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화 〉53. 카일론 왕국(2)
자유 무역 도시, 아르세이유에서 카일론 왕국 국경지대까지는 쉬지 않고 말로 달린다 치면 일주일이면 충분.
그러나 그건 쉬지 않고 말을 계속 갈아타며 간다는 전제.
그러기에 수행원을 이끌고 마차를 타고 간다 치면 열흘은 금세 넘길 수밖에.
수행원을 이끌고 향하는 그 쇼맨십조차 점수를 따내는 방식이기에 에드릭도 구태여 서두르진 않았다.
솔직히 귀족이며 왕후장상 마냥 이런 거 따지는 게 썩 좋진 않았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에 법을 따라야지.
무엇보다 지배자 계층은 예로부터 이러한 쇼맨십을 통해 나는 너희와 다르다, 나는 고귀해! 잘 났어! 하는 걸 드러냄으로써 권위와 경외를 사들이는, 매우 피곤한 족속들이기도 했고.
그러한 선망과 경외가 그들로 하여금 지배력으로서 자리매김하는 거니, 싫어도 이럴 수밖에.
민주주의 시대조차도 이런 의전을 보며 경건함과 경외를 느끼는 판국인데 오죽할까.
물론 시대가 시대인 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미디어로 언제든 잘난 부류들이 깽판 치고 헛짓하는 걸 정보로 잘 접하니, 그가 아무리 겉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해도 머저리는 머저리라는 걸 금세 알게 되니, 경외고 나발이고 없지만.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아래쪽에 자리한 열도가 그쪽으론 훨씬 확고하다고 할까.
우리나라도 세습하듯 자리를 물려받는 예가 종교계며 정치계에 아예 없다 할 순 없지만, 이건 큰 파문과 문제, 갈등을 야기한다. 물론 잘 풀리면 플러스알파로 작용하지만.
여기서 재벌은 예외라 치고.
세금만 잘 내고 도덕성에 하자만 없다면야, 사실 누가 승계하건 평범한 이들 기준에선 크게 관심 없는 것도 사실이니.
반면 열도 쪽은 세습을 거의 당연하게 여기는 관례라는 게 있다.
물론 그쪽 여건을 복잡하게 살펴보면 그럴듯하다 여길 순 있지만, 우리 기준에선 코웃음 칠 일.
왕이란 이름이 독재자로 바뀌어 독재자가 자식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거나, 그걸 물려받은 예는 마찬가지로 세계 기준으로도 결코 적지 않기도 하고.
한편, 국민들 입장에서야 배만 불려주고, 잘 살게만 해주며 입신양명, 출세 기회만 잘 내어주면 나라님이 사실 뭐가 중요할까. 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데, 싱가포르가 독재해도 뭐라 안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문제는 그런 국가가 많지 않다는 거며, 독재자들 대부분은 자기 배를 불리기 바쁘니, 서민들 입장에선 아무리 좋게 봐주고 싶어도 좋게 볼 수가 없단 말이지.
당연 그 나라 안에서도 이런저런 부조리는 있겠지만… 그런 거 신경 쓰기 전에 우리집 내부 일이나 신경 써야 하는 게 현실이기도 하고.
때문에 델포이 신전+소크라테스 왈, 너 자신을 알라! 가 중요해질 수밖에. 남에 집 사정 구경해서 그걸 반면교사, 혹은 벤치마킹 할 게 아니라면, 괜한 신경 분산 말고 자기 일에나 신경 써야지.
애초에 부모가 자기 자식 잘 되라며 배려해주고 뒤를 받쳐주려는 건, 생태계에선 너무나도 당연한 흐름이다.
그리고 그런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당연 경쟁에서 밀리니 그들을 내버려 둘 수 없는 입장이고.
실력이 압도적이면 이런 분쟁조차 가뿐하게 해소할 테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니.
그런 이들이 다수라면 더더욱.
왜 부정 채용 및 기타 부정적으로 이권을 챙기는 이들에게 반발하는가.
그러나 한편으론 자신이 꿀을 빠는 입장에 놓이면, 그건 또 왜 지키려 들고?
그러기에 그걸 포기하고, 그러지 않은 이들을 우린 존중하고 존경을 표하는 거다.
