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39. 나날이 바쁜 건 아니다?(4)
그렇게 서로의 위치에서 할 일 잘 하면서도 잘 놀고 있는 둘.
이 와중에도 마을은 더할 나위 없이 잘 굴러가고 있었다.
광산 채굴 현황도 그렇고, 이주민의 합류 속도도 그러하며, 정착 및 교류, 분쟁으로 인한 갈등도 묘할 정도로 잠잠했으니.
그만큼 에드릭이 발에 땀 나도록 뛰어다닌 게 좋은 결실을 맞이한 거였지만, 에드릭의 마을과 달리 다른 곳들 가운데 심한 곳은 여전히 전쟁을 방불케 하는 갈등과 분쟁에 휩싸여 개발 진척도가 저질인 곳들이 허다했던 바.
결과적으로 유지만 해도 압도적인 성과가 창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에, 릴리에나는 거기에 치중하는 쪽으로 포인트를 잡았다.
‘공을 세운답시고 무리했다 깨지면 감당도 못 하겠고.’
마이너스보단 플러스를!
오히려 현상 유지, 점진적인 진척이 훨씬 경영적 측면에서 보너스 점수가 높다는 걸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즐기자!
일하는 순간조차 휴일처럼, 휴양 온 것처럼 누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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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이죠?”
그리고 파라메라 대륙으로 복귀한 에드릭은, 마차 지붕에 눌러앉은 하피 족 소녀, 부에루에게 쉬엄쉬엄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던 참이었다.
“잘하고 있나 보네요.”
고개를 주억거리는 에드릭을 보며, 그의 옆에 있던 늑대의 형상을 한 수인족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그걸로 끝인가요?”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죠.”
믿을만하니까 맡긴다.
믿는다고 말만 하고 불안해하며 개입하고 어쩌고 하면, 결과적으로 맡길 수 있는 이가 어디 하나라도 있겠나.
그걸로 인해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다. 일일이 그런 거에 불안을 느끼면, 대체 누구에게 무언가를 일임하고, 맡기고 그럴 수 있겠나.
“과연.”
특히 인간보다 사회성이며 부족에 대한 연대가 짙은 수인족 사내, 그라엘은 에드릭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들이 비교적 타인을 믿지 못하는 것과 달리, 그대는 그런 면에선 확고하군.”
“인간이 오래 살아봤자 한순간이죠. 혼자서 걸어가면 빨리는 나아가도, 결국 공허하고 허전할 수밖에. 오래도록, 길길이 긴 여정을 나아가고자 하면, 다 함께 어깨를 맞대고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크흥! 그걸 아는 인간들이 많다면 좋으련만.”
“모두가 생각하는 바가 다르니까요. 원하는 거, 추구하는 것들, 목적이 다르니… 싸우고 다투는 걸 필연이라 봅니다. 먹이를 가지고 눈치를 보며 경쟁하는 자연의 이치와도 마찬가지라 보고요.”
“…분쟁은 필연이다, 이 말인가?”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요.”
평화로운 세계에서도 분쟁은 잇따른다.
전쟁이 없다 뿐 스포츠며 게임이며 돈놀이를 포함해 온갖 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다툼과 분쟁, 경쟁과 전쟁이 빗발친다.
룰을 정하고, 룰을 어기고, 빼앗고 강탈하고….
그럼에도 배려를, 자비를, 동정을 아끼지 않고자 함은, 그래야만 세상이 지옥이 아니라 자부할 수 있기에 그런 것은 아닐는지.
“솔직히 전사들에게 평화는 무덤과도 같지 않습니다. 전투가 없는 곳에서 병사며 전사는 짐 덩어리 취급을 받으며, 먹이가 풍족한 곳에서 사냥꾼은… 괄시받고 무시 받기 마련이죠. 그들이 언제 필요하며, 언제 우대받을지, 그걸 신경 쓰기도 그렇고요.”
“과연.”
수인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 모든 갈등을 씻어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과업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불가능에 가깝지만, 조금이라도 깨우치고자 하면 첫째로는 먹고 살 길을 열어주는 거죠.”
“그 다음은?”
“둘째로는 해야 할 일을 제공해주는 거고요. 여기엔 직업이 있을 거며, 취미 및 여가 생활도 포함되어야 할 겁니다.”
