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53. 카일론 왕국(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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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귀족이나 왕후장상의 화려함을 살짝 선망하던 시기가 있긴 했다.
당연 이쪽 세계를 잘 모르고, 막연히 그런 거에 눈길이며 관심이 끌렸던 건데, 누구나 화려하고 아름답고… 아무튼 인간 본성이 어떤 의미로 저급해지는 광경이기도 하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연회며 사교회, 어쨌든 파티라는 이름을 달고 다니는 것들에 대해선 다분 회의적인 시선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본래 세계, 현대 사회에서도 누구든 나 잘났음을 과시하기 위해 푼돈이 아닌 거액을 내던지는 이들은 허다하고, 이런 걸 주최하는 이들은 사실상 그런 능력과 재력, 많은 이들을 섭외, 초대할 수 있다는 여력을 내세우기 위한, 일종에 과시 같은 건데… 문제는 이것들한테 지위, 능력, 돈… 이런 것들이 몰빵 돼 있다는 점이다.
나라가 말아먹더라도 중앙 집권 체계, 특히 서양의 삐리리 것들은 화려한 파티며 연회를 거둘 수 없다 하는데, 이건 체계가 망가진 건지, 체면치레에 목숨을 거는 건지 뭔지는….
그러나 이걸 개인이 주최하느냐, 나라에서 주최하느냐가 또 다른데, 어쨌든 이번 연회는 꽤 많은 의미를 담고 펼쳐지는 거라 규모도 상상을 초월했다.
‘어지간한 나라에선 다 보냈네.’
미리 사전에 보고 받기로도 이번 경선은 꽤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하기에, 당연 후보자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이름을 알릴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인지, 심지어 어중이떠중이들까지 몰려든 상황.
그리고 그런 곳에서.
태연하게 술잔을 나르는 시종 마냥 정장으로 몸을 치장해 싸돌아다니고 있자니, 조금은 편해진 것 같기도 하고.
애초에 에드릭이란 존재는 아르세이유에선 꽤 유명하나 반대로 타 국가에선 그다지 유명할 이유가 없고, 원래 사람이란 게 관심을 구체적으로 가지지 않으면 인터넷 매체가 발달한 정보화 시대조차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간혹 문제 터져 나오는 유튜브 스타들 가운데 10만, 몇십만 구독자 있는 이도 어째 문제가 터진 다음에나 알게 되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그게 누군데? 응? 나도 몰라! 관심 없어!
인간 말고도 다양한 종족들, 여러 군상들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움직이는 척하며 태연히 주변을 살필 수 있으니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달까.
애초에 살짝 억지성이 있긴 했는데, 의외로 오수스는 상관없다며 순순히 도움을 줬다.
체면이 인생의 전부라 생각하는 부류들이라면 시종인 척하는 것조차 괴짜 짓이 아니라 자존심을 구기는, 버러지 같은 짓이라 생각할 테지만, 내 알 바인가.
그리고 이건 들통 나는 시점에 잘 났다고 자처하는 고위 귀족 출신, 피가 특별하다는 착각에 내몰리는 이상한 놈들한텐 대놓고 안 좋은 시선, 심하면 적대적인 반응마저 생겨날 여지가 있는 법.
‘자격이 있어야지! 자격도 없는데 감히….’
라는 마인드인데, 그래서 생각은 단순하지만 문제는 이것들은 대부분 잘난 집에서 살아왔기에 영향력이 상당히 매서웠다.
근데….
어차피 그런 애들하고 어울리기엔 옛적에 글렀으니, 그딴 건 내버려둔다 치고.
“고마워요.”
물론 모두가 잘났다고 매너를 안드로메다로 전출 보내버렸다던가, 개념을 개밥그릇에다 얹어준 이들만 있는 게 아니기에, 그런 사람들 찾는 재미도 쏠쏠하기도 했고.
“잘 생겼네? 나중에 나하고 어디 좋은 곳 안 갈래?”
“후후, 감사한 말씀. 하나 지금은 모두를 대접하는데 힘 쓰고 싶군요. 부족한 점이 있으면 말씀 주시기를.”
“튕기는 거니? 귀엽기는….”
그리고 적당히 나이 먹은 부인분들이 묘한 눈초리로 자꾸 쳐다보다 말을 걸어대는 경우도 허다해서, 이건 이것대로….
