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화 〉54. 패왕녀.(4)
물론 반대로 사이비 교주며 사이비 집단이 그런 대외적 정보망을 차단해버리고, 내부적 흐름에 가둬 세뇌 시키는 건, 약간 메커니즘이 다르지만… 그때는 오히려 익숙해지게 해 경외하게 만드나 판단은 감히 내리지 못하게 연막을 치고, 이해할 선을 확실하게 그어 버려 가깝되 가깝지 않은 존재로 성립해버려 머릿속에 정의를 내려버리는 건데, 그러니 규율이며 자체적으로 형성한 시스템, 법에 엄청 집착하게 될 수밖에.
또한 의지 구석을 교주며 주변에 한정해버리고, 의존성을 키워버리면?
거기에 명확한 적대적 존재를 성립해버린다면?
말 그대로 답이 없어지는 거다.
원래 종교에 빠지는 근본적 이유는 구원과도 같은 의존 문제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사람이란, 의존할 게 있다는 것만으로 새삼 행복해지고, 편해진다 하니.
그러기에 주인이 주인 노릇만 잘하면, 노예는 사실 오히려 자신이 행복하다 인식하곤 한단다. 주제 파악만 잘하게 조련만 잘해준다면.
그리고 그걸 박살 내는 게 과욕, 욕망, 욕구 같은 건데… 반대로 그런 게 없다면 사람은 무언가를 시도하고, 도전하는 일이 대폭 줄어들 테니, 과욕이나 욕망이 이럴 땐 또 긍정적이고….
따지고 보면 세뇌 방식은 정말 다양한데, 이 메커니즘은 알아도 눈치 못 채면 누구나 좌우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그리고 누군 이걸 눈치채고, 종교며 왕들이 성립한 우상화 시스템을 자신이 사용하기 시작하는 거고.
고대적 왕들이 하늘의 자손, 후예, 신과 소통하는 이라 주장한 것도 바로 그러한 맥락인데, 그들은 그렇게 권위를 포장하고, 쌓아와 전통으로 굳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은 성립해버렸다.
이러한 환상이 깨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모됐는지는….
고대에 몇몇 지성인들의 경우, 그러기에 로얄 블러드며 고귀함을 그다지 인정해주지 않은 예를 속속들이 접할 수 있다.
물론 현명하다 알려진 고대적 지성인조차 그 편견을 못 벗어던져 막연한 우상에 심취한 경우도 적지 않았고, 오히려 이를 역이용한 이들도 있었으니.
…결혼이란 시스템도 따지고 보면 필요충분조건을 성립하면서도, 한편으론 개인의 인권, 권리를 배제한 요소가 아예 없진 않을 거다.
뭐 생겨난 이유며 타당성에 대해선 일말의 여지가 없기도 하고, 이런 시스템이 안 갖춰졌다면 단순 가정을 떠나 부족 단위며 단순 사회, 국가 단위조차 문제가 생겨났을 테고 그건 그러려니 해야지.
부족 국가일 때도 일부일처 흐름일 때가 있었는가 하면, 강자가 다 독점하고 나머지 일부만 떼어내 선심 쓰듯 줬다는 예도 그러하고.
단순 먹는 거 입는 거뿐 아니라 그놈에 배우자조차도.
에드릭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 포기한다고 생각했던 당시에, 이러한 것에 의구심을 표하게 됐다.
왜 이게 당연한 거지?
왜 나이 먹으면 당연한 듯 애인이 생기고, 섹스하고, 그러다 결혼하고….
…그런데 본사 취직 전까지만 해도 그런 일은 내게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이었다는 걸, 그는 새삼 인정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뉴스에 노출될 정도로 정치인이 난교 파티를 벌이고, 돈 있는 것들은 여자 여럿하고도 자고, 누리고 즐기고….
실제 통계로도, 보통 수컷의 대부분은 평생 암컷과 맺어지지 못한다는 식의 통계 상식을 인터넷상으로도 접한 적이 있었는데, 아… 내가 그 못 접하는 대다수 중 하나구나 하며 덤덤하게 받아들였던 때도 있었다.
세상은 이렇듯 정해진 환경, 시스템에 의해 굴러간다.