“흐음… 거기까지만 해도 꿈만 같은 이야기로군.”
하루하루 먹는 걸 신경 써가는 그들로서는 사뭇 멀고 먼 이야기처럼 들리고야 만다.
척박한 대지 위에서의 삶은 치열할 수밖에.
아이를 여럿 낳아도 그중 반수는 살아남지 못해 대지의 품으로 돌아간다.
“셋째는, 그들이 궁극적으로 해야 할 과업, 즉 운명을 일깨워주는 거죠.”
“그 말은…?”
“…저도 그걸 몰라서 헤매는 중입니다.”
인간은 먹고 살 만해지면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개중에는 놀고 먹고, 즐기는데 바쁘나 결국 나이 먹으면 자신이 뭘 했는지 종종 후회하는 모습을 내비치곤 한다.
때때로 젊은이들 가운데서도, 그걸 빠르게 깨우치는 이가 있어 여러 가지 방안을 찾아다니나, 결국 답이 없기에 사회며 현실로 복귀하고 회귀하곤 하는데….
“진정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찾아 그걸 이루는 게, 인간뿐 아니라 모두의 공통 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렵군. 어려워.”
총기와 현기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마치 노년에 이른 부족의 현자들이 할 법한, 그럼에도 내용은 참 간단명료해서… 의외로 와닿는 바가 컸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기까지가 너무도….”
“어렵죠. 어렵고 말고요.”
에드릭도 그 점에 대해선 할 말이 없긴 했다.
이런 게 사탄의 농간이 아니고 뭐겠는가.
달리 말하면 마라?
그런데 그런 걸 신경 쓰면 어차피 답도 없다.
그러니 매 순간 열심히 살아갈 수밖에.
다그닥 다그닥!
그때, 멀리서 말굽 소리가 힘차게 울리며 점차 가까워져 갔다.
광활한 황무지 사이로 박력 넘치는 굽을 박차며 얕은 모래 구름마저 흩뿌리며 이쪽으로 접근해 오는 인영이 있었으니.
위에만 보면 인간 여성과 마찬가지였지만, 시선을 아래로만 두면 육중하리만치 큼지막한 위용을 자랑하는 하반신이, 마치 말의 그것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가 접근한 시점에, 앉아 있던 에드릭 내외는 자연스레 고개를 위로 치켜세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인근에 오아시스가 있어 물을 떠오는데 지장은 없었습니다.”
“인근에 있던 야생 짐승들이나… 다른 이들 방해는 따로 없었는지요?”
에드릭이 묻자.
“운이 좋게도 말이죠.”
그녀가 윙크하며 싱긋, 유쾌한 미소를 선보였다.
산발한 갈색 머리를 말총머리처럼 묶어 내린 여성.
의외로 볼륨 넘치는 상반신 위를 대충 걸치다시피 하여 자리한 가죽 천.
짙은 갈색을 띄는 가죽 천으로 이뤄진 상의.
하반신의 반을 가린 천으로 된 로브 비슷한 회색 걸침막은, 거의 그녀 전용의 치마 느낌으로 하반신의 반을 가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굳건히 드러난 네발조차, 그녀가 다리를 접어 몸을 바닥 위로 안착하자, 고스란히 모습을 감추기에 이른다.
전체적인 피부색은 밝은 황갈색이었는데, 덕분에 굉장히 야생적인 느낌이 부각 되는 듯 느껴졌다.
하반신도 위의 피부색과 엇비슷한 황갈색. 천에 감춰져 안 보이나 막상 보면 갈기며 털이 윤기가 흘러넘쳐 훌륭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앉은 상태로도 그녀의 육중한 꼬리가 펄럭여댔는데, 말 그대로 포니테일이란 표현의 원조 그 자체의 위용을 힘껏 과시해주는 모습에 에드릭은 조금 감동하고야 말았다.
‘매번 느끼지만, 볼 때마다… 뭐랄까.’
생동감이 넘친다? 귀엽다? 멋지다?
아주 오만가지 감상이 속내를 가득 메우는데, 야생마 그 자체인 그녀와 이런 식으로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도 사실 최근이었다.
“고생하셨어요, 무리엘 님.”
“별말씀을!”