물론 젊은 여성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영광스럽게 생각해라!”
“예예.”
“그 태도는 무엇이더냐?”
이런 진상들도 여럿 있었지만, 묘하게 빠른 움직임으로 스르륵 스쳐 지나가 버리니, 차마 소리를 못 지르겠고 해서 난감한 눈초리를 보내대는 이들도 여럿.
아무튼 그런 식으로 시간을 적당적당 끌고 있자….
‘아, 귀찮네.’
갑자기 기분이 팍 식었다.
일부 시종들에겐 눈도장 찍어뒀기에 아주 뻘짓하지 않는 한 별달리 터치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괜한 짓하면 눈에 튈 테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왔다리 갔다리….
그러고 있자 카일론 왕국의 개국공신 가문 귀족들이 들어서고, 당연 들어설 때마다 누구누구 어쩌구 하고 소개가 뒤따랐지만… 관심없다.
‘아직 패왕녀 부군도 아닌데 귀찮게 뭘 외워.’
나 그 정도로 암기력 좋은 인간도 아니데. 내가 표토르 대제도 아니고. 한 번 보고 들은 인간 나중까지 기억할 정도로 머리가 비상했다면, 본사에도 입성 못했을지 모르니 그게 썩 아쉽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한참이 지나자, 이어 철왕이라 불리는 현 카일론 국왕께서 입장해 주변을 어쩌구 저쩌구.
뭐 일대 이벤트긴 하지만 솔직히 내심으로 기대가 안 갔기에 무덤덤하기 이를데 없었다.
왕후장상에 대한 환상은 옛적에 사라졌고, 그 맥락으로 보면 밀리엄 대공의 따님인 멜레니아 쪽하고 이미 이쪽은 속궁합을 맞춰본 사람이다. 그녀도 따지고 보면 여느 왕후장상 못지않게 걸출한 핏줄이 아닌가. 아, 생각해보니 에드릭도 알게 모르게 그런 쪽이 아닐까 하고 소문이 나곤 있는데… 솔직히 그러거나 말거나.
‘너무 시니컬한 거 아닌가.’
역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나 보다.
반쯤은 실패해 빨리 아르세이유나 다른 곳으로 돌아오면 좋겠다 하는 생각도 있겠다, 초조함을 억누른 채 넋 좀 놓고 있으려는데….
어째 이번 연회의 주인공인 패왕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단 점이다.
‘아니지.’
어쩌면 있는데 못 찾고 있는지도?
굳이?
온갖 잡다한 생각이 떠올랐지만, 연회는 그런 식으로 분주하게 흘러갔고, 이어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했는지, 이번 경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솔직히 귀에 잘 들어오진 않았다.
이곳 연회에 참석한 이들이 경쟁자며 누구인지에 대해선 딱히 소개할 수가 없는 게, 인원이 너무 많다 했던가?
그러나 경선에 대한 탈락, 이에 대해 통보할 거라며, 첫 번째 시험 전 최초 부응 조건에 충족하냐 마냐에 따라 참석 여부를 결정한단다.
…아, 네. 그러세요.
원래 이런 곳 오면 눈에 띄는 미인이나, 안면을 익히고 사귀어둬서 손해 볼 거 없는 이들과 진작 안면 트고 말문마저 턴 상태로 서로 하하호호 하고 있었겠지만… 묘하게 그러기가 싫었다.
‘어쨌든 이걸로 날 경쟁자로 보는 멍청한 것들은 없겠지?’
있다면 그건 다른 의미로 정보 출처들이 있는 부류들일 테고.
그렇게 반쯤 안심하고 있던 찰나.
“카일론의 유일 적녀! 유일무이한 적통! 그 위엄을 널리 떨친 지고한….”
보통 내부 진입 전 저런 식으로 소개를 해준 다음 스포트라이트 받듯 입장하는 게 보통인데, 그녀는 아니었다.
아직도 내부를 향해 그녀의 이명이며 위엄에 대한 여러 이명, 별칭 등의 미사여구가 달라붙은 걸 마구 불러대는 판국임에도, 그녀는 아주 거침없이 내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우선 노출도가 거의 없는 풀 플레이트 갑옷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렇다 해도 제법 날렵해 보이는 갑옷이었는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상은 가까이서 보면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규모가 상당했다.
