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50. 많이 긴장했단다.
그 외에도 거쳐 가며 보게 된 이들이 어디 한 둘이었을까.
그러나 결정적으로 고대하며 방문하게 된 곳은 역시… 데이엔 가문의 모녀를 보러 갈 때였다.
물론 프리지아, 테티아나의 따님은 일 때문에 어딘가 먼 곳으로 향했기에 결국 볼 순 없었지만.
“오랜만이구나.”
“예, 얼마 만에 뵙는 건지 모르겠어요.”
당연하다는 듯 포옹과 입맞춤으로 인사를 나누는 둘.
마치 장성한 아들을 맞이해주는 듯 반가움을 적극 표현하는 테티아나.
한편으론 아들이라기보다는 남편을 맞이하는 듯 느껴지는 건 어떠려나.
몇 년 사이 더욱 활기가 넘치게 바뀐 것처럼 느껴져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그겐 에드릭이 보기에나 그런 거지, 누가 보더라도 그녀는 사뭇 안정감 넘치는 높으신 가문의 안주인과 같은 인상을 뽐내고 있었다.
특유의 솜사탕, 소다 색처럼 연푸른 색감의 머리카락, 이와는 대조적인 적갈색으로 은은하게 타오르는 두 눈.
옷 또한 하늘하늘한 연푸른 빛을 내는 게, 실내 활동에 매우 적합해 보이는 편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바. 말 그대로 귀족 가의 높으신 안주인의 분위기가 완전히 자리매김한 듯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젊은 편이었다.
아직도 앞날이 창창할 수밖에.
그러나 데이엔 가는 예로부터 가문의 규정과 전통 때문에라도 여성이 가문의 주인을 도맡아왔으며, 현재는 테티아나가 바로 가문의 주인. 그러기에 일반적인 귀부인들과는 다른 확고한 자신감, 자부심이 은연중 드러난 탓인지, 밝고 쾌활할 가운데 진중함이 뒤따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을지도.
에드릭은 가벼이 테티아나의 뒤편에 자리한 이들, 가장 먼저 메이드장하고도 간단히 목례를 주고받았다.
그걸 느긋하게 지켜보던 테티아나가 이윽고 능글맞은 어조로 불쑥 이야기했다.
“소식은 들었다. 많이 섭섭하구나.”
“…하하하.”
그저 웃지요.
솔직히 경황이 없었다, 바빴다는 변명을 하자니 염치가 없을 것 같았기에, 에드릭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곧장 찾아올까도 싶었는데, 조금 고민되더라고요.”
“무엇이?”
“당연히 예상했던 일이지만… 어찌 됐든 경축드립니다. 바라시던 대로, 딸 아이란 소식 들었습니다.”
“네 아이가 아니더냐? 직접 보면 되지 뭐가 아쉬워서 그 소식을 외부에서 듣고?”
“음, 일전에 약속드린 것도 있고, 되도록 티를 안 내려고 말이죠.”
그나마 여자아이여서 다행이라 해야 할까.
아니, 이렇게 단정 짓는 거 자체가 조금….
“일전에도 말했지만, 그런 거에 크게 구애되지 말고. 정 상황이 불가피하면, 그깟 규정은 바꾸면 그만 아니더냐?”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부담을 안겨드리고 싶진 않거든요.”
어쨌든 데이엔 가는 브로헤닌 왕가에 목줄이 잡혀 있기에, 규정을 어길 시 제아무리 나라 밖에 터를 마련했다 하더라도 그 나라가 전력으로 훼방을 놓거나, 악심을 품는다 치면 몰락시키려 악을 써댈지도 모를 일이기에, 그런 부담감을 안겨줄 순 없다 에드릭은 생각했다.
아마 그녀도, 알면서 부담 안 주려고 둘러대는 걸 테지.
의외로 별거 아님에도, 정치적 사안이나 처세에 대해 본의 아니게 헤아리고야 마는 둘이었지만, 그조차도 배려 때문에 한 발자국 오차를 범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니 이거야말로 딜레마가 아니겠는지.