그녀가 떠온 양동이, 마법으로 거칠게 휘둘러도 입구가 뚫릴 리 없는, 사실상 규모가 큰 보온병 느낌의 양동이를 열어 목을 축인 일행은, 이어 간단한 식사 준비에 돌입했다.
미리 비축해온 말린 고기와 스프, 그 외에 여물로 치기엔 식용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고급스러운 풀들까지.
아무래도 종족이 다른 만큼 초식과 육식, 잡식이 나눠지다 보니 식사 준비 때도 이런 디테일함이 요구됐다.
물론 이 경우 에드릭은 손수 요리 솜씨를 내기 바빴는데….
“맛있어요?”
“움! 음! 이 드레싱! 마음에 들어요!”
친환경적, 야채와 과일과 향신료를 적당히 배합해 만든 드레싱을 여러 개 준비해 상하지 않도록 보존 마법까지 걸어 틈틈이 품질 좋은 야채며 풀들과 배합해 가져다주니 아주 좋아한다.
“고기들 간도 적절하군! 불에 구어 향신료를 뿌리니 아주 일품이야! 비린내도 안 느껴지고!”
“꺄오꺄오! 맛있음!”
하피 소녀도 먹는데 치중한 나머지 되는대로 연신 감탄을 해댄다.
팔이 날개라서 어찌 먹느냐? 이건 하피에 대한 편견인게 이들도 팔다리가 있다. 날개도 있고 말이다.
뭐 아예 팔과 날개가 합쳐져 손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하피들도 있다는데, 이들은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알그리타 대륙의 하피들하곤 차별점이 있네.’
거기다 이쪽은 속칭 새대가리, 지능이 빈약하다 못해 저질일 때, 멸시며 무시 차원에서 쓰는 용어와는 부합되지 않을 정도로 지혜로운 구석이 있었다.
‘세상은 넓다.’
의외로 이곳 세상의 인간이며 여타 종족들은 다양한 종족 군상이 존재함을, 그걸 당연시 여기는데, 본사 쪽에서 이쪽 세계로 파견된, 우리 세계 사람들이라 짐작되는 이들은 매번 놀라고 또 놀라는 모습들을 내비치고 있었다.
더욱이 편견도 심하고, 인종이며 종족 차별도 의외로 뼈에 사무칠 정도로 깊은 게….
‘인간만 있다는 게 그렇게 좋은 게 아니었구나 싶기도 하고.’
오히려 이곳 세계처럼 다양한 이들이 실재하고 있단 것에 환호하며 즐기는 이들도 있었는데, 에드릭도 바로 이쪽에 속했다.
얼마나 좋은가. 온갖 다양한 이들을 만나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고 삶을 교류하는 이런 게… 꿈만 같다고 할까, 소설 속에서도 겪어본 적 없는 그런 걸 현실로 시시각각 겪는 이런 상황, 더할 나위 없는 여락이 아니겠나.
‘돈 줘도 못 얻는 경험이지.’
우주로 나갔다가 지구 한 바퀴 돌고 다시 지구로 착지하는 게 몇 억 드는 관광 상품이라 치더라도, 이쪽 세계에서 이렇듯 수인족 사내며 하피에 켄타우로스 족 여성과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황무지를 여행하는 경험은, 대체 얼마를 줘야 할 수 있을지 짐작조차 안 간다.
…뭐, 돈 줘도 무리겠지만.
알헤디나의 가호를 받고 있는 에드릭은 현재, 막바지 시련을 수행하고 있는 참이었는데, 사실 별 거 없다. 뭐 거창하게 이야기 속이나 서사 마냥 어떤 과업을 이루라는 게 아니라, 각 유력 부족이며 종족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라는 건데, 그 증거로 각 종족이며 부족의 대표 비슷한 이들이 결과적으로 에드릭의 유랑길을 따라 막바지에 알헤디나가 머무는 그곳으로 향해 이를 지켜보는 것이 이들의 역할이라나?
이곳 대륙까지 와서 순례길에 올라, 의외로 자주 보기 어려운 시스터 카멜린을 떠올리면, 오히려 지금 이 유랑길, 여행길은 힐링을 빙자한 관광 느낌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거다.
