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45. 말이 안 통할 땐 예로부터...(3)
과장된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지만, 실상은….
[건방진 것들 같으니. 알헤디나의 졸개라 하여 기껏 예우를 해줬건만….]
그 육중한 체구로부터 불길이 치솟자 단번에 주변 일대가 시뻘겋게 물들었다.
음, 화가 나도 아주 잔뜩 났나 본데?
분명 거리감이 상당했음에도, 그 불길에 가뜩이나 찜통 같던 주변 기온이 몇 도는 더 상승한 듯 느껴졌다. 아마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열기도 문제였겠지만,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널브러졌을지도.
천만다행인 건 에드릭 자신은 물의 정령의 가호를 한껏 받는 입장이다 보니, 버티는 거 자체는 문제가 되질 않았다.
그래, 딱 버티는 정도는.
“얼간아, 우물 속 개구리처럼 자신이 몸담은 세계가 전부인 줄 착각하는 걸 보니, 같잖기 한량없구나.”
곱디고운 소녀의 목소리는 어느덧 심연 깊숙이서 뻗어 나오는 음침하고 불길한 음성으로 뒤바뀌어간다.
이윽고 코넬의 전신이, 검붉은 기류에 파묻혀 형체를 잃어 간다.
[우물 속 개구리? 같잖은 소릴 지껄이는구나. 너야말로 주제 파악 못 하고 미물인 주제 감히 내게…… 내게………….]
시뻘겋게 물든 세상은 어느덧 어둠으로 뒤덮였다.
눈 깜짝할 사이는 아니었다.
적어도 몇 차례 깜빡일 여지는 있었으니까.
그러기에 더욱 선명하게, 세상천지가 검붉은 안개로 뒤덮여가는 모습을, 에드릭도 신수 바헬루스도 분명하게, 그 모든 사태가 자신들의 의지와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는 형태로 이루어진 광경들을, 아주 속속들이 목도할 수 있었다.
거기다 그뿐인가.
이윽고 검붉은 형체가 선명하게 형상을 이루어간다.
칠흑보단 밝았다.
허나 별빛마저 수그러든 밤하늘의 그것보단 어두운 세상 사이로, 검붉은 섬광과 그것을 품은 듯한 검은 기류는 가히 불길함의 온상.
그 때문에 그것이 단순한 안개며, 흩날리는 검은 기류로부터 선명한 색광을 방사하며, 이윽고 선과 형태가 결합 돼 거대한 형상을 이루자, 지켜보는 이들은 절로 경외감과 불길함, 짙은 불안과 절망을 동시에 만끽할 수밖에 없으리.
[크헤∼ 내가? 뭐? 내가 뭐?! 말해봐. 조금 전 그 패기는 어디로 갔나?]
[…….]
음, 이전에도 한 차례 목격했지만, 도무지 적응 안 되네.
검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그건 검붉은 기류로 이루어진 듯한, 그런 존재였다.
그러나 그 형상의 전체적 윤곽은, 중세며 여러 가지 의미로 판타지 세계 하면 곧장 떠오릴 법한, 그런 시그니처 같은 존재.
바로….
[드래…곤? 이건…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지 않나?]
신수 바헬루스, 불과 용암으로 이뤄진 듯한 저 거대한 악어조차도, 어쩐 영문인지 저 검은 기류로 형성된 거대한 검붉은 용의 체격이 비하면, 거의 한주먹 거리 밖에 안 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
체급 자체로 보면, 사실상 발로 짓밟기만 해도 지지 칠 것만 같은 구도인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힘이라. 좋지. 아주 좋아. 폭력에 의한 지배! 종속! 아~주 좋지! 한데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짙은 음성은 마치 지옥 저편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그윽하고, 어둡고, 탁하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거기엔 헤아릴 수 없는 위용이, 귓전에 그 음성이, 의미가 틀어박히는 것만으로 마치 멀쩡한 심장을 날카롭게 선 손발톱으로 와락 움켜쥐는 듯한, 그런 섬뜩한 감각이 이윽고 심장을 거쳐 전신을 난도질하는 것만 같은, 그런 아찔함을 동반하기에 이른다.
