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52. 만나면 좋은...(2)
대학 막 졸업하고 사회로 나왔을 법한, 싱싱한(?) 20대 청년이 뭔가 어색한 태도로 태민과 철영을 불렀다.
인물상은 무척 뛰어났음에도, 차림새가 썩 익숙지 않아 붕 뜬 것처럼, 정장 모양새가 어째 보기에도 익숙해 보이지 않는, 그런 녀석이었다.
“왜?”
“아, 안태민 선배님한테 소식 전달하라 하셔서요. 윤미라 팀장님이….”
“말 편히 해 인마. 군대도 다녀와 놓고 뭘 그리 위축돼 있는데?”
그런가?
군대에다 4년제 대학 기준이라 치면, 스물 중반 직전이라는 건데… 아무리 봐도 군 생활로 얼굴이 삭거나 썩은 기색이 안 느껴지는데?
땡볕 맞고 훈련하고 어쨌든 구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세월의 풍파에 치여 얼굴이며 분위기가 삭는다고 할까. 이거 벗겨내려면 상당히 고생해야 하는데.
그럼에도 당장 보면 10대 후반, 20대 새내기라 해도 믿을 법한 외양이다.
특히 중성적인 느낌이 다부지기도 하니, 완전 미소년, 미청년 계통이랄까.
“10분 정도 뒤에 라운지 쪽으로 찾아오랍니다.”
“나 혼자?”
태민이 자신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예.”
“거봐라. 맞나 보네.”
철영이 팔꿈치로 가슴을 툭 건드리며 웃음 지었다.
“그래, 그렇게 됐으니 넌 슬슬 출발하고… 유성아, 넌 나하고 술이나 푸자.”
“예? 아, 저 술은 별로….”
“별로는 무슨! 여기서 안 마시면 너 언제 마시려고? 싸구려 막걸리에 쐬주~ 보리 오줌 따위하고 비교하지 말고! 여기서 술만 제대로 맛봐야 나중에라도 그 맛을 잊지 못해 출세하고 뭐 그러지 않겠냐?”
“아니 저… 그냥 제가 술을 잘….”
“빼기는. 척 봐도 친구들이나 여자 앞에선 잘 마실 상인데.”
“…….”
흠칫 해한다.
철영 선배가 둔하고 뭔가 겉만 보면 가볍고 청승맞아 보이더라도, 나름 잔뼈가 굵은 분이시다. 남 싫어하는 일 안 권하고.
이 말은 뭐다?
저거 눈치 보느라 마시고 싶은 거 참고 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걸 테지.
음, 기억해둬야겠군.
다른 의미로, 터놓지 않으면 철저하게 선을 긋는 부류라는 해석도 가능할 거고.
“자자! 빼지 말고 가자! 네가 바라는 데로 코가 삐뚤어지다 못해 뒤틀려 맛이 갈 때까지 마시게 해줄 테니까.”
“아니 정말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는데…에?!”
어깨동무로 잡혀가는 후배와 선배의 모습을 눈으로 배웅하며, 나는….
“음, 그냥 맨몸으로 가면 되겠지?”
괜한 걸 걱정하다 혹시나 싶어 화장실로 가 거울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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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는 어딘가 세상과 동떨어진 분위기였다.
내부가 대형 호텔의 연회장, 예식장 같은 걸 연상하게 한다면 여긴 넓으면서도 밤하늘이 펼쳐진 것과 더불어 자연경관까지 넓게 쫙 깔린 걸 보니… 뭐랄까.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런 정경을 떠올리게 된다고 할까.
실제로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과 마치 커튼과도 같은 오로라가 하늘의 중심 부근을 가르고 있는 모습은,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광경이긴 했다.
근데 저것들 전부 진짜인 건 아닐 텐데….
“어때요? 식사는 맛있게 했고요?”
“예, 팀장님 덕분에….”
“내 덕분은 무슨.”
선이 고운, 그러면서도 세련되게 느끼고야 마는 눈웃음, 입술로 호를 그리는 그녀.
한국어는 경어라는 표현이 따로 구체적으로 쓰이고 자시고 할 게 없는 게, 이를 표현하는 게 뉘앙스가 아니라 분명하게 구분돼 있다는 점이다.
반말이라 명확히 정의가 돼 있고, 존대어를 포함해 경어도 분명하게 규정돼 있다.
그러나 언어란 본뜻도 중요하나 말을 구사하는 상대의 태도며 반응, 말투며 뉘앙스도 무척 중요한데, 항상 상대를 배려하듯 경어를 쓰는 그녀는, 그럼에도 감출 수 없는 품격 같은 게 느껴지곤 했다.
그러기에 반말이 아니더라도, 존중하는 언어를 구사함에도 어째 아득히 윗사람이 아랫 사람을 배려하는 것 같은 기분을 실감하게 된다고 할까.
이는 곧 삶의 전반 자체가 그러한 품격을 갖추며 쌓아가고, 형성해 나가는 환경에 내몰렸기에, 자연적으로 태생적 품격으로 형성이 된 경우가 아닐까, 살짝 고민하게 된다.