그나마 사내였다면 왕가 쪽으로 보내며 왕자며 왕족이 안 된다면 그들의 뒤나 닦아주는 더러운 일이나 해댔을 거니… 그건 그것대로 속내가 많이 불편했을 거다.
브로헤닌 왕가에선 묘하게 자식의 수가 적고, 급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근친에 의한 관계가 격화된 탓도 있다지만, 전쟁이나 분쟁 가운데 자꾸 왕족들이 죽어 나가서 그렇단다.
그러기에 어쩔 수 없이, 친족에 외가까지 찾다 찾다 애매해서, 정치적 여건도 겹치다 보니 데이엔 가 쪽 아이를 어릴 적에 납치하듯 데려와 왕태자로 삼는 경우가 생긴 걸 테고.
“아이 이름은요?”
“루이샤. 무려 프리지아가 고심하던 차에 지은 이름이란다.”
“프리지아는 어때요? 이제 자신을 대신할 아이도 나왔으니 가문이고 뭐고 난 몰라! 하고 그러고 있진 않겠죠?”
“그거야 자기 하기 나름이지. 본래는 출산 뒤 산후조리 뒤 다시 보조로 돌리려 했는데, 그럭저럭 익숙해져서 이젠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까. 모르는 건 재깍 와서 물어보고 있고. 해보니 그쪽에도 재미를 붙인 모양이야.”
“그건 다행이네요.”
한시름 놓았다.
프리지아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자리를 내려놓고 나간다면야 어쩔 수 없는 거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데 그럴 상황에 몰려 무작정 쫓긴다? 그건 그것대로….
그래도 테티아나가 그럴 거 같진 않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니.
정치 권력이 개입되면, 인간이 어찌 바뀔지는 정말 모르겠다.
현실이 꽃밭처럼 화사하기만 하고, 향기가 넘실넘실 흘러넘치는, 그런 다정하고 상냥한 세계와는 거리가 멀기에, 좀처럼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단 말이다.
“테티아나 님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아시나요?”
“모르지. 프리지아 그 아이도 누가 자신의 아비인지 모르는 상황인데. 애초에 그걸 위해서 사내를 여럿 들여 관계를 맺는 거니까.”
“흐음….”
“그래야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엮이지도 않고, 혹여 엮는다 쳐도 우리가 그러는 거지, 그들이 그런다? 그럴 리가. 각자 가정이 있고 그럴 듯한 기반도 갖춰졌는데 그런 쪽으로 퍼지면 자기들만 손해지. 가문이 혹여 폭상 망해서 우리한테 엮여온다 치면, 그건 규정에 어긋나니 우리 쪽에서 처리하면 그만이고.”
“허허….”
무섭다 무서워.
“밝히고 싶으면 말해. 어차피… 시간 지나면 네가 아버지라는 건 그 아이도 모를 수가 없을 테니까.”
“그… 점은 조금 봐주세요.”
“왜? 부끄러워?”
…이때 부끄럽냐는 물음은, 낯가림이 심해 자기를 밝히는 게 어렵냐? 의 의도가 아니라… 결혼도 안 했는데 딸이 생긴 것에 대해 번거롭냐는 식의 물음이었다.
웃는 얼굴로, 반가운 기색으로 저리 말하고 있음에도, 대뜸 비수를 푹 찔러오는 그녀.
오히려 이건… 뭐랄까. 나가떨어지길 기대하는 것보단 더 엮으려는 듯 느껴지는데, 어떠려나.
물론 그것이 그녀의 배려인지, 정치적 안배인지는 솔직히 살짝 헷갈렸다.
에드릭의 위세가 커진다면 언젠가 이는 분명 문제가 될 테지만, 솔직히 에드릭은 거기까진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내가 뭐 엄청 출세해서 나라 하나 세울 것도 아니고.’
설혹 세운다 쳐도 과연 그게 문제가 될지도 모르겠고.
…전부 다 과장된 가정이지만.