흔히 드래곤 피어니 뭐니 해서 드래곤을 목격하거나 눈을 마주치거나 그 울음소리를 들으면 공포에 질려 이성줄을 놓거나 끊어져 혼절하고 발악하고 뭐 난리법석을 피운다는데, 사람이라는 건 사실 지나가는 들개가 사납게 짖어대는 것만으로 오금을 저리곤 한다.
그런데 그 들개가 어마어마하게 크다면?
볼 때부터 식은땀이 흐를 텐데, 목줄이고 입마개도 없는데, 빤히 이쪽을 보며 접근해 오고 있다면?
그래도 그건 들개다. 어쨌든 그조차도 목숨에 위협을 주고도 남을 공포일 테지만, 그것이 사자며 호랑이, 곰을 만났을 때 체감되는 충격과 공포심에 비하면, 그조차도 양반.
그런데 어지간한 주택 단지, 집이며 건물 몇 개를 합쳐놓은 듯한 체구의 짐승이 눈앞에 있다 치자.
…이건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크다?
그때쯤이면 공포를 느끼기보단 탈력감, 무력감, 허탈함이 먼저 밀려든다.
한도를 벗어난 공포며 위용, 위엄을 목격하면, 그때부턴 판단이란 걸 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는데, 신수 바헬루스가 그런 압도적인 공포를 심부에 강제로 쑤셔 넣듯, 틀어박는 듯한 존재라면… 알헤디나와 지금 눈앞의 코넬, 아니 실질적으로 키헨젤바라투스라 불리는 저 고대적 드래곤은 이미 존재 그 자체로 공포와 경외를 동시에 불러오는, 그리고 원하는 방향으로 언제든 피조물, 필멸자, 미물들에게 특정 감정, 사고, 관념 등을 그저 분위기며 기세만으로 쑤셔 박을 수 있는, 진정한 의미로 초월적인 존재들.
바로….
[세상에 절대적인 건 존재하나, 그게 네 녀석은 아니지.
일찍이 대륙이란 건 하나였고, 그것이 갈라지고 부서져 나누어진 건 우리 때문이었는데, 그 일부, 극히 좁은 구역에서 나약해 빠진 피조물들 위에 눌러앉아 왕 노릇하니 눈에 뵈는 게 사라졌구나.
네 녀석은 아직도 자신이 이곳 세계에서 가장 잘났다고 자부하더냐? 이계에서 온 하얀 물뱀한테도 허우적대 다른 녀석하고 합심해 상대하면서도 우위를 점하지 못해 동정을 구한 이 얼간이 새끼가….]
[기다리시오! 대체! 당신은… 뭐 하는 존재요?! 나 또한 드래곤들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으나! 당신 같은 존재감을 지녔다고 들은 적은 없었소!]
[같을 리가. 애초에 난 용이고 뭣도 아닌데.]
[무, 뭐…?]
[그런데 그것들이 이곳 세계를 주름잡는다고 누가 말하더냐? 기껏 종이라는 놈이 주절댄 소리에 눈과 귀가 멀어, 진실을 보지도, 깨우치지도 못하니, 안쓰럽기 짝이 없구나.]
[…수천 년을 한세월처럼 살아왔지만! 당신과 같은 존재에 대해선 그 어디에도 들은 적도, 느껴본 적도 없었소! 그, 설마…?]
[혀가 길구나. 헛소리 집어치우고, 이제 네 녀석이 말한 그 힘의 논리를, 스스로의 몸으로 증명해보도록 해라.]
[잠깐! 세계의 균형을 수호하는 이 아니오?! 그게 아니고서야….]
[얼간아.]
이때, 어딘가 즐거운 듯, 한편으론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낀 검붉은 용은.
[네가 말한 그 새끼들, 균형과 수호한다고 날뛴 그 새끼들하고 고대 적부터 치고 박아댄 게 바로 나다.]
그 말과 함께 발로 바헬루스를 그대로 짓밟자, 저항도 못 하고 그대로 짓뭉개지고야 말았다.
