잘못 했다간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는 수가 있고, 그랬다간 여태 노력했던 기반이 모조리 거덜 나는 수가 있으니.
개미가 제아무리 집 잘 지어봐라. 인간이 지나가다 무심코 걷어차도 거덜 날 판인데, 아예 악의를 가지고 거기에 물이라도 대거 끼얹는 날엔… 재앙도 이런 재앙이 없을 거다.
“그만큼 그대 역할이 중요하다 이 말이지.”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여기서 열심히 일하는 거 정도입니다만?”
“그대가 속한 상회며 뒷배에게 언질 한 번 해달라 하면 되지 않나?”
“하하하… 제가 그 정도로 권한이나, 발언권이….”
“또 그런다. 하여간 겸손이 지나쳐. 무얼 그리 경계하는 게냐?”
“경계까지야….”
아니, 난 진짜 아무것도 없는데 왜 저리 과대평가람….
“그거야 그대가 알아서 할 일이니….”
아무 생각 없이 믿다간 나중에 된통 당하실 텐데요….
‘저것도 나름 자신감인가?’
정말로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안 줬다가는….
“그건 그렇고 코넬하곤 정말 아무런 관계가 아니란 말이지? 의외로군. 자네처럼 아랫다리 방탕하게 놀리는 이가 그 아이를 안 건드릴 거라고는….”
“말씀드렸지만, 전 원치 않는 이하고는 선을 지키는 입장이라니깐요?”
“흐음….”
반복해서 말하기도 이제 지친다.
근데 벌려 놓은 게 워낙 많다 보니 부인하기도 그렇고.
여기 광산 일대에 작은 규모로나마 마을에서 도시급으로 급부상시키는 와중에도, 여러모로 아랫도리를 마구 놀려댔었으니 말이다.
3할이 사심이라면 7할은 일종에 비즈니스 차원이었다.
‘말해도 믿지 않겠지만….’
이곳 도시의 반수는 무려 현지민들이다.
당연 그들 중 일부 깨어난 이들은 외지인들이 지닌 기술과 문화를 배우고자 하여 그들을 이리로 보냈는데, 이건 엄밀히 말하면 날 보고서 믿고 맡긴 거기에, 책임을 안 질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애초에 알그리타 대륙 쪽에서 한몫 노리고 온 이주민들이 대다수였다면, 내가 미쳤다고 현지민, 토착 종족들 간의 관계 개선에 열을 올렸을까.
‘이주민들은 언제든 다른 쪽으로 빠질 수 있어. 그러나 현지인들은 아니지.’
신뢰라는 건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게 아니다.
거기다 하루아침이 아니라 수년이 지나도 결코 넘지 못할 선이란 게 있는 법.
“너무 걱정은 말 거라. 이곳에 온 이들 중 이쪽 입김이 닿아 있는 이들이 여럿 되니.”
그래도 그녀가 물러서며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준다면, 우린 발전에만 신경 써 되도록 빨리 알그리타 대륙으로 금의환양 할 수 있을지도.
‘아님 이곳에서 아예 대놓고 영역을 확대한다던가.’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은 흐름.
거기다 멜레니아가 혹여 문제가 생겼을 시….
‘그녀를 우리 쪽에 끌어당겨… 밀리엄 공국을 집어삼킬 명분 거리를 획득할 수도 있을 거고.’
거기다 이종족이며 엘프 쪽하고 연계가 바짝 닿아 있는 에드릭으로선 나무랄 게 없는 동맹인 건 확실했다.
‘문제는 내가 그런 야욕 자체가 없다는 거지.’
이건 온전히 본사의 의향에 달린 문제다.
“듣고 있느냐?”
“예? 아… 죄송합니다. 잠깐… 생각에 잠긴 나머지….”
“그럴 수도 있지.”
관대하게 넘어가주시는 점에 대해선 감사를….
“그래서 언제쯤이 좋겠나?”
“언제쯤?”
“일정 말이다.”
“어떤 일정 말입니까?”
“첫날밤 말이다.”
“……?”
뭔 이야기를 했길래 이야기가 이쪽으로 향하지?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이런 건 빠르게 처리해두는 게 좋다.”
“…….”
거기다 낭만 없게 처리라니… 너무 공적인 느낌이 듭니다만?
“시간을 낸다 치면 못 낼 건 없지요. 당분간은 계속 이곳만 신경 써야하니까요. 저도… 멜레니아 님이 가실 때쯤 외부로 눈을 돌릴 참이거든요.”
“그건 위험하지 않나?”
“아뇨, 어차피 제가 떠날 거까지 고려한다면, 맡긴 이들 스스로 자기들 권리를 되새길 필요가 있을 테니까요. 매번 저 같은 호의를 보이는 이만 있다 착각해선 곤란하니까요. 침략자며 적대적으로 뜯어 먹으려고 발악하는 하이에나며 승냥이가 있다는 걸 알아야, 제 존재의 가치가 또 상승할 거고요.”
“흐음, 아주 능글맞구나.”
“어차피 알헤디나 님을 보러 가는 거니 명분상으로도 막을 여지도 없죠. 그러니 인수인계 맡긴 친구하고, 릴리에나와 코넬이 잘해줄 거라 기대합니다.”
