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화 〉53. 카일론 왕국
“흐음.”
그럭저럭 머물며 멍 때리기 좋은 마차에 탑승한 에드릭은 책과 스마트폰 단말기를 번갈아 살펴 가며 공부 및 기반 지식을 섭렵하는데 한창이었다.
지금 가는 카일론 왕국이 뭐하는 곳인지를 알려면 그 왕국의 성립 배경을 파악하는 것만큼 좋은 게 또 있으리.
그러니 시작은 역사다.
민족이 같더라도 나라가 다르면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진다.
또한 그 국가가 처한 입지, 지리적 여건, 환경에 따라 관련 문화가 발생하는 바.
토양 상태가 별로며 날씨가 개판이며 영토가 넓으면 어쩔 수 없이 싸돌아다니게 되며, 토양이 꿀 짜 넣은 듯 양지바른 건 물론 기후도 적절하며 수자원을 얻기 용이하다면 마을이며 도시가 생겨나기 딱 좋을 거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카일론 왕국의 입지는 그다지 좋은 편이 못 됐다.
실제로 나라의 구성 자체를 보면 강대국을 피해 이주한 이들이 지역 토착민들과 엮여 연대를 이룬 부족 국가에서 시작했고, 그들이 뭉쳐 유력 가문들과 더불어 왕가가 중심이 돼 주변을 다스리는 형태가 되니, 이것이 오랜 기간 유지돼 현재에도 개국공신 가문들은 확고부동한 위치를 사수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본질은 중앙 집권제이기에 왕가의 힘은 막강하나, 왕가의 역할이 미흡하거나 그 위엄이 무너진 예도 아예 없진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던 배경 중 하나는 카일론 왕국은 건국 초기서부터 전쟁과 분쟁을 통해 성장한 배경이 있기 때문.
그로 인해 주변 소국들을 합류시키고, 자그마한 부족들도 예외 없이 합류시키다 보니, 다른 국가보다 민족주의적 성향, 단일 종족 우선주의가 타국에 비해 완화된 형편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카일론 왕국은 다종족이 어우러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가로 자리매김했지만, 그렇기에 인간 우선주의적 국가들 기준에선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이런 점을 잘 살려 카일론 왕국은 다른 종족과의 교류 또한 활발하게 이뤄왔으며, 이로 인해 인간의 장점과 타 종족들을 포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점들을 모두 지녔지만, 양쪽의 고질적인 단점마저 거저 짊어지게 됐다.
그나마 제국이 무너지고 엘프들이 유력 가문을 흡수하기 시작해 인간의 강세가 살짝 주춤했기에 망정이지, 제국 시절엔 제국과 빈번하게 맞붙은 게 바로 카일론 왕국.
그러기에 주변에서 제국의 후예라 자칭하는 부류들과 달리, 카일론 왕국은 여전히 제국 엿 먹으세요, 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혼란한 시국을 틈타 주변의 세력을 일부 흡수하여 영토를 넓히니, 어쨌든 제국의 후예라 자칭하는 것들과 더불어 대륙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유력 국가 중 하나로 발돋움하기에 이른다.
실질적으로 천년 왕국에 가장 어울리는 국가가 있다면, 알그리타 대륙 기준으론 카일론 왕국이 유일할 터.
다른 이들이야 천년 제국을 꿈꾸니, 헤게모니가 상충 되고 엇나갈 수밖에.
애초에 제국의 후예라는 것들은 인간 만만세, 나머진 모두 노예다! 주의라면, 카일론은 그냥 대륙에 자리한 모두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방식이니, 차이가 날 수밖에.
그러나 제국이 아닌 왕국의 기치를 드러낸 만큼, 대륙 전체를 지배하기보단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왕정 국가, 어디에도 침탈당할 일 없는, 강력하면서도 확고부동한 위치에 놓이고자 하는 게 바로 천년 왕국이란 대의명분의 기치라 할 수 있을 거다.
무엇보다 하나의 대륙,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대륙 위에 무수히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입장과 환경에 맞게 공존하는 것.
그게 곧 다양한 문명을 통해 서로가 가장 조화롭게 공존하는 비결이란 걸, 어째서인지 카일론 왕국은 이를 잘 아는 듯한 주장을 펼쳐대고 있었던 것.
이러니 제국 입장에선 짜증 날 수밖에.
반면 제국에 핍박당하던 이종족들이 카일론에 모여드는 건 예정조화.
어느 의미로 제국에 맞서기 위한 세력 형성을 위해 그런 기치를 세운 게 아니냐는 역사학자들의 주장도 잇따랐지만, 이건 왕국 건립 이후 얼마 안 돼 성립된 내용이었던 지라, 위기에 앞서 눈 가리고 아웅 하려는 식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그래서 이민족, 이종족 영역이 확실하게 구분된 거로군.”
각 종족들은 각자의 신앙관, 생활관이 있다.
그런 쪽으로 투철한 이들은 그런 영역에, 어울리고도 문제없는 이들은 공통 구역에.
장단점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이 때문에 각 영역에 따른 기질들이 확고하다 해서, 이 문제는 치안 문제로도 직결돼 일부 영역은 치안 상태가 대단히 안 좋다는… 사뭇 의외인 정보까지 파악하게 됐는데, 이건 각 영역을 관장하는 구역장이 작게는 그곳 구역의 대표로 역임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물론 그들을 규정하고 정하는 건 국가의 역할이나, 어느 정도 자율적으로 대표를 선출해 문제가 생기면 그 대표가 책임을 지는 형태라, 어느 정도 권리를 존중까지 해주는 입장이란다.
우리나라로 치면 구청장 정도?