물론 형체가 망가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적어도 주변 지형이 단번에 무너져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크허어어엉!
진심으로 위급한지 악어가 토해냈다고는 믿을 수 없는 비명 비슷한 게, 대기를 쩌렁쩌렁 울려댔지만….
[계속 짖어대봐라. 개새끼도 아닌 게 잘도 짖어대는구나.]
하며 팍팍 밟아대는데… 한편으론 통쾌하고 쌤통이구나 하며 즐겁게 볼 수 있는, 그런 광경임에도… 도무지 그럴 짬이 나질 않았다.
“후우!”
심호흡 안 하면 기세에 파묻혀 금방이라도 눈이 돌아갈 것만 같았기에.
저 모습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 머릿속이 두세 바퀴는 헝클어지고… 송두리째 뭉개지는 것만 같아… 도무지 버티려야 버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조차도 그녀가 배려해서 자기 기세를 덜 풍기는 거라는데, 진심으로 날뛰면 어떻게 될지는….
키헨젤바라투스 아토게르나엔자.
이름이 특이하지만 어쨌든 고대 기록상으론 이런 식의 이명으로 불린다.
흡혈룡.
피를 빨아먹는 용이라는데, 용의 형상을 해서 용의 모가지를 물어 피를 쪽쪽 빨아대다 보니, 그렇게 불리기 시작했단다.
애초에 타고난 형상이란 게 없이 태어났단다.
말 그대로 개념상의 혼돈, 혼란.
그러기에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죽음과 분쟁을, 마치 자연재해처럼 재앙을 몰고 다녔으며, 그러기를 얼마나 오랫동안 반복해왔는지는 본인도 모르지만, 그러한 세월이 쌓여 자아가 형성되고, 그때도 마찬가지로 타고난 본능대로 살아가며 모든 생명체들을 쓸어 담아 청소해대는, 죽음과 절망, 불길함의 온상으로서 이곳의 고대 세계에선 아주 이름 높은 악몽, 악명이 자자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는데, 실제로 그녀를 죽음의 신으로 묘사하는 신화들이 각 대륙에 분포돼 있을 정도란다.
‘기이한 인연이지.’
어쩌다가 저런 초월자와 엮이게 된 건지 원.
복이라면 복이고, 저주라면 저주랄까.
어쨌든.
[크허어어억!]
이윽고 다시 세상천지를 뒤덮던 검붉은 안개가 걷히고.
다시금 정상적인 세상으로 돌변하자, 어느덧 망가지고 부숴졌던 주변 지형마저 그대로 복구되듯 형상을 되찾기에 이른다.
당연 그녀에게 짓밟혀 그 오랜 삶을 마감하기 일보 직전이었던 바헬루스조차, 자신의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 거에 대해 한동안 적응 못 해 끙끙대길 한참.
[이, 이건…?]
“진짜였으면 네가 말한 그것들 뛰쳐나오니까, 이 정도만 해준 건데… 맛보기로 만족이 안 됐으면 더 까불어 봐. 그땐 네 녀석의 피와 육신을 모조리….”
소녀이자 여엘프인 코넬의 형상으로 돌아온 그녀의 말에, 바헬루스는 에드릭이 보기에도 애처로워 보일 만큼, 그 거대한 고개를 좌우로 마구 저어대어 주변 지각을 뒤흔들어댈 정도로, 힘껏 경기를 표출했다.
[아, 아니오. 나는 이미… 충분히 그대의 위엄을 감당하였소.]
말투 봐라. 하이고….
구태여 한 번 더 진심인지를 묻는 코넬의 추궁에, 바헬루스는 신수의 이름에 걸맞지 않은, 애처로운 목소리를 가장해 동정을 구했다.
이윽고 만족스러운 양 코웃음을 친 코넬은.
“그렇다는데?”
하고 따로 추가 사항 있냐는 듯 눈을 흘겨왔다.
“하하하….”
그저 웃지요.
웃는 거 외에 뭐가 있을까요.
하하….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