물론 여기서, 잘난 게 마음에 안 들어 대뜸 물어뜯고 할퀴고 비방하고 어쩌고 하는 건, 또 별개지만.
결국 이러한 문제는 넓게 보면 개인에서 가정, 가정에서 사회, 사회에서 국가, 국가에서 민족으로까지 확대되고 확장되는데, 이런 분쟁과 갈등이 심해져 피가 튀기 시작하면, 히틀러가 유대인을 모조리 척살해 지구상에 지워버리겠다는 공약을 내세워가며 윗선에 당선되는 식의, 극단적 사태로까지 이어진다.
이렇듯 우리 세계의 과거는 그렇다 쳐도, 이곳 세계는 그럼?
하물며 사람만 있어도 이 모양인데, 이곳 세계처럼 다민족, 종족이 엮여있다면?
아마 언젠간 이들도 이러한 분쟁에 휘말리고 노출되게 될 거다.
그리고 역사는, 그 시점에 이르면 카일론이란 왕국을 과연 어떻게 해석하려나?
잘 흘러갔을시, 고대 국가는 그 민족, 종족들의 자부심이자 우상, 상징으로서 자리매김할 터.
서양이 그리스에 자부심을 느끼듯 말이다.
…사실 까놓고 분석해보면, 그리스가 여러모로 개판인 건 둘째치고.
“이런 거 일일이 따져봤자 달라질 것도 없고.”
미래를 안다는 게 항상 좋은 건 아니다.
아니, 변수가 이렇게 다양한 판에 미래 지식을 안다는 건 오히려 맹독으로 작용할 여지가 큰데, 막연한 편견과 고정관념이 언제 어느 때 작동할지 알 수가 없으니 사고방식이나, 예측 등이 크게 어긋날 여지가 있다는 거고, 이는 판단 오류를 일으킬 수 있는데, 자리가 높아질수록 판단 하나 어긋나면 이게 아주 크게 작용하고야 만다.
특히, 본의 아니지만 왕족하고 엮이게 될 이 시점에 그러한 안이함은 목에 칼을 들이미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으니… 새삼 주의할 수밖에.
“후우!”
그러나 아무리 내부에서 공부하고 어쩐다 쳐도, 역시 마차 안에서 갑갑하게 덜커덩대는 공간 속에 방치돼있는 건 여러모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
요즘 시대 사람 기준으론 왕후장상들이 누릴 법한 호사지만, 솔직히 국산 싸구려 승용차 안에서 평범한 아스팔트 달리는 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
일단 마차 공간이 넓어서 좋긴 한데, 조금 거칠게 달리면 마차 내부에서 이리저리 굴러도 시원치 않을 정도의 공간이긴 했다. 그렇다고 안전 벨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이럴 줄 알았으면 누구라도 대동할 걸 그랬나.
떠나기 전, 주변인들에게 이에 대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설명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반발들이 상당했는데, 한편으론 납득한다는 듯 반응들을 보인 것들도 조금은 의아하긴 했었다.
알리샤며 에우리에 누님들의 경우, 애초에 내가 귀한 혈통이라는 걸 막연하게 이해하고 있는 형편이었고, 테티아나의 경우엔 좋은 인연으로서 잘 되면 자신들하고의 관계도 더욱 좋게, 원활하게 풀어가고자 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 외에 다프넬이며 다른 애인(?)이라 할 법한 여성들은 의외로 엉기기도 하고, 느닷없는 프로포즈를 신청하기도 했지만… 에드릭은 솔직하게 상황이 어찌 될지는 모르나, 어찌어찌 엮여 가봐야 한다는 식으로 언급해 상황을 흘려 넘겼다.
애초에 진지하게 사귄다는 개념이 아니었기에 그나마 망정이었지, 그게 아니었으면 여러모로 문제가 될 뻔도 했지만….
“결혼할 생각 꿈도 꾸지 말라는 본사 규정이 빛을 본 거긴 한 건데….”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하고….
어쨌든 그런 식으로 마차로 이동해 기어코 카일론 왕국 국경을 지나 왕국 내부로 들어서서, 카일론 왕국의 왕도인 카젠드라에 당도하기까지 다시, 며칠을 마차 안에서 본의 아닌 공부며 사전 정보 취득을 위해 부득이하게 눈과 뇌를 혹사 시켜야만 했다.