언뜻 보면 민주적이게 보이지만, 이건 다른 의미로 그들의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거기에 선뜻 보면 중앙집권제 기준으론 영 아니게 보일 법도 싶었지만, 선출은 그들이 해도 이를 인정해주는 게 국가라는 걸 인지해야만 한다.
물론 이것도 눈 가리고 아웅 해버리면 엿 먹이는 거야 일도 아니지만, 그러기에 이들을 조련하려면 국가가 철저하게 눈을 불을 켜며 자신들에게 반하지 않으며,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이지 않은 부류를 선정해야 하니, 결국 이를 평가하고 책정하는 직책이 필요할 건데, 자칫 잘못하면 그 중간 녀석이 부정부패를 일삼는 개새끼라면, 나라 꼴 아주 잘 돌아가는 건 일도 아닐 터.
그리고 재미난 건, 그걸 정하는 이가 본래는 왕족이라는데, 심지어 직계 왕족만 가능하단다.
이 말은 뭐다?
왕족들의 지지 세력을 끌어모을 여건이 될 수 있단 점.
이로 인해 귀족과는 다른 의미로 왕족들은 그들을 이해해야 지지를 받고, 동시에 그들은 왕족을 구슬려야 인정을 받으니, 어느 의미론 적절한 듯 보일지도.
그런데 당대엔 무려 그 역할을 패왕녀라 불리는 공주가 전부 도맡고 있다 보니, 사실상 그쪽에 대한 권위는 무소불위라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저쪽 왕자가 인정 안 해주면 저리로 가서 인정 받으면 되지요!
이렇게 딜 해버리면 어쩔 수 없이 타협점을 갖출 수밖에 없는데, 허락받을 이가 한 사람이면 얄짤 없지. 오로지 그 대상의 눈에 드는 수밖에.
당연 이것은 귀족들에게 있어선 상당히 거슬리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봉건주의처럼 보여도 카일론 왕국은 반 봉건주의로 고유 영토를 헌납받는 건 맞으나, 결국 영토 내에 구역장들은 어쨌든 두 사람의 호응을 받아야 하니, 바로 직계 왕족과 영토의 주인.
본래 이것은 직계 왕족이 많을 때가 되어야 효력을 발휘해야 마땅한데, 그로 인한 패착으로 카일론 왕국은 몇 차례 홍역을 치르기에 이른다.
특히 당대 국왕은 무려 스물이 넘는 왕자와 공주들 간의 권력 투쟁에 승리한, 평화주의자이긴 해도 국왕이 되기 이전까지는 철왕이라 불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왕자.
어쨌든 승리 뒤 그는 왕좌를 차지해 상당 기간 내부 정비를 위해 귀족들과 대립의 칼을 내세운 형편이었고, 승리해 군왕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히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를 계승한 게 현재는 패왕녀라 불리는 알브레시아스.
본래는 왕자가 앞서 둘 있었으나 둘 모두 젊은 나이에 급사했기에 결국 패왕녀 홀로 남은 상황.
사실상 그녀가 사라지면 카일론 왕국은 다시 막장으로 향할 여지가 컸는데, 어쩌면 직계 혈족이 방계로까지 번져, 또 다른 권력 암투, 분쟁으로 연계될 조짐까지 생겨나고 있는 시점이었다.
“하나에 다 몰아주는 게 좋을 때도 있지만….”
알렉산드로스 같은 왕이라면 확실히.
그러나 그도 결국 후계자를 제대로 정하지 않고 가버려 결국 대혼란을 초래하지 않았는가.
왕족이란 자기 자신만 잘나선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건 후계자를 지목해 잘 키워내는 것.
사실상 당대 왕 못지않게 중요한 게 바로 후계자 문제였다는 점.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현재 20대 초반에 이른 패왕녀의 부군을 두는 문제를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했는지에 대해선, 말할 여지가 없을 거다.
애초에 여성의 경우 평균적으로 성인식을 치르는, 빠르면 10대 초, 늦어도 10대 중후반 이전에 결혼해 아이까지 보는 시대에서, 20대 초를 넘겼다는 거 자체로 얼마나 고민 고민 했는지에 대해선….
거기다.
“경선이라니.”
신분 고하 없이, 조건을 충족해 시험을 넘어선 이들에게만 기회를 준다라….
우선 조건만 봐도 입이 떡 벌어진다.
첫째, 인품이 훌륭할 것.
둘째, 학식이 풍부할 것.
셋째, 여왕의 부군으로서의 위치를 이해하고 있는가.
넷째, 자신을 내려놓고 헌신할 수 있는가.
다섯째, 부군이 될 시 권력을 탐하지 않으며, 오로지 여왕에게만 헌신할 수 있는가.
여섯째, 제 한 몸 지킬 만한 능력을 갖췄는가.
일곱째, 유년기, 청년기에 자신의 명성을 떨쳐 그에 준하는 업적을 이뤄냈는가.
여덟째, 사랑으로 본 여왕을 대할 수 있는가.
아홉째, 본 왕국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자인가.
마지막으로, 후손을 이어가는데 전혀 하자가 없음을 증명할 것.
“…….”
막연한 것도, 터무니없는 것도 있긴 하나, 이것들은 상당히 주관적으로 다뤄질 건 명확했다.
그 와중에 에드릭 자신은 무려 숲의 현자라는 이에게 추천을 받았다는데, 이 숲의 현자는 엘프와 인간의 혼혈로, 카일론 왕국 내에서 상당한 발언권이 있는, 유명한 현자란다.
그 얼굴도 못 본 이가 왜 자신을 추천했는지… 에드릭으로선 알 도리가 없지만 어쨌든 카일론 왕국 영토에 들어서면 필시 만나보아야 할 인물 중 하나로 이미 점찍어 놓은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