그 외에도 근래에 릴리에나와 코넬 아래로 배치해둔 인원들이 있는 만큼, 그것들이 잘 해주면 좋으련만.
‘릴리에나한테 사령탑을 맡기다간, 뭔 사태가 발생할지 모르니.’
그건 타고난 독재자다. 소시오패스 기질이 있어서 일의 효율을 중시하고 능률주의 기질이 있기에 장기적으로 사령탑을 맡겼다 사건 한 번 크게 터지면 기반이 모조리 박살 날 수 있으니 말이다.
‘때때로 손해 보더라도, 고개 숙이더라도 타협을 해야할 때가 있는 건데 말이지.’
이 소시오패스들은 그걸 잘 모른단 말이지. 상식이며 이성적으론 그게 맞으니까. 그렇게 하는 게 이치적으로도 맞게 느껴지니까.
그런데.
‘사람 새끼들을 이치로 판단하면 안 되지.’
오히려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어야 인간에게 알맞다.
정치란 게 특히 그렇고.
“흐음, 인재를 키우기 위해 위기에 몰아넣는다, 인가.”
멜레니아는 살짝 감탄한 기색이었다.
“본인도 그럴 목적으로 부하들에게 모든 걸 일임하고 이곳에 오긴 했다만, 그런 면에선 통하는 게 있구나.”
“하하하….”
그저 웃지요.
“그대가 지금처럼 잘 성장한다면… 어쩌면 정말로 혼약을 맺을지도 모르겠구나.”
“어이쿠, 제가 어찌 감히….”
여자로선 어떨지 몰라도, 정치 및 유력자, 권력자인 멜레니아의 옆쪽을 차지하기엔….
‘원한다고 해도 본사가 허락해줄 리도 없고.’
그래서 좋았다.
본사가 하라 해도 좋고, 하지 말라 해도 좋다.
의외로 내 자유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걸 제외한 모든 건 자유로우니.’
욕심만 자제하면, 이곳에서의 생활은 기가 막혔다.
적당한 스릴감과 위기감, 모두에게 인정받고 대우받으며 존경받는다는 실감 또한 남다름은 물론, 그걸로 인한 부가 수익 효과는 덤.
보통 이 정도로 배때기가 쳐 부르면 더한 걸 바라게 되지만….
‘그러다 망가지고 널브러진 놈들이 어디 한 둘이어야지.’
버티기만 해도 성장하고, 버티기만 해도 성공이 보장돼 있다.
그러니 절대, 지나치지 않게, 과유불급….
물론 그 버티는 게 남들 입장에선 곤혹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적성에도 맞고, 아무튼 즐거우면 된 거지.’
마치 RPG게임 마냥 에드릭이란 인물에 몰입돼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하나씩 쌓아가는 듯한 느낌이 좋았다.
그것만으로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재밌는 판에, 수많은 여성들과의 그렇고 그런….
“방탕한 게 흠이지만, 능력과 인품만 확고하다면 그조차도 자랑거리가 될 테니, 부디 퇴락하는 일 없이 스스로를 잃는 일 없도록 하거라.”
“예, 중심을 잃지 않는 게 제 유일한 장점이니, 그 점은 염려 놓으시기를.”
“이런 것엔 또 겸손을 떨지 않는구나.”
“어필할 건 어필해야죠. 계속 고개만 수그리면 바보 취급받기 일쑤니까요. 그래도 되는 곳이라면야 그러겠지만….”
조조 같은 상사 아래에서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차고 넘치는 곳에서라면야, 무조건 고개 꺾으며 나 몰라라, 저는 깃털입니다, 뭐 아는 게 없지만, 열심히 하겠사옵니다! 하는 모습만 비추겠지만….
‘그런 처지도 아니고.’
애초에 당장 놓인 여건 자체가 이쪽이 리더로 군림하는 판에 누구 눈치를 보랴.
눈치를 보는 것조차 전부 외교 및 정치의 일환. 아니, 정치까진 막 나갔고 여기선 처세의 일환이라 보는 게 맞겠지?
“좋다. 아무튼 그러면 자세한 일정은 이쪽이 사전에….”
그렇게 서로 일정 조율을 한 다음, 하룻밤을 지새우는 흐름으로 가기로 했다.
정말로 떡을 칠지, 치는 척을 할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만.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에드릭이었다.
‘당장 못 먹는다고 아쉬울 거 없지.’
원래 고급 명주란, 숙성시킬수록 맛 나는 거니.
…이렇게까지 여유를 지닐 수 있게 된 걸 보면, 그릇이 커진 건 확실한 것도 같고?
물론 준다는 걸 마다할 만큼 멍청하지도, 어리숙하지도 않다.
다만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듯, 잘못 먹다가 탈 나거나 독이 들었나, 안 들었나는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야지.
어차피 그녀 아니어도, 주변만 둘러보면 차고 넘치니.
언제나 화두는 욕심.
중간만 가자.
그러면 인생이 무난하게 풀릴 거다!
…이미 로또 당첨됐다고 생각한 인생인 만큼, 당첨 이후 퇴락하고 무너지는 머저리들의 절차를 밟을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