물론 그런 환경에 노출되지 않았음에도 태생적으로 고귀해 보이는 이들이 있긴 했었다.
…이세계에서 뒹굴지 않았다면 잘 이해 못할 부분이기도 하겠지만, 잘난 부류들을 오죽 많이 봤어야지.
“앉으세요.”
눈으로 좌석을 가리킴에도 썩 어울리게만 느껴진다.
표정, 몸짓 하나하나가 정갈하고 정비된 탓에, 단순한 태도조차도 어딘가 정제된 듯한 기세를 풍겨대는 기분이라, 마음이 편하다면 한없이 편함에도 묘하게 의식하기 시작하면 자동적으로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가고야 만다.
테이블은 밝은 상아색을 띄고 있었다.
실내 휴게실, 라운지가 아니라 거의 야외, 칸막이며 투명한 창가고 뭣도 없는 근사한 스카이 라운지 라 불러도 좋을 법했다.
실제 위치도 무척 높아… 지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기도 했고.
그조차도 독점하다시피 자리한 넓은 공간인 덕에 이게 또 묘하게 분위기가 잡혀갔는데, 내부의 조명이 닿지 않기에 더욱 밝다고 느끼는 건, 그만큼 별빛과 오로라 탓이려나.
그럼에도 달이 안 보이는 건 조금 의외였다.
테이블 위에는 자그맣게 입을 심심하지 않게 해줄 스콘이 접시 위에 놓여 있었다.
접시가 새삼 넓었는데, 집어서 접시 위에 그려지듯 흘려진 잼이나 꿀 등을 곁들여 먹으라는 건가 싶기도 하고.
단순 장식이려나?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닌데, 아주 예전에 그런 개념 없이 소스 찍혀진 부근에 고기 조각을 찍어 문대는 것만으로 뭐라 한 소리 들었던 적이 있는 탓에, 괜스레 경계하게 된다.
‘이럴 땐….’
그냥 안 집어먹는 게 속 편하지.
“꽤 큰일을 치렀던데, 어때요, 컨디션은?”
“만전입니다.”
“휴식은 만족스러웠고요? 본격적인 근무는 이후 자택에 들러 휴식 취한 다음부터겠지만, 그 전까지만 마음 좀 놓고 지내보도록 해요.”
“오면서 철영 선배한테 듣기로, 골치 아픈 곳에 배치된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설마요.”
태연히 웃음 짓는 그녀.
“그저 허들이 높아진 정도인걸요.”
…그게 골치 아픈 곳이란 소리와 무슨 차이가 있는 거려나.
“출세해야죠.”
“…그냥 현상 유지만 해도 노후 준비는 잘 될 거 같아서요.”
어디 돈 쓰는 곳도 없고, 비싼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니.
말뚝 박는다는 전제로 수십 년 지나 적당 궤도로 승진했다 치면, 대략 은퇴할 때쯤엔 먹고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거 같기도 했고.
“세상일 모르는 거예요. 언제 큰돈이 필요할지, 직위며 명예 같은 게 필요할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
“그리고 준비가 되면, 비로소 기회가 생겨나는 법이죠. 이번처럼요.”
기회?
문득 그녀가 물었다.
“태민 씨, 혹시 결혼해서 어딘가에 정착하고픈 생각 따로 없으세요?”
“예?”
이건 또 무슨…?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그럴 리가.
“아직까지는… 크게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부서마다 다르긴 해도, 평균적으로 본사는 언제든 그 아바타를 내려놓거나, 문제가 생길 걸 가정해서, 되도록 결혼과 더불어 일정 구역에서의 정착에 대해 이런저런 반응을 내비친다.
애초에 정착을 목적으로 키우는 부서가 아예 따로 있기에, 그들이 아닌 한 대부분은 언제든 다른 아바타로 갈아탈 수 있다는 걸 가정하고서 그곳 세계에서 활동하기에, 그곳 세계의 이들과 엮여 서로가 피해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방비책이라는데… 예외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예외가 활동하는 이의 의도인지, 본사의 명으로 생겨난 예외인가에 따라 상황은 180도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확실한 건, 태민을 비롯해 이곳 부서에선 모두, 이에 대해 철저히 선을 그어두라며 최초에 관련 내용을 주입 당하는데, 하는 일이 아무래도 남녀 관계와 상당히 밀접하기에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요?”
윤 팀장님은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이해했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고 보니 태민 씨는 아직도 아바타 하나만 사용하면서 활동하고 계시죠?”
“예.”
“왜 그랬을 거 같나요?”
왜?
“그러게 말입니다.”
여태 에드릭이란 이름으로 굴러다니며 느낀 바는, 뒷배가 자신을 의도적으로 키운다는 느낌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는 점.
이게 파라메라 대륙으로 가서는 여기서 한몫, 한 자리 챙기게 하려는 의도였나 싶기도 한데, 실제로 가능만 했다면 그곳에 나라 하나를 건국할 수 있을 만한 밑바탕이 생기기까지 했으니… 그랬다 쳤을 때 이를 기반으로 무언가를 굴리려 했다고 치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을지도.
