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37. 원래 귀한 건 아껴 먹는 법이랍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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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마주친 아피젠은 죽을상을 짓고 있었다.
“얼굴이 말이 아니네요?”
“…….”
누구 때문에 이러는 줄 알고!
눈에 원독이 아주 철철 흘러넘치는 게, 산자가 원령이 되면 이러할까 싶을 정도다.
피눈물만 흘리면 아주 완벽하겠습니다?
“내, 내가… 절대로… 그분을… 건드리지….”
“제가 그러겠데요? 터놓고 이야기해서 제가 먼저 들이댄 적 있습니까? 없죠?”
“……크윽!”
양심이 있다면 말 못 하지.
대부분 멜레니아 쪽에서 들이댄 거지, 난 언제나 물러서며 자제하는 입장이었으니까.
아전인수 격으로 몰아붙이지 않는 한, 할 말이 없을 터다.
여기서 나한테 난리 치면 멜레니아를 물 먹이는 거고, 그렇다고 멜레니아를 위한 명목으로 멜레니아를 깐다? 이건 말이 안 되고.
사면초가가 이러할까. 흐흐흐…!
약속 날짜에 이르러, 아무튼 해가 진 직후 멜레니아가 머무는 저택에 당도한 참이다.
“그래, 일과는 무사히 마무리했고?”
“덕분에 잘 끝마치고 왔습니다.”
“덕분은 무슨.”
의례적인 말이 퍽 못마땅했는지, 그럼에도 실소 비스름한 콧방귀로 반가움을 대신한 그녀가 앉으라는 듯 소파 쪽을 가리켰다.
“마음 같아선 연회를 성대하게 치르며 대놓고 둘이서 사라지는 장면을 연출해볼까 싶었지만, 그래선 자네에게 조금 난감한 처지를 안겨줄 수 있어 보이니, 이쯤해서 만족하기로 했다만.”
“저야 물론, 감사함을 넘어 성은이 망극할 따름입죠.”
“성은은 무슨… 그건 무언가? 날 대공으로 치켜 세우고자 하는 일종에 찬사인가? 아부?”
“…하하하.”
그건 너무 막 나갔는뎁쇼?
그래도 애써 부정은 않는다.
여기서 단호박 마냥 부정하면, 그녀의 기분이 다운될 수도 있었기에.
이미 이쪽이 오기 전 한 두 잔 걸쳤는지, 미약하게나마 알콜 향이 그윽하게 주변을 메우고 있던 차였다. 향은 대체로 향긋했는데, 역시 과일주 매니아다운 향이 진동을 해대고 있었다.
나쁘진 않다.
향 자체는.
저것도 이곳 전용 술로 꽤 비싼 녀석인데, 그녀는 이를 물처럼 마시는 걸로도 제법 유명하니. 도수도 낮은 듯하여 방심하고 계속 훌쩍이다간, 금세….
옷은 평상복에서 이곳 스타일에 맞는 천이 얇은 사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옷감 전체가 붉은 빛을 띄고 있어 묘하게… 뭐랄까. 선정적이라고 할까.
하프 엘프라 해도 겉만 보면 이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은 법.
거기다 그녀는 제법 눈매가 날카롭고, 표정이 다부져서 인상이 엄청 강해 보였는데….
…기 쌔 보이는 여성이 나름 취향이기도 한 내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는 매력 포인트.
거기다 몸매도 좋고 외모도 최상급.
좋은 거 먹고 혈통도 좋다 보니 외모가 뒤떨어지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한 걸 테지만.
물론 유전자의 장난질로 간혹 그런 사자와 사자 간에 낳은 자식이 개돼지가 튀어나오는 예도 적지 않지만… 아니, 오히려 많은 편이지만… 그녀는 그런 맥락에서 봤을 땐 모든 우량한 것들을 모조리 독식한 것 같은 면이 두드러졌다.
외모, 성품, 재주, 재능, 능력까지.
그녀와 같은 피를 나눈 형제자매들 가운데서도 유독 돋보이는 면이 있었으니 말이다.
문제가 있다면, 겉을 아무리 좋게 봐줘도 엘프라는 게 가장 큰 하자로… 꼽히는 게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지만.
“뭘 그리 구경하나? 좋은 구경거리라도 났는가?”
“기왕 보는 거 제대로 보고자 해서요. 아무래도 위치가 위치다 보니 제가 감히 멜레니아 님의 얼굴이며 몸을 불경스럽게 눈에 막 담을… 그런 급의 인간은 아니잖습니까?”
“겸손도 지나치면 해가 된다 그리 일렀지 않느냐?”
