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45. 말이 안 통할 땐 예로부터...(2)
[제안이라는 건 서로가 동등하거나, 그에 준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을 때나 가능한 거지. 네 녀석이 그게 가능하다고 지금 입을 놀리고 있는 거냐?]
“관용을 베풀어 한 말씀 올릴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대충 구색에 맞게 예를 취하니, 그래도 체면이 있는지 들어보려는 척은 해댄다.
이곳에 오기 전 사전 조사며 바헬루스의 성향을 대충 잘 살펴둔 참이었다.
만약 예상 그대로의 존재, 예컨대 호전적이며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이 강자가 세상을 짓밟으며 자기 멋대로 이것저것 부려도 무관하다는 사고 관념이 투철하다면…… 방법을 달리 할 수밖에.
그러나 세상일은 모르는 거고, 말이 통하는 존재라면 말로 설득하면 그거야말로 가장 좋은 결과가 아닐까, 하고 에드릭은 생각했다.
물론.
[가당치도 않구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태도를 보인 덕에 어느 의미론 아쉬운 마음조차 일지 않았지만.
아니, 아쉬움을 떠나 안타까움을 느꼈달까.
[산 자들의 이치란 무릇 강자가 약한 것들을 물어뜯어, 그 시체로 배를 채워 삶을 이어가도록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약자가 강자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건 당연하지 않더냐? 그것을 자비니 배려니 하는 쓸데없는 소리로 동정심을 구하고자 한다면, 네 녀석은 이곳에 잘못 와도 한참을 잘못 왔다.]
“정녕 파라메라 대륙의 태반이 비참한 삶을 수백년 가까이 누리는 사태에 직면하더라도, 바헬루스 님의 경우엔 자신을 따르는 이들만 잘 되면 나머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이를 장려한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참이십니까?”
[짐승도 자기 새끼에게 관대하나, 그게 아닌 모든 새끼들은 물어뜯어 죽이곤 하지. 오히려 좋은 기회 아니더냐? 세상이 아무리 넓다 해봤자 영역은 한정돼 있다. 그곳에 주인임을 자처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분류는 철저하게 진행해야지. 따르지 않는 자, 불신자들에게까지 자비를 베풀라? 그래야 할 이유가 따로 있더냐?]
“흐음….”
태생이 잘난 놈들은 약자의 고뇌, 불행, 갈등, 비탄을 공감하지도, 읽어내지도 못하는 게 일반적.
아파본 적 없는 자는 모른다.
또한 공감 능력이 결여된 것들은 그러한 이들을 민폐, 그보다 더 추악한 존재로 치부하곤 한다.
노력을 행해도 안 되는 부류들이 있다.
진심으로 노력하고, 발버둥 쳤냐 묻는다면, 그러지 못한 이들도 태반이겠지만, 자기 수준에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지도.
아니, 그조차도 사치고, 최선조차 해본 적 없이 어리광 삼아 그런 헛소리로 자기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 거짓을 고하는 걸 수도 분명 있다. 아니, 태반이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못하는 거, 나약한 것이 죄가 돼선 안 된다.
악이 죄가 될지언정, 낮은 자가 오르는 행위, 스스로를 갈고 닦으며 비참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오고자 하는 것마저 외면하고 무시하고, 괄시해선 아니 된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배를 굶어본 적 없는 이가 며칠을 굶어 뱃가죽이 등에 달라 붙을 것만 같은, 물로 배를 채우는 그 비참함을 어찌 이해하겠는가?
심지어 흉내조차 내본 적 없으며, 머리로라도 이해하려 든 적이 없다면?
돈이 많이 생기면 세상엔 정말 많은 선택지가 주어짐을 알게 된다.
돈이 없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극히 한정적으로 변하고야 만다.
여기에 만족하며 거기에 족함, 부족을 느끼지 말라는 식의 사상은 동서양 할 거 없이 모두 실재하는 이론, 사상, 논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건 냉정히 말하면 가진 이들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그러나 가진 이들, 풍부하리만치 많이 소유하고 보유할 수 있는 이들은, 어찌 됐든 극히 한정적이다.
재벌들 기준에서야 재벌이 이곳저곳 널린 듯 보이지만, 일개 시민의 입장에선 재벌은 손에 꼽힐 수밖에.
