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54. 패왕녀.(2)
이렇게 띄워주면 보통 입가가 풀려야 마땅한데, 이건 파라메라 대륙에서 이미 질리도록 받아본 대우기에, 사실상 무덤덤한 에드릭이었다.
그리고 저런 게 사내들의 질투를 유발한다는 걸, 저 녀석을 알까 모르겠네, 하며… 청년 바리우스는 입가를 늘어뜨렸다.
감정 처리가 뛰어난 건지, 천성이 저런 건지… 에드릭은 어린 시절은 지금에 와선 더더욱 조명 받고 있는 형편이었다.
아르세이유에서 그는 귀족 아닌 이 중 단언컨대 최고 유명인 중 하나였고, 그런데도 오만하지 않으며 일정한 태도를 유지하곤 해왔다.
의외로 귀족 가문 사람들이 그의 진면목을 더욱 잘 알아보았으며, 그를 만나본 왕족들도 극찬을 아끼지 않은 내용이 그러한 처세법들이었는데.
에드릭은 결코 적을 만드는 무례한 발언을 입 밖에 낸다던가,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 어투를 사용하곤 했다.
게다가 그를 질투하는 이조차 친구가 되려 성의를 보이는 입장이었고.
그는 자신 또래며 젊은 남성 귀족들, 그리고 관계가 진전되지 않은 귀족 가문의 여식들 사이에선 의외로 배척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대부분 매번 에드릭처럼 못 하냐? 저 코넬 경은 너희 나이 때 어쩌고저쩌고! 뒷배가 있겠다 쳐도 너희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저렇게 할 수 있었겠느냐?! 그는 대단히 뛰어난 인재니 친분을 다져라! 반드시 붙들어라! 하는 식의 강요, 속칭 엄마 친구 아들 식으로 비교를 당해왔기에, 좋아할 수가 없기도 했는데, 그래도 일부는 막연한 시기심을 접고 그와 친분을 다졌고, 그로 인한 혜택을 누렸기에 결과적으로 배척하며 열등감에 휘말린 이들만 손해를 볼 수밖에.
…그런데 백화점이며 여타 수완의 기틀은 사실 본사의 뒷배가 있었고, 에드릭이 어른스러우며 처세술이 뛰어난 건 배운 것도 있지만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런 점도 있었으나, 그걸 남들이 알 리가 있나.
물론 나이 여럿 처먹는다고 항상 사람이 성숙해지는 건 아니니, 그런 면으로 보면 에드릭은 잘 대처하고 있는 건 확실했다.
…오히려 돌다리도 다시 두드리듯 노심조차 해하는 걸, 그의 선배 된 이나 후배가 한소리 할 정도였지만, 결과가 나쁘진 않았으니 그러려니 하고 있는 형편.
어쨌든.
그러한 총체적 평가는 이미 그가 경선에 참가하겠다고 밝힌 시점에 카일론 측에 정리돼 참고 자료로서 보내졌을 거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치 이 상황을 예견한 것처럼 과거가 설계됐단 말이지.’
이건 비단 카일론 측의 짐작이 아닌, 에드릭 스스로도 그리 느끼고 있는 실정이기도 했다.
물론 경선 말고, 그가 어느 영지를 받아 영지의 주인이 됐다 해도 별 위화감은 없었을 거다.
거기다 그가 파라메라 대륙에선 무수한 야만인(?)들의 수장으로서 왕이 될 수 있었음에도 이를 탐하지 않았고, 오히려 토착 종족들을 위해 과도한 선의, 선행(?)을 베풀었다는 식으로 퍼져나가 일부는 미담으로, 일부는 대의명분을 위해 실리를 져버린 악덕(…)을 저지른 이로 퍼져나가, 권위주의적이며 추진력이 강하고, 욕심이 과도한 이들 기준으론 호구… 혹은 상당히 무시무시한(??) 존재로 각광을 받게 됐단 점이다.
아르세이유에 있을 당시야 대륙 기준으론 크게 유명하지 않았으나 현재는 확실히, 에드릭은 반쯤 유명세를 타게 됐다.
그리고 이는, 본사의 입김이 어느 정도 가미된 영향력을 결코 부인할 순 없을 거다.
“카일론이란 나라도 이번 경선을 통해 이득을 극대화한다 치면, 어느 쪽과 연을 맺는 게 가장 좋다는 건 안 봐도 훤하니 말이죠.”
소녀, 엘핀네스가 청년을 거들어 은연중 에드릭 찬사에 한 손 거들었다.
“에드릭 님은 다종족과의 관계 형성에도 평판이 대단히 좋으며, 무엇보다 현 대륙의 대세 종족인 엘프에겐 무려, 후사를 이어도 된다는 확증까지 받지 않았습니까? 엘프뿐 아니라 대부분 종족과도 연이 깊고, 그렇다고 인간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크게 엇나가는 점이 없으니, 카일론 입장에서도 에드릭 님을 받아들인다 쳐서 손해를 볼 문제는 없을 테니까요.”