물줄기가 흐르는 강은, 내버려 두면 어지간한 천재지변이나 인위적 개입이 없는 한 줄곧 그 강줄기를 타고 흘러내리기만 한다.
인간이라고 다를까.
인간도, 정해진 흐름에 당연하듯 순응해 굴러갈 수밖에.
이걸 아느냐 모르냐에 따라, 삶이 조금 더 명료해질 뿐.
그런 의미에서, 결혼, 행복, 부부 관계에 대한 것도… 한편으론 그러한 불합리에 일환이 아니려나.
에드릭이 본사 규정상 결혼해 정착말라는 요구 사항에도, 그렇게 여자들과 진득하게 관계를 맺어가며 애정을 공유해 왔음에도, 확실하게 선을 그어가며 대처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해진 거 없고, 반드시 준수해야 할 무언가도 없다.
그저 지켜야 할 선이 있고, 그것만 지키면 뭐든 좋다.
그 이외에 모든 건 사실, 유명무실할 따름.
또한 그 스스로가 그녀들에게 혼신을 다하여 애정을 표현하고, 배려하며, 사랑함으로써 스스로에게도 떳떳하게.
애초에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만 신경 쓴다.
받으려고 하면, 주지 않을 시 서운함을 느낀다.
에드릭은 이걸 실감하며, 거기에 실망한다는 거 자체가, 내심 두려웠다.
그래서 기대 않는다.
그리고 주면 좋고, 아니어도 괜찮다.
이런 에드릭이 이성을 대하는 태도를 눈치챈 건, 의외로 그와 몸을 부대낀 이 가운데도 일부 밖에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깊숙이 관심을 표하지 않는 한,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면 대부분은, 그처럼 주는 것에 감동해 거기에 심취하는 선에서 그칠 테니 말이다.
실제로도 그러했고.
그렇기에.
“전하, 제가 이분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패왕녀의 뒤편에 서 있던 여기사가 뜬금없이 그리 이야기했을 때도, 에드릭은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마음껏.”
그녀의 허락에 여기사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크나큰 심력 낭비겠지요. 거기에 실망하고, 상처 입는 것도 그러실 테고요. 그러기에 에드릭 공께서는 일방적으로 자신만 사랑하되, 상대에 대한 호응, 대답, 보상은 바라지 않으신다, 그 이야기로군요.”
“……?”
어째서 몇 마디 안 했는데 이런 속내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들통났는지, 에드릭은 순간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기까지 했다.
여태, 별달리 크게 관계가 개선되지 않은 이 가운데 이토록 절묘하게, 그런 점을 캐치해 지적하는 이는, 이곳 세계에 와서도… 이번이 처음.
그러기에 순간 동요해버렸다.
뭐지? 저걸 어떻게 아는 거지?
아니, 그냥 넘겨짚기인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좋아한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거로군요. 그러면서도 눈에 끌리고, 마음이 동하면 거기에 순응하고. 진정한 사랑을 포기했기에 오히려 더 담백하게 관계를 정의할 수 있다. 제가 알게 된 게 맞는지 한번 여쭤보고 싶습니다. 어떠신지요?”
“…….”
에드릭은 여태 만난 여성들 대부분은 사랑한다.
그거에 한 치의 거짓, 오차도 없다 확신할 수조차 있고, 그녀들과 결혼해도 잘 살 자신조차 있었다.
그리고 그거면 족하지 않나?
천생연분이니 뭐니 이런 거에 환상을 가지기엔… 아, 물론 판타지 세계로 파견된 이래, 그런 착각을 수십 차례 치르기도 했지만, 사실 그때마다 떠오르는 얼굴은… 이곳에서 만난 이들의 얼굴이 아니었다.
“맞습니다. 제가 용기가 많이 부족하거든요.”
“그게 나쁜 건 아니지 않나?”
이때 왕녀 전하가 의아하다는 듯 개입했다.
“자기 주제에 충실한다. 그러고 상대에게 헌신하며 정성을 다한다면, 그건 필시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 않겠나?