…사실 본의 아닌 격리 상태였기에 이게 제일 골치였지만.
골방에 틀어박혀 지낸 세월도 꽤 길었는데, 역시 컴퓨터 앞이 아니니 이게 참 죽을 맛이다.
그래도 도착했다는 거 자체로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탓인지, 왕도에 도착한 시점엔 이곳 왕국에 대한 기본적인 역사 지식, 상식 등은 고스란히 머릿속에 담아둘 수 있었다.
…학생 때 이렇게 공부했으면 전교권에 들었을 텐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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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자네들! 어딜 향하는 겐가?!”
경장갑을 걸친 병사 두셋이 남녀를 향해 달려오며 외쳤다.
“무슨 일이신지요?”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어린 외양을 지닌 엘프 소녀 또한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겉만 보면 훤칠한 청년. 그러나 앳된 기색이 다분해 보이는 키 큰 소년이 자기 엉덩이에 간신히 미치는 어린 소녀를 골목 안쪽으로 데려가고 있는 모양새였는데… 아무래도 오해를 산 듯 싶어 보였다.
서로 손을 붙들고 몸을 기대고 있는 게, 상당히 친근해 보였기에.
“아무리 정도가 없다 해도 그렇지! 백주대낮에! 그보다 그 전에! 자네 나이가 몇이지? 그녀하고 대체 어딜 가려 했던 건가?!”
으쓱한 골목에 들어서려던 찰나 발견된 걸 보면 운이 없었던 모양.
이때 소년이 당당히 대답했다.
“아, 오해입니다! 제 여자 친구는 무려 500살입니다!”
“여자 친구? 그보다 자네 나이는?”
살짝 망설이던 소년이 조금 위축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열여, 여섯?”
“사실인가? 거짓말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 텐데?”
밝히기로는 딱 성년식을 치른 직후의 나이.
“죄, 죄송합니다. 실은 열다섯입니다.”
오, 열다섯.
근데 겉만 보면 스무 살 청년이라 해도 의심하기 어려워 보이는데?
그런데 그 말을 듣기 무섭게 한 병사가 덥석, 엘프 소녀의 손목을 확 붙잡아 낚아채는 게 아닌가.
잉?
“자네, 뭐 하는 건가?! 어서 도망치지 않고!”
“예?”
“무슨 짓이에요! 놔요!”
엘프 소녀가 난감한 표정으로 저항하는 가운데, 소년은 이 사태가 이해되지 않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엘프 노파! 저번만 해도 성인식도 안 치른 미성년 추행한다고 난리도 아니었네! 나이도 무려 300살을 속여 먹어?! 아니,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여자가 이게 뭔 추태인가?! 그보다 자네! 정말 성년식 치른 게 맞는지 확인해볼까?! 이 노파가 작업 걸은 걸 보면 절대 아닐 텐데?! 그리고! 이보세요! 증손주도 있는 여자가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추태입니까?!”
이에 여태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여 엘프 꼬맹이(겉만 보면)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성가신 표정으로 혀를 차며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내가 인간 아이 좋아서 함께 놀겠다는데 너희가 왜 참견이야?!”
허.
적반하장도 유분수랄까.
어처구니없는 표정의 병사들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프도 아니고! 순혈의 엘프라면 정조를 지키고 그러면 어디가 덧나기라도 하나?!
아니, 하프니 순혈이니 그런 걸 떠나! 왜 애들을 건드려! 국법에 명백하게 성년식 치르지 않은 아이들은 건들지 말라 명확히 명시가 돼 있는데! 살 만큼 살았으면 다 알 거 아니오?!”
그러자.
“사랑에 국경이며 종족이며 나이 고하가 뭔 상관이야! 내가 내 또래처럼 보이는 남자아이 좋아하겠다는데! 나도 인마! 순정이 있어 이 겉늙은 인간 나부랭이들아! 어떤 빌어먹을 법이 사랑을 규제해?! 그건 악법이야! 악법!”
“저번 달에 당신한테 겁탈당한 오크 사내아이는 공포에 질려 발정기에조차 물건이 서지 않고 있어! 얼마나 쥐어짜면 사내아이가 발정조차 자제한 채 공포를 느꼈겠나?! 좋게좋게 대하려 해줬더니 이 무슨 염치 없는…!”