그러나 어쨌든 파라메라 대륙 쪽에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태민은 기회주의적인 마인드를 일체 내려놓고, 어느 의미로는 이권을 내려놓기까지 하며 그들에게 시간을 벌어줄 여력을, 대비할 여력을 남겨주었다.
물론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삽질하고 뻘짓하면, 그때는 그저 방관할 속셈이었다.
기회라는 게 매번 주어질 순 없는 법. 모름지기 자기 권리는 자기가 수호하고 만들어가는 거지, 그걸 남이 주고받아만 먹는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오히려 그들의 삶을 망가뜨리는 원흉이 될 터였다.
잡초가 자라날 환경에 온실 속 화초 다루듯 다룬다? 기질이 어떠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온실 속 화초는 죽어 나갈 수밖에.
“짐작은 했겠지만, 에드릭이란 캐릭터를 우리는 꽤 높은 위치에 정착 시키기 위해, 그 사전 작업을 펼쳤다고 보면 될 거예요.”
“높은 자리라 하심은…?”
“어디일 거 같나요?”
최초 에드릭이 상회에 소속돼 아르세이유에 갔을 때도, 한 나라의 높으신 분과 유명 상회의 높으신 분이 각 잡고 키워준다는 뉘앙스를 접한 예가 있었다.
그 외에도 대부분 알면서도 이를 모르는 체하며 마치 에드릭이 유명 가문 혹은 왕가의 후예가 세상일을 배우러 나왔다던가, 한편으론 그곳의 적통은 아니나 그쪽과 연관이 있어 전도유망하다던가….
그러한 밑바탕을 토대로 무수히 많은 귀족과 명사, 상인, 여러 인물들과 교우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는 걸 태민은 충실히 머릿속에 박아둔 지 오래기에, 이제야 본론이 나오는구나 싶어 조금은 기대가 되기도 했다.
“카일론 왕국이라고 아시나요?”
“예. 알그리타 대륙 내에 상당히 뿌리 깊은 왕국으로 유명하죠.”
여타 왕국들에 우리가 제국의 후예다 뭐다 하고 있을 때, 이들은 여전히 우린 천년 왕국이다! 하는 걸 세간에 떨치며 균형 잡힌 통치를 통해 오랫동안 안정적 통치를 이어간 가문으로 유명했다.
위기가 아예 없던 건 아니었지만, 외교적으로도 상당히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는 건 물론, 영토 또한 제법 넓으며, 군사 강국인 동시에 문화 강국으로도 무척 유명했다.
무엇보다 왕권이 여타 국가에 비해 강력한데, 당대엔 왕이 일찍 병마에 빠져들어 통치를 대행하고 있는 공주, 세간에는 패왕녀라 부르는 악몽과도 같은 권력자, 정통성이 차고 넘치는 혈통에 문무에 탁월한 수완, 다방면으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왕녀가 확고하게 왕, 다시 말해 훗날 여왕이 될 거란 전망이 확고하기에, 젊은 그녀에게 밀집되는 영향력은 이미 당대 왕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거기에 카일론 왕국의 현 국왕이 놀라울 정도로 검소하고 절제심이 강해 첩이 여럿 됨에도 자식은 오로지 그녀 하나라는, 거의 믿기 힘든 기적(?)을 일으킨 상태라 이에 대한 정통성은 더욱 확고하게 굳어가는 실정이기도 했다.
물론 왕의 혈통 내에선 이에 대해 못마땅한 태도를 보이는 이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패왕녀라고까지 불리는 그녀의 뛰어난 정치 수완 덕에 이조차도 별말 못하고 침묵하며 따를 수밖에 없다는 소식은, 그쪽 왕국의 귀족에게 이야기 듣듯 전해 들은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그곳의 패왕녀가 이번에 경선(競選)을 통해 자신의 남편을 들이겠다 하더군요.”
“예?”
“나는 태민 씨가 이쪽 경선에 참여해보는 건 어떨까 싶어서.”
묘하게 입꼬리를 슬쩍 들어 올린 그녀는.
“여왕의 부군이 될 수 있는 기회인데, 어때요?”
“그게….”
태민은 순간 판단이 되질 않아 뭐라 입을 열려다… 한 차례 더 생각한 다음 답하고자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당연하지만 이건 본사 제안이기도 해요. 카일론 왕국은 저희 영향력이 의외로 얼마 미치지 않은 곳이기도 해서, 이번 기회에 제대로 개입해 손을 쓰고자 하는 명목도 있거든요.”
“…그런데 아무나 그 경선에 참여하고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요?”
“조건만 맞으면 신분의 귀천은 따지지 않는답니다. 놀랍죠?”
…사실이다.
혈통의 중요성이 실적이며 부를 지닌 것보다 중요한 이 시대에, 그런 걸 따지지 않는다?
“생각 잘해보세요. 이런 기회가 흔한 게 아니니까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곧장 답을 내놓으라 독촉하지 않았기에, 생각해볼 시간은 충분히….
“휴가 다녀와서 생각한 걸 말해주세요. 투입되기 전에요.”
…일주일 정도면 뭐 차고 넘치지.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