스포츠 업계에서도 잘나가는 이들만 잘나가고 나머진 얼굴도 모르며 이름도 모르는 게 태반.
그리고 그 사정을 알면 동정은 해도 그걸 개선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진 않는다.
한두 차례 그럴 수는 있지.
그러나 프로는, 그걸로 밥을 빌어먹는 이들은, 누구보다 잘나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려고 그 일 한 게 아닌가?
그러한 냉혹함을 딛고 일어서는 걸 당연시 여겨야만 한다.
장사조차도 서비스가 확실하고 품질이 좋아야 하며, 트렌드를 잘 따라야 잘 팔고 이윤을 남기며 돈을 벌고….
이러한 것에 휘둘리며 지친 사람들이 힐링이며 워라밸을 찾기 시작한 것.
이에 대한 문제로 인구수며 특정 분야로 몰리고, 누구나 마음껏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자유주의가, 바로 족쇄로 작용해 그들로 하여금 상대적 박탈감을 야기하는 거 아니겠나.
그리고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힘이 넘쳐 흐르며, 스마트하고 안면몰수 잘하며, 눈치가 빠른 이들은 그렇게 돈을 끌어 모아가면서도, 다시금 부족함을 토로한다.
‘끝이 없어.’
에드릭은 한숨을 삭히며 재차 물었다.
“그렇게 전부, 자기 휘하에 들지 않은 이들은 전부 배척하고, 몰아내고, 짓밟아야만 직성이 풀리시는지요?”
[세상천지가 그렇게 하라 요구하지 않았더냐? 어찌하여 배를 채워야 하는가? 젊고 늙는 시기가 있는 건 무엇이더냐? 왜 욕망을 우리에게 주었는가? 왜 소유할 수 있는 걸 한정 시켜 누군가는 가지고, 누군 가질 수 없도록 만들었는가?
가진 자는 지키고자 고군분투하며 지키지 못할 시 빼앗길 것이며, 가지지 못한 자 또한 언제든 빼앗기 위해 발톱을 숨긴 채 기회를 노리며 다음을 기약하고. 세상은 끊임없는 소모하고 소모되는 것의 연속이다. 종으로 묶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종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해하라? 협력하라? 잡아 먹히기 위해 태어나는 짐승과 잡아먹기 위해 태어나는 이러한 구분은 왜 지었는가? 보아라, 세상은 존재하는 이 시점에 이미 그러한 것을 모조리 정의해놓았다. 그것을 따른다는 것에 너는 불합리를 느끼느냐?]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다 같이 힘을 모으면 더 나은….”
[궤변이군. 다 같이 힘을 모은다? 잠깐은 가능하다 인정해주마. 너와 같이 그런 소리를 죽을 때까지 해대는 시끄러운 것들 때문에라도 잠깐은 낫겠지. 그러나 네 녀석이 죽은 뒤엔? 그 이후에는?
규율, 법, 규칙? 그런 것이 영원하리라 보는가? 어림도 없는 일. 잠깐의 평화, 화합은 더욱더 큰 갈등과 불만, 갈증을 불러올 터다. 누군 그것을 영광이라고, 누군 그것을 부질없는 짓이었다며 한탄하겠지. 영구할 필요는 없으나 그에 발치조차 못 따라잡는다면, 시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렇다고 짐승처럼 태어나 죽고, 고뇌하며 고통 받다가 또 죽고, 그게 진정 타당하다는 겁니까?”
[고통은 약자의 전유물이다. 힘이 없어 함부로 먹이를 찾지 못한 것들은 고통받을 것이고, 힘이 없어 나 아닌 무언가를 경계하며 몸을 사려야 하는 것들이 또한 고통받을 것이며, 힘이 없어 소유물을 빼앗기는 이들이 또한 고통받는 것. 그게 싫다면 싸우고 투쟁해 쟁취해내야지. 그게 아니라면 무엇 하나 얻을 수 없는 게 세상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또한 세상이고.
오로지 승자만이 즐기고, 승자만이 누리며, 그러한 걸 쫓고 쫓게 만든 게 바로 이 세상의 더러운 이치가 아니겠느냐?]
“…그래서야 지옥이 따로 없지 않습니까?”
그게 마음에 안 드니까, 그게 못마땅하니까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시도하고 뭣하고 하는 건데.