무엇보다 갑주 자체가 흑빛을 띄고 있던 터라 훨씬 더 위험천만하게 느껴진다고 할까.
기선 제압 차원에서 저런 복장을 차려 입은 거라면 이건 확실히 성공했다 봐도 무방할 거다.
실제로 내부 분위기가 단번에 얼어붙었으니까.
투구엔 뿔이 2개, 어깨 양 주위에 검붉은 휘장이 내걸려 바닥에 질질 끌려대고 있었는데, 외부서부터 그 복장 그대로 당도한 건지, 휘장 아랫단이 어지럽혀져 있어, 일부 고귀하며 청결하다 자처하는 이들은 그 광경에 본능적으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허리춤에 내걸린 게 무척 흉악했다.
기다란 검들이 양 허리춤에 각각 하나씩.
단도 단검들이 양 허벅지에 달린 것도 신기한데,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등에 내걸린 직사각형 형태의 방패였다.
이걸 굳이 풀 무장하고 내부로 들어선 이유는 과연….
소문으로 그녀는 말 위에서 거대한 창, 채찍 등을 휘두르고, 말에서 내릴 시엔 할버드와 같은 중장병기를 휘두른다는데, 그것만 생각해보면 근육이 우락부락한 걸 연상하기 쉬우나, 어쨌든 패왕녀는 세간에선 좀처럼 모습을 내비치지 않기로 유명하기에 사실 본 모습이 어떠한지에 대해선 여러 소문들이 맴돌곤 했다.
물론 목격한 이들은 입을 모아 절세 미녀다 뭐다 하지만, 과장된 건지 어떤지는 솔직히 직접 보지 않는 한 누가 알리.
패왕녀가 앞서 다른 귀족들 싸그리 다 무시하고 우선 왕에게 가 무릎 꿇고 예를 표하는 걸로 왕의 권위와 체면을 지켜준 건 덤.
그 뒤에야 일부 개국공신 가문의 유력 인사들과 갑옷에 투구를 눌러쓴 채로 간단 인사를 나누는 모습까지.
파격적인 등장이야 그러려니 할 수 있는 게, 본래 주인공은 가장 마지막에 등장해야 그만큼 임펙트가 큰 법. 알고 저런 거라면 정치적 수완도 상당하다는 건데… 아니, 상당할 수밖에 없는 건가?
애초에 패(覇) 자가 달라붙은 이명을 받는다는 거 자체가 어지간히 비범하지 않은 한 무리긴 하지.
이윽고 그녀를 대신해 누군가가 그녀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이어갔지만… 사실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아 그러려니 했다.
다만 그녀가 아무런 맥락 없이 갑작스레 투구를 벗어들어 얼굴을 공개하자 많은 이들의 이목이 집중된 건 물론, 동시에 감탄사가 연발했는데, 뒤늦게 그쪽으로 시선을 준 에드릭도… 놀라긴 매한가지.
‘와….’
흑발을 연상하게 하는 짙은 남색 바탕의 머리색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옆면을 봐서 그런 점도 있고.
자신이 무장한 갑옷과 매우 유사한 색감.
그리고 드러난 이목구비는 의외로 대단히… 뭐랄까. 저런 일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무엇보다 칠흑같이 어두운 검은 눈, 동공이 무척이나… 기이했다고 할까.
철왕의 머리 색은 백발. 스트레스가 오죽 강했는지 하얗게 샜는데, 이건 저쪽보다 어머니인 왕후 쪽 핏줄이 훨씬 강해서 그런 거였는지도.
그런데도 분위기가 참 특이했다.
우수에 젖은 듯, 무언가 시선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분위기 덕에 무심코 계속, 줄곧 바라보게 된다.
이게 에드릭 자신만의 착각이 아닌지, 주변 모두가 어느덧 관심을 끊고 그녀를 지켜보기만 하니.
“환영한다. 본인이 바로 카일론의 알브레시아스 칼 에스클리오네다.”
그런 그녀가, 의외로 작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로 앞서 연회장에 자리한 모든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기에, 그 누구도 그 현상에 위화감을 느낄 수조차 없이, 상황은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중심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