인간 제외, 다종족에게 적대적인 이가 패왕녀의 부군이 된다면 자연적으로 여타 종족들과의 관계가 일부 소원해지고, 얼어붙는 건 도리가 없을 거며, 아예 다종족들을 적대하고 척살하며, 배척해온 이가 부군이 된다? 이건 이것대로 상당히 커다란 정치적 결함을 안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거다.
그러함에도 그 이상의 이득, 이점을 안겨줄 수 있을까? 그런 확신을 어찌 전해줄 거고?
정치적으로 개입도 못 하고 영향도 못 주며 그러면 목을 친다 호언장담했지만, 이건 그걸 들은 이들만 아는 거지, 그 이야기가 소문이 퍼진다 쳐도 부군이 어찌 정치에 관여를 안 하겠나.
애초에 베갯머리 송사란 게 있고, 잠자리에 몸을 섞으며 자식마저 볼 텐데 영향을 안 받는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거지.
물론.
‘전~혀 상종 안 하고 싶지만.’
오히려 방구석에 뒹굴며 케어해주고, 떡치고… 놀고 먹고….
이야, 이거야말로 방구석 인생 최대 가치 아닐지?
남성으로선 글러 먹었다 뭐다 할 수 있지만, 패왕녀가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이런 게 아닐까?
그러면서 자기 기반 다지게 잘 받쳐주고 도와주나, 자기 권위엔 결코 도전하지 않는다던가.
‘굉장히 이상적인데?’
생각해보니 이건 이것대로 좋을지도?
문제는….
‘그녀 한 사람에게 붙들린다는 게 문제라면 문젠데.’
그것도 의외로 나쁘진 않을지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말이다.
“흐음.”
어느 의미론 인생의 무덤.
어느 의미론 이상적인 방구석 백수건달 생활의 합법화.
…근데 본사가 과연 그러라고 날 여기에 보냈을까?
어쩌면 추후 있을 단 한 번의 거사, 예컨대 핵폭탄 승인 버튼 느낌으로 카일론 심장부에 처박아둔, 일종에 비밀 병기 취급?
음, 이건 너무 과장됐나?
본사는 항시 몇 단계나 앞을 지켜보며 지령을 내리는데, 이게 당장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지.
애초에 에드릭이란 캐릭터 자체가, 마치 여기에 오기 위해 여태 스펙을 쌓은 거 같은 느낌을 받고 있는 건, 다분 기분 탓은 아닐 거다.
그게 조금… 에드릭으로선 떨떠름할 따름이기도 했고.
어쨌든.
주변 조언을 받으며 에드릭은 착실히 왕성 내에 있는 전용 객실에서 상황을 관조하며 철저히 두문불출을 이어갔다.
의외로 에드릭은 현재, 부군 경선 내에서 손꼽히는 10명 중 하나로 대외적으로 선정된 터라, 경거망동하기도 좀 그랬다.
명성이라는 건 때때로 움직임을 제안하는 족쇄로도 작용하는데, 편견이 있기에 엄한 짓하면 환상이 깨지고, 인망이 무너지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로까지 연계되는데, 이건 개인에게 있어선 사실 지극히 불행한 요소 중 하나.
그러나 반대로 그걸 즐길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긴 하지.
당연 유명인, 대단한 사람에 대한 선망, 경외가 발전하면 우상화가 진행되기에, 우상이 뻘짓을 하면 실망감도 자연 뒤따를 수밖에.
물론 뻘짓을 해도 과도한 해석으로 다른 쪽으로 인식이 번지기도 하나… 그건 일일이 예측하기가 껄끄러우니, 이럴 땐 그냥 잠자코 있는 게 오히려 가치 상승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격이기도 했다.
그래서 문제되는 게 있다면….
‘떡을 못 치네.’
보통 하루에 한 번, 못 해도 이틀에 한 번은 그냥 심심풀이로 해왔는데, 여기 온 이래 단 하루도 자신의 위용 넘치는 분신(?)을 활용해 보질 못 했다.
덕분에 습관이 참 무섭다고, 안 하니 더욱 애가 타들어 간달까.
아니, 그렇게 해댔으면 아예 휴식 차원에서 쉬어갈 수도 있을 텐데, 에드릭의 몸은 이런 면에선 상당히 불합리했다.
‘…자위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끄응….
물론 겉으론 이런 태도를 전혀 내비치지 않고 있었지만.
오히려, 방에 처박혀 있음에도 유혹해대는 이들이 많아 이건 이것대로 좀….
그렇다고 노는 건 아니었기에, 에드릭은 단말기를 통해 정보를 체크하고 받는 식의 사기적 효율을 누려가며, 남들이 보기엔 책을 탐하며 고요를 즐기는 듯한 여유로움을 보내는 모습을 줄곧 내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철커덕!
“어떤가? 지내기엔?”
검게 물든 풀 플레이트.