[지옥은 약자의 전유물이지. 가지지 못한 자, 지키지 못하는 자, 만족할 줄 모르는 자. 네가 지옥에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네가 약자이기 때문이다.]
“…….”
생각보다 고상했다.
자기 주관이 너무 확고해서… 설득이니 이해를 바라는 거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걸 제대로 깨달았다.
물론 저 신수 또한 겪은 바가 있기에 저러는 걸 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좀….’
슬프잖냐? 한심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무의미한 감언이설로 평화를 역설하고자 한다면, 그거야말로 무의미했음을 재확인했을 거라 여겨진다. 너는 내 가호를 받은 미물이 내게 어떠한 제안을 했는지 알고 있느냐?]
“…….”
[내 휘하에 든 모든 종족들의 영광. 그 이외의 모든 종족들이 우릴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고야 마는 삶. 예컨대 정복해 지배하여… 힘으로서 정의를 확립하겠다 하였지. 그리하여 신수로서의 내 입지를 가장 높은 곳에 올려놓겠다고까지 말해대더군.
그래, 차라리 허무맹랑하더라도 그런 배포 넘치는 포부 쪽이 마음에 드는구나. 물러 터진 평화, 화합… 그건 정신을 썩어 문드러지게 만들지.
평화는, 존재할 수 없다. 싸우지 않는 자는 살아있다는 것 자체로 평화로울 수 없지. 만약 네가 녀석이 말한 것에 준하는, 그 이상의 것을 제안하지 않는 한, 내가 마음을 돌릴 일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알헤디나의 끄나풀하고 이따위로 대하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지. 과거였다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후우.”
[더 할 말이 없다면 이만 꺼져라. 네 녀석의 제안은 시작부터 물러 터졌으며, 그릇됐고, 잘못 이루어졌음을 파악하고 반성하거라. 힘을 가진 이에게 힘을 사용치 말라, 화합하여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똑같이 버러지처럼, 미물처럼 그들의 생각과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라는 그런 허무맹랑한 말은… 패배자들과 약자들의 구걸에 지나지 않으니. 억울하다면 힘을 키우고, 비참하다면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건 극복을 하려는 용기를 보여라. 내 말, 알아 듣겠느냐?]
“……이건 소문보다 더하시네요.”
잠시간의 침묵 끝에, 에드릭이 어쩔 수 없다는 양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상보다 훨씬 꽉 막히셔서… 확실히 말씀하신 내용처럼, 설득이며 제 기준에서의 제안을 드리는 건 아무래도 무리라는 걸, 확실하게 이해했습니다.”
[그래, 하면 머리 회전이 제법 되는 듯 하니, 차선책을 가져왔겠지? 그건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으면 하는구나.]
“예, 아~주, 마음에 드실 겁니다.”
에드릭은 자신의 뒤쪽, 더위로 한창 불쾌지수가 극에 이른 코넬을 돌아보며 요청했다.
“부탁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애초에 그러자고 동행시킨 거 아니냐? 그래, 아무튼… 이번이 다섯 가지 중 두 번째로 치면 되겠지?”
“…예. 벌써 3개 남았다는 걸 생각하니 간이 막 떨려오네요.”
“엄살하고는.”
여엘프, 소녀는 황홀하게 웃으며… 멀찍이서 보이는 저 큼지막한 체구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저 몸체로도 용케 저 경사진 곳에 잘도 매달려있구나 하며, 에드릭은 반쯤 넋이 나가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사태가 파악 안 됐는지 신수 바헬루스는 사태 파악이 안 되는지 의아한 기색을 내비친다.
[내 관용을 베풀고 있는데 그 시건방짐은 대체 뭐지? 실성이라도 한 게냐?]
“음, 실성이라기보다는….”
에드릭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창 손을 번갈아 주물러 대는 코넬을 보며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안 되는 건 진작 안 된다고 했겠지. 내가 하고 못하고는 확실하게 말해준다 하지 않았더냐? 그 뭐냐? 알헤디나? 그 뱀이라면 나로서도 감당하기 어렵겠지만, 괜찮다. 저 정도는.”
이윽고 그녀의 전신에 스멀스멀, 검붉은 무언가들이 꾸역꾸역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내가 버젓이 활동하고 다녔을 땐 저 꼬맹이는, 존재하지도 않았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