“해가 되도 악 영향을 끼치진 않으니까요. 바보 취급당하고 유약해 보이는 쪽이 얕보이니 경계를 안 사기도 좋고, 자기 자존심만 잘 눌러둘 수 있다면 이보다 편한 게 또 없잖습니까?”
물론 눈앞의 멜레니아는 항상 정면 돌파를 추구하는 입장이라, 이런 처세에 대해 소인배의 술책이라 비난을 가할 여지가 있긴 했지만, 그럼 또 어떠하리.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내가 담력을 갖춰야지.”
“전쟁터에서 앞장설 때 빼곤 전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남들 앞에 잘난 척해봤자 시기만 사고, 질투만 살 테니까요. 적당히 멍청해야 사람이 인간미도 느껴지도, 좋잖습니까?”
“그대는 나보다 더하군. 더해. 지나칠 정도로… 하지만 그게 지금과 같은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기반이 됐을 수 있을 테니… 내 쪽에서 무작정 무어라 지적하기도 그렇구나.”
음, 의외로 이야기가 통하잖아? 못마땅한 척이라도 해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
“그렇다 치고… 식사는 하고 왔는가?”
“가볍게 배만 채웠지요.”
“그러면 술을 나누다 시간이 지나면 임하는 걸로 하지.”
“술을 건너뛰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내 말에 멜레니아가 콧소리를 내며 의구심을 표했다.
“묘하군. 술하면 좋구나 하고 뛰어들어야 정상 아닌가?”
“나쁘진 않지만, 술보다 향기롭고 오묘한 이를 눈앞에 두고 한눈을 팔순 없잖습니까?”
“무어라? 하하하! 이제 보니 이거이거! 자네는 품에 안기로 한 여성을 대할 땐 그런 식으로 변하는군?”
“변하는 게 아니라… 방식을 달리하는 거죠. 예를 갖춰야 할 때와, 다른 의미로 분위기를 돋울 때. 적재적소라 하던가요? 모든 일에도 순서가 있고, 방식의 차이가 있는 거니까요. 물은 아래로 떨어지면 퍼지지만, 금화며 은화는 아래로 떨어져도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습니까?”
“비유하고는….”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는지 호쾌하게 웃음소리를 낸 그녀는.
“그래, 그 또한 나쁘지 않지. 그러면 그 전에….”
그녀가 자신의 어깨와 쇄골 부근을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이쪽은 처리하고 시작하지.”
이쪽?
그래서 결론은?
제법 넓은 욕실, 거기에 뜨거운 물을 한가득 담아 같이 몸을 담근 상태로 과일주를 입에 담기 시작한 우리.
알몸 교제는 아니고 수건을 한 겹 감싼 상태인데, 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터라 사실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느껴졌다.
벽은 쳐져 있지만 천장만큼은 뻥 뚫렸기에 나름 운치가 있었다.
참고로 이 목욕탕 비슷한 시설도 내 쪽이 아이디어를 건네 설치한 건데, 썩 마음에 들었나 보다.
“매일밤 이 낙에 살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그런가요?”
목욕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나로선 가끔 이러는 건 좋다고 느껴도 매일 이러는 건 영….
여기에 몸 담그고 멍 때리는 것도 전부 시간인데 오죽할까.
이 시간을 필수로 이어가야 한다는… 릴리에나며 코넬의 반응도 좀처럼 이해가 안 가는 입장이었다.
뭐 가끔은 좋지. 가끔은.
더군다나 지금처럼 누군가와 이야기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차원에서는… 더할 나위 없고.
“그대는 언제쯤 아르세이유… 혹은 알그리타 대륙으로 복귀할 참인가?”
“그건 제가 정하는 게 아니지요.”
“상회에서? 그도 아니면….”
“여기 일이 정리가 된 다음에야 생각해볼 문제니까요. 제대로 정리도 안 하고 불쑥 맡기고 가면, 공들여 세운 건물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 시작부터 끝까지. 건물을 세움에 있어 땅을 다지고, 기둥을 세워 근본적인 기반을 다지는 거 이상으로, 지붕을 얹는 작업, 그리고 완성된 뒤에도 그곳에 발 딛게 될 안주인의 존재까지. 모두가 다 중요하긴 하지.”
공든 탑이 무너진다는 표현하고도 먹히는 부분은 있기에 따로 정정하진 않았다.
어쨌든, 공 들여 탑을 쌓았으니 그게 무너지지 않도록 확실하게 관리하고 가겠다는 이야길 하고 싶었던 거니까.
“이곳을 기반으로 삼아 아예 정착하는 건 어떠한가?”
“물론 그 또한 매력적이긴 합니다만….”
“나 또한 이곳에 정착해서… 그래, 나라를 하나 건국한다 치면?”
“하하하….”
꿈도 야무지시네.