“대뜸 밝혀서 아이를 놀라게 하는 것도 그렇고, 제가 자주 곁에 있어 줄 입장도 아니니… 괜히 티아나, 당신 어깨만 무겁게 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요.”
그러기에 에드릭도 의도적으로 애칭을 불러가며, 당신에 대한 애정이 변하지 않았음을 적당하게 표현했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라 교육해도, 아이들은 어떻게 튈지 모르는 거니.”
한편으로는 알아들었다는 양 고개를 끄덕거린 테티아나.
“그래도, 안 볼 건 아니지?”
“물론이죠.”
어디 보자… 내가 파라메라 대륙에 가서 헤매던 차에 생겨났다 치면….
애초에 임신시킨다는 명목으로 아주 작정하고 관계를 맺었다 치더라도,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몰라 그대로 소식이 없었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애초에 날짜를 정하고 해버린 거니 이렇게 생각하는 건 조금 경솔했을까 모르겠다.
파라메라 대륙에 있을 당시, 그쪽 일이 바쁜 것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알그리타 쪽 소식엔 관심을 끈 결정적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애초에 그렇게 정했다 치더라도, 왠지… 출산 때 옆에 안 있어 주니 그건 그것대로 조금….
어쩌면 그 사이 자신감이 생겨 또 다른 사내를 끌어 들였다거나… 트라우마가 해소된 계기로 사람이 다른 의미로 바뀌었다거나….
그러다 보니 솔직히, 찾아온다 쳐도 완전히 비즈니스 관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경우까지 어느 정도 가정까지 하고서 찾아온 거였다.
별거 아닌 듯 보여도, 마음의 준비가 상당히 필요했기에.
“너는 몸은 커진 주제 그 조막만 하던 꼬맹이 때보다 더 소심해진 거 같구나?”
“그래요?”
“…그 능글맞은 얼굴은 더 절묘해진 것도 같고.”
묘하게 코드가 맞아 떨어졌는지, 방금 전 에드릭의 우수에 젖은 표정에 테티아나가 살짝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붉혔다.
아닌 게 아니라 꼬마였을 때도 장난 아니었는데, 어째 나이를 먹으니 보란 듯한 미청년이 돼서 돌아왔다.
심지어 그곳에서도 놀고먹고만 있었던 건 아닌지 완전… 야생마가 따로 없게….
옷 사이로 비치는 근육이 자리 잡은 몸이며, 균형 잡힌 매끄러운 몸이 불현 듯 그려지는 건 무슨 영문인지.
‘민망하게….’
그래도 애써 티를 안 내려 노력하는 테티아나였다.
“됐으니 얼른 안으로 들어가자. 여기서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경망스럽게.”
“하하하….”
손님을 계속 세워두는 건 예가 아니다.
그럼에도 안부 차원에서 몇 마디 의례적으로 주고받으며 안으로 객을 들여보내는 그 당연한 절차조차 잊을 정도로, 그녀가 에드릭에 대한 열렬한 반응을, 관심을 보이고 있었음이 입증됐기에, 에드릭으로선 다시금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전보다 더욱 아름다워졌고, 굳건해졌으며… 지니고 있던 그늘, 트라우마를 벗겨냄으로써 한층 더 자유롭고, 강인해졌다.
물론 그만큼… 자신이 감당하기엔 더없이 무서워진 게 아닐까, 내심 불안도 했지만… 그 또한 좋지 아니한가.
쉽사리 안겨드는 여성도 사랑스럽고 귀엽기는 하나, 어렵사리 관계를 쌓아나갈 대상이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복됨이라 에드릭을 생각했다.
그리고 내부로 들어서던 중.
“어머니!”
계단을 올라 응접실로 향하던 중, 멀찍이서 애달픈 목소리가 길쭉하게 늘어져 들려와, 무심코 시선을 줬다.
그리고 거기엔… 자신의 무릎에나 올까 싶을 정도로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초롱초롱한 연분홍색 눈으로 반짝이며 우리 쪽을 향해 뒤뚱뒤뚱 어설픈 뜀박질로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