“오크잖아! 엄살 피우지 말라 그래! 해봤자 15번도 안 짜냈는데! 어딜 엄살은!”
…………하.
본의 아니게 전말을 알게 되니 황당함에 순간 이쪽 말문만 막혀버렸다.
………….
“흔한 광경입니다.”
안내인으로 배정된 사내, 오수스가 히죽 웃으며 그리 말했다.
“아, 네….”
갑갑함을 참지 못해 마차에 내려 주변을 걷는 와중에 발생한 이벤트(?)
이에 대해 안내인 차원에서 에드릭이 왕도 인근에 도착하기 무섭게 마중 나온 사내가 에드릭에게 상황을 설명해줬다.
의외로 왕성에서 파견된 거 치곤 경박한 듯 보이나, 새삼 에드릭을 배려한 듯 신분이라던가 품행에 대해선 전혀 거리낌이 없어 보여 의외로 금세 말을 틀 수 있었다.
근데 그건 그거고, 에드릭은 심히 당황스러웠다.
아니, 뭐지 이건?
“다종족이 한데 엮여 산다는 건 이런 거죠.”
“아니, 그런데 외모만 보면 큰 차이도 없는데, 남녀 관계까지 병사들이나 치안대가 개입하는 건 조금 어떨지….”
“외모가 그렇다 뿐, 나이가 상당하지 않습니까? 경험이 다른데 함께 엮이면 이게 가벼운 관계는 그렇다 쳐도 깊은 관계로 발전할 땐 문제 되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거든요. 제법 연애에 대핸 자유로우나, 몸을 섞는 단계에선 나름 보수적인 게 저희 카일론이랍니다.
아, 그렇다고 오해는 마시기를. 이 모두 성년식을 치르지 않은 아이들 한정된 이야기입니다. 카일론 왕국 내에선 성년식을 치르지 않은 미성년에 한에선 예나 지금이나 제법 까다로우니까요. 어린 나이에 기술을 갈고 닦고 익히며 순수성을 유지해야 커서도 바람직해진다 했던가요?
거기다 너무 어린 시절에 남녀 관계를 배우면, 자기 일에 소홀해지고 그쪽에만 빠지면 이건 이것대로 바람직하지 못하니 말이지요.
그러니 성인식 치르기 전까지는 필수적으로 부모나 선생의 주관하에 성교육을 배워 관계를 배우고, 성년에 이른 다음에야 자유롭게 이를 누릴 수 있는, 그런 거지요.”
“그렇게 발전하게 된 연유가 따로 있는지요?”
“과거에 앞꼬리 잘못 놀려 왕가를 개판 만든 왕족과, 유명 귀족 혈통이 이런 문제로 한창 시끌벅적한 사태를 발생 시킨 적이 있어서 말이지요. 그거 외에도 이 문제로 왕국 내에서 성문화가 문란해지자, 왕족서부터 철저하게 손수 모범을 보이기 시작한 덕이죠. 당연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모든 걸 누릴 왕족이 앞서 금욕의 자세를 보이니, 아랫것들이 어쩌겠습니까? 따라야지요.”
허허.
“쉽지 않았을 텐데요.”
“물론입니다. 그렇다고 극형을 처할 수도 없으니, 아주 제대로 망신을 주는 식으로 진행됐죠. 체면이 중요한 귀족들이며 왕족들은 체면 때문에라도 감추거나 은닉하는데, 들통나면 이게 오죽 개망신이여야죠. 왕위 쟁탈전에서조차 괄시당하고 뒷선에 물러날 정도이니, 알아서들 자제하게 된 거고… 사실상 그런 문화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당대 철왕께옵서 자식을 적게 낳는 원인 중 하나로까지 대두돼서… 내심 이런 규율을 이젠 조금 완화해야 하지 않나, 그런 이야기도 돌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고는 슬쩍 에드릭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더니.
“무엇보다 현시대에 엘프들의 기세가 워낙 막강하니까요.”
“아하….”
대충 납득했다.
“그게 이번 경선과도 연관이 있겠군요?”
“그렇지요.”
사내는 쉽사리 긍정의 태도를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