미국에서 캠핑카 끌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인터넷 상으로 본 적이 있는데, 이건 솔직히 그보다 더 낭만적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저, 에드릭? 오늘도… 그거… 해도 되는데?”
…켄타우로스 족 여성이 그런 걸 적극 권해 오는 이 상황도, 퍽 웃겼고.
“에이. 푹 쉬셔야 내일도 일찍 움직이죠.”
“나, 나는 그대로 충분히 잘 달리는데?”
아닌 게 아니라 마차를 끄는 건 현재 그녀, 무리엘의 몫이었다.
여성체이긴 해도 힘은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고 어지간한 짐말보다 막강한 편.
들어보니 평범한 켄타우로스가 아니라, 부족 내에서도 발군의 다리를 지녀 바람처럼 빠르다는 이명까지 지녔단다.
덕분에….
‘어지간해선 만족도 잘 못하고!’
거기다 말의 거시기가 워낙 길고 거대해야지.
그나마 에드릭의 물건이 흉악(?)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저런 호의를 내비치지도 않았을 거다.
솔직히 한두 차례 하기 전까지만 해도 태도가 대단히 까칠했었는데… 겉만 보곤 약해 빠진 꼬맹이라며 코웃음을 친 게 오죽 많았어야지.
‘오히려 인종, 종족 차별은 저들이 더 심하긴 했지.’
편견은 사실, 우리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런 걸 전부 헤아리며 조율하고, 관계를 개선해 나가는 건 영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만큼 이뤄냈을 때 나름의 성취감도 있고 하니….
그리고 마치 게임 속 퀘스트, 보답처럼 미녀가 주어지는 건 덤이고.
물론 이것도 필연적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요행이며 운이 따라준 셈이지만….
“그렇게 됐으니 오늘은 푹 쉽시다.”
“…어제도 쉬어놓고.”
삐진 척 흥! 하고 고개를 휙 돌리지만, 그조차도 귀여울 수밖에.
“인기가 좋구먼!”
늑대 수인 사내는 그런 의미에서 배포가 꽤 큰 편이다.
거기다… 이종간 교미랄까, 교배에 대해 새삼 꺼림칙…까지는 아니더라도, 취향이 독특하구나 하는 시선을 내비치긴 했지만.
뭐, 그것도 고작 하루 지나니 별일 아니구나 하는 식으로 넘겨주기도 하는 걸 보면, 의외로 편견이란 거에 집착 안 하는 듯도 싶고.
“오고 갈 곳이 많으니까요. 자자, 날도 저물었으니 빨리 쉽시다.”
그렇게 불침번 순서를 우선 정한 다음, 잠깐 고민하는 척하다가….
“무리엘 님. 같이 주무실래요? 아, 정말 자는 것만요.”
“…그, 그래.”
그래 봤자 이쪽이 일방적으로 등 베개 삼아 기대는 거뿐이었지만.
이불 겸 가벼운 모포를 활짝 펼쳐 그녀의 몸에 기대 적당히 몸을 반쯤 눕히려 하자.
파닥파닥!
“짜잔!”
마차 지붕에 있던 부에루가 잽싸게 날아와 모포 안으로 스며들 듯 들어섰다.
“나도나도!”
“응, 그래.”
“허허, 보기 좋구먼.”
정말로 보기 좋은 건지, 핀잔을 주는 건지는 살짝 애매했지만, 에드릭은 가장 개꿀 타이밍에 불침번을 서게 된 그라엘에게 살짝 목례하곤 눈을 감은 채 무리엘의 하반신 부근에 몸을 내려놓았다.
완전히 눕지 않더라도, 무리엘의 털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상당했기에 이건 이것대로 기분이 좋았다.
잘 때는 아무래도 하의를 벗어두는 터라 털이며 가죽으로 된 피부에서 느껴지는 온기며 부드러움이 아주 그냥… 어후!
“쓰, 쓰다듬지는 말거라!”
살짝 뿅 가는 듯한 목소리로 미약하게 그리 항변인지 투정인지… 아니, 반발인가?
아무튼 그러거나 말거나, 적당히 쓰다듬으며 그 감촉을 즐겨 가며, 에드릭은 편안히 눈 감으며 내일을 기약했다.
이런 게 진정한 힐링이지.
암, 그렇고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