예컨대 전신 갑옷에 예의 뿔 달린 투구마저 눌러쓴, 택틱껄(…)한 복장의 패왕녀님이 친히 왕림해버리자, 에드릭도 그 시점엔 잠깐 동요를 금치 못했다.
아니, 왜 갑자기 오셨대?
여태 자료를 접한 바에 따르면 따로 접촉한 이는 없다는데?
아닌가? 몰래 후보들 하나하나 접촉…은 말이 안 되고.
이 경우 유력 인사한테 접촉한다던가?
그게 본의 아니게 가장 가깝고 행동반경이 훤히 예상되는 자신에게 먼저 왔다던가?
머릿속이 갑작스레 복잡해졌지만, 에드릭은 태연히 응대했다.
“좋지요. 가만히 눌러앉아 누릴 거 누리고, 영감에 취해 스스로를 되돌아볼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건, 복이니 말이죠.”
소파에 앉아 기다란 테이블, 맞은편에 서서 서로를 직시하는 둘.
물론 패왕녀가 앉은 곳 뒤에 시립한 둘… 동일한 형태의 갑옷을 걸친 이들 때문에 분위기는 더욱 경직됐지만.
한 사람은 사내인 듯 가슴이 평평, 다른 하나는 여성인 듯 가슴 일부가 돌출된 형태였기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남녀 짐작이 가능했다.
이건 그러니까… 호위를 빙자한 일종에 그건가?
자기 눈으로도 판단하되, 부하들에게도 살피게끔 해서 평가를 매겨 참고 사항으로 삼으려는?
애초에 에드릭이 객실에 눌러앉은 이유 중 하나는, 점수를 따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부군이 됐으니 마구 싸돌아다닌다 치면, 마찬가지로 패왕녀가 부군 된 자를 어찌 바라보겠나?
분명 경거망동 말고 처박히라 말할 텐데, 그러기 전에 손수 처박힌 모습을 보이고 이에 만족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그 자체로 흡족해할 만한 행동거지가 아니겠나.
그런데 찾아올 정도로 흡족해했을 거 같진 않은데… 아닌가?
눈빛이며 표정이 보여야 상대 심리를 예측하고 어쩌고 할 텐데, 전신 갑옷… 그것도 시각적 효과로도 위험천만해 괜스레 동요하게 되는 차림새다 보니, 오히려 이쪽이 동요되는 것 같아 조금 속이 쓰린 에드릭이었다.
“식견은 탁월하군. 본 왕녀가 경거망동 않고 내조할 수 있는 남성을 원한다는 걸 잘 파악하고 있구나. 다른 것들은 유력 가문이며 귀족들 만나며 자기를 도와줄 걸 호소하고 있는 형편인데, 귀공은 오히려 앉아서 모두가 찾아오도록 손을 쓰면서 본 왕녀가 원하는 방향성을 고수하고 있기까지 하니, 예의상 찾아오지 않을 수가 없더군.”
“공사다망하신 분께서 성의를 들여 찾아오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괜한 소리는 됐다. 귀공도 미사여구며 겉치레에 담백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소한 말장난, 치장은 이쯤하도록 하지.”
“예, 그럼 바라시는 대로.”
이쪽 어투가 익숙하다 해도 매번 한 템포 생각하고 신중히 말을 꺼내야 했기에, 적응해도 불편한 건 매한가지.
그러니… 저런 식으로 대충 말해도 된다 허락해주면 이쪽으로선 땡큐지.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왜 이곳에 온 건가?”
“아는 분이 경선에 참가하면 네 인생이 빛을 발할 거다, 출세할 거다.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제가 꼭 그걸 선택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는데, 진취적으로 살라며 조언을 주셔서요.”
“사실상 반 강제로 왔다는 거군?”
…용케 이 정도로 핵심을 꿰뚫네?
“그런데도 참가할 생각은 있고?”
“기회가 되는 한은.”
“그래, 형식적이라도 일단 참가하는 척, 아님 그런 구색을 내비치시겠다? 귀공의 배후가 궁금해지는군.”
“어린 꼬맹이가 과도하게 출세한다면 당연 의심해 마땅하겠지요?”
“이걸 부인하지 않는 게 제법 신선하다만… 이유가 뭐지?”
에드릭은 잠깐 생각한 다음.
“상식적으로 제가 뭐 대단한 영웅호걸도 아닌데, 말재간이 아무리 뛰어나고 머리가 비상하다 쳐도, 근본이 없다면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저는 저 자신을 과대평가할 생각 없습니다. 과소평가하는 쪽이 마땅하겠죠.”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어 드는군. 필시 조언 받기도 그런 태도가 본 왕녀에겐 좋지 않다 들었을 터인데.”
확실히.
안내인이었던 오수스가 그리 조언을 해주긴 했지.
이건 다른 의미로, 그걸 뻔히 예측했다던가, 오히려 그런 쪽 인사 배치에 관여를 했다던가, 아님 그런 조언을 주는 것조차 지켜보며 상황을 관찰해서 보고를 받았다던가.
에드릭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