진심도 아니면서 이렇게 또 떠보려 하시네.
“자꾸 그러지 마세요. 저는 높이 올라가려는 취미 없습니다.”
“취미가 꿈이며 목적이 될 수도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게 영… 불편해서 말이죠. 그러지 않고서도 충분히 규모는 늘리고, 넓히고, 아무튼 크게 놀 수 있는데, 굳이 높이 올라가려 아등바등 할 필요가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그 말은?”
“높이 올라가는 걸 목표로 한다기보다는… 앞뒤 좌우… 다시 말해 넓어지도록 노력하자는 거죠. 정복왕의 꿈이 하늘을 오르는 건 아니잖습니까? 지도상으로 영토가 넓어지길 원하는 거죠. 검, 마법, 병력 등을 통한 무력으로 그러느냐, 학문과 문학을 위시한 문명의 격으로 이를 이루느냐, 돈으로 그러느냐, 아님 또 다른 무언가로 이를 이루느냐는 다들 각자의 문제 아닐까요?”
묘한 타이밍에 고상한 이야기가 내 입을 통해 튀어 나와서 그런 걸까.
잠시 생각에 잠기듯 골몰하는 멜레니아.
과일주를 입에 기울이며 한동안 침묵하며 목욕의 한때를 즐기던 그녀는.
“하면 그대는 돈으로 이를 이루시겠다?”
하고 장고 끝에 그런 의구심을 입 밖에 내놓지만….
“아뇨, 전혀요.”
“그러면?”
“사람이죠.”
“사람?”
“땅 위를 점거해 농성하고, 지배하든 누리든 눌러앉든, 결국 사람이 문제죠? 그렇다면 사람을 쟁취하면, 결국 세상을 지배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그게 국가를 설립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돌아오면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지만.
“국가적 개념이 아니라, 다른 개념으로서 서로의 권리를 수호하는 입장을 굳히는 게 좋다고 봐서요. 힘이 강성해지면 누군가는 욕심을 부릴 거고, 역사에 족적 거하게 남기겠다고 마치 게임 하듯 전쟁이며 전투를 벌이려는 개떡 같은 놈들이 횡포 못 부리게, 확실하게 짓누르려면… 힘은 당연한 거고요.
전사는 쉬지 않고 싸워야 하니 결국 전장으로, 상인은 장사로 먹고사니 결국 장사를 할 수밖에. 예술가는 예술에 몸을 불사르기에 죽는 그 순간까지 거기에 신명을 다하겠죠. 어느 쪽이 옳다 나쁘다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각자 쓸모가 다르고, 쓰임새가 다르며, 바라보는 세상이 다른 만큼… 저는 그들이 그들의 자리에서 온전히 존중받고 대우받는 환경을 구성해볼까 하는 겁니다.”
멜레니아는 짧게 침음했다.
“…너무 막연하군. 국가 혹은 그보다 규모가 낮은… 작은 소국을 형성하는 것과 그런 자네가 말한 국가관? 통치관이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
“정말 별거 아니거든요? 이걸 어렵게 생각하니 복잡해지는 거지, 예컨대 제가 그들을 대우하고 존중해줄 능력이 되어 그들을 보호해줄 수 있다면 된다 이겁니다.”
“…그들 모두를 그렇게 대우해주고자 한다?”
“아뇨, 일부만요. 손에 닿는 만큼. 저는 제가 누군가를 위해준다거나, 도와준다거나 할 생각은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돕고, 도울 수 없는 이는 기여를 하여 자기 가치를 입증하고… 딱 그 정도. 거렁뱅이, 무지렁이에게 무조건적으로 기부하며 동정을 베풀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습니다.”
“이야기가 살짝 어긋났지만… 대강은 알겠다.”
그녀 나름대로 결론을 낸 걸까.
“자네는 그냥, 남들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해지고 싶다는 거군. 그러나 경계를 살 생각은 없고, 누군가의 적이 될 여지를 두지 않겠다. 그러니 영토며 땅에는 집착 않고, 실리만 챙기겠다, 그러면서 자신의 우군은 확실히 지키며 그로 인한 혜택은 온전히 누리겠다? 이런 건가?”
“음… 말만 들어보면 엄청 터무니없는 소리 같군요.”
“방금 그대가 한 말들이 그거잖은가? 권리를 누리되 의무며 책임에 대해선 어느 정도 선을 그어둔다.”
“어, 그렇게까지 단정 지은 적은 없습니다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내 권리를 논하려면 결국,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흐름을 구성해야지. 그러기에 국가는 중요한 거다. 크게 보면 국가지만, 결국 국가란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다. 가족이라 봐도 무방하겠지. 크게 보면은.”
“…그 말대로면 참 좋겠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