원래 알아간다는 건 번거롭고 구차한 과정이다. 그렇게 알아가며 관계는 더욱 두터워지고, 신의가 두터워져 간다면, 그게 표면적으로 흔히 이야기하는, 시건방진 사랑보다야 훨씬 나을 테지. 어차피 인간은 화려함에 취하고, 다채로운 것에 눈길을 빼앗기기 마련. 외양이 아름다우며 거기에 얽힌 가치가 뛰어나다면, 누구든 이를 사랑해 마지않은 척은 할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이 정녕 틀려먹었다고 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맞는 말씀이십니다.”
여기사의 태연한 답변에 패왕녀는 고개를 저었다.
“본녀는 사랑에 대해 아는 바가 적다. 알고 싶지도 않고. 그러나 지인 가운데 그런 것에 혼신을 다하는 이가 있기에 존중은 해준다만, 어떠려나 싶군. 무엇보다 그렇게 불같이 서로를 갈구해도, 그것이 몇 년도 채 안 가서 사그라들고, 꺼질 거라면… 본녀는 사랑이라 포장한 그 감정의 이끌림에는 다소 회의적인 입장임을 앞서 밝혀두마.
그러니 귀공처럼 이성에 근본을 둔 성심성의에 대해선, 제법 긍정적인 평을 던져주도록 하지. 상대를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자세, 이에 공감하며, 도움을 주려 하고, 진심으로 이해해 배려하고, 아끼고자 하는 자세는, 무릇 존중받아 마땅한 법. 그 점만 놓고 평하자면 무수한 부군 후보들 가운데 귀공만한 이가 없다는 게, 우리들 측의 공통된 평가이기도 하네. 또한 정치적으로도 어긋나는 점이 없고, 오히려 도움을 받았으면 받았지, 우리가 주고 할 것도 적을 테고.
이렇게만 보면 마치 본녀의 부군, 반려가 되고자 탄생한 것만 같아 내심 기대되는 바가 적지는 않아.”
“…….”
“그러나 마음이 가는 바를 어기면서까지 무리할 필요는 없네. 살아간다는 게 늘 행복하며 즐거울 순 없는 법이고, 권력이 얽힌 세계는 더욱 처참하고, 번거로우며, 불쾌한 일들 투성일 테니. 추악한 꼴 많이 볼 거며, 경계하고, 두려움을 품는 일이 더욱 잦아들 테니… 야욕을 품지 않은 한 버티는 것 자체로도 고될 거라 본녀는 자부하네. 그걸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이를 수용할 수 있다면… 이런 삶도 퍽 나쁘진 않네만. 그만큼 독보적으로 누릴 수 있는 바도 있으니.
사람은 누구나 될 수 있으나 왕은 아무나 될 수 없으니. 귀공이 이런 본녀의 옆에서 같은 눈으로 같은 세상을 굽어보고자 한다면, 열심히 노력해보도록.”
자, 그러면 여기까지.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철커덕거리는 갑옷의 마찰음이 더욱 찰지게, 한편으론 묵직하게 가슴을 찔러왔다.
왜 갑옷 소리에 가슴이 철렁인 걸까. 알다가도 모를 일.
“짐작했던 것보다 더 마음에 드는군. 그러니 건투를 빌지.”
“감사합니다. 전하께서도 만수무강하시기를.”
“…훗!”
등장할 때처럼 떠날 때도 거침없이 사라지셨다.
“후우! 장난 아니야. 아주 그냥….”
그래도 그녀가 방문한 덕에 에드릭도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아니 두 가지가 있었다.
우선 첫째는, 그녀의 부군이 된다면… 의외로 죽이 잘 맞을 거란 추측이 하나.
그리고 두 번째는….
“진짜 사랑이라.”
그게 필요한가 싶기도 했지만, 언제나 걸리적거리던 하나의 얼굴이, 문득 떠올라 내심 가슴 속을 꿀꿀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아바타이고, 여기서 결혼하고 맺어진다 쳐도… 뭐가 문제일까 싶기도 했음에도….
계속, 걸리적거려 물을 몇 차례나 들이켜도, 그 불쾌함이 도저히, 사그라지지 않아 답답함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그나저나.”
대체 한 번 본 거 가지고 이걸 어찌 파악한 걸까 싶기도 하고.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그런 티를 줄기차게 내고 있었다던가?
어쨌든, 미스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