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화 〉58. 여기사여도 한 자릿수론 부족했다.(4)
역시나 전신 갑옷을 입고 종일 싸워댈 체력은 괜히 생겨나는 게 아닌가 보다.
애초에 그녀들이 휘두르는 무기들조차도 가벼운 건 무엇 하나 없다.
기본이 kg단위다.
애초에 그 정도가 아니면 사람을 토막 내기도 힘들고 혹여 낸다 쳐도 금방 내구도가 닳을 거다.
검이라는 게 한번 쥐면 내내 휘두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인체를 베어 피며 기름이 묻어나면 날붙이가 잘 안 들고 상태가 엉망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거기에 그냥이어도 번거로운데 상대가 가죽을 몇 겹으로 겹친 경 갑옷이나 쇠로 된 갑주며 방어구 마저 공들여 걸쳤다간 상황이 더 복잡해진다.
그래서 이곳 세계에선 마나로 검을 보호해 검의 내구도 및 절삭력 등을 보완하는데, 이것도 체력이 다 닳으면 금세 망가진단다.
제철 기술이 엄청 뒤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현대 기준으로 보면 한없이 모자란 형편이고, 무엇보다 쇠는 전략 자원이기에 남아도는 녀석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군에서 뽑아내는 쇠 무기들은 대부분 순도를 아주 높게 하기보다는 다른 것과 섞어 양을 부풀리는 쪽에 공을 들이는데, 기사 한 명의 몸에 거진 50명에서 많으면 100명 분의 쇠가 제공된다 해서 기사는 평균적으로 1명이 못해도 정예 병사 10명을 상대할 수 있는 역량을 지녀야 한다는 게, 이곳 세계에서의 기본 상식이기까지 했다.
그게 아니면 전신 갑주까지 제공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일부는 갑옷을 경량화하고 무기에만 쇠를 투자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곳 세계도 신검이니 명검, 이러한 무구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것들은 대부분은 마법 가공까지 이어져 천문학적인 비용이 든단다.
‘아무나 못 한다고 하니.’
어디나 희소성이 있으면 갑절의 돈을 버는 법 아니겠나.
어쨌든 노동은 좋다. 잡생각을 안 나게 하고, 행동에 의식이 집중되기에 알아서 무의식이 스스로 머릿속을 정리해주곤 하니.
몸이 편하면 잡생각이 쉴 새 없이 들기 마련.
불면증이랍시고 현대인이 못 자는 이유 중 하나가, 생각이 너무 많은데 그걸 제어하는 법을 몰라 생각만 쫓다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예가 적지 않은데, 그때는 그냥 몸을 혹사 비슷하게 굴려주면 된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요령껏 휘파람을 불며 물만 안 들어갔다 뿐, 자그마한 웅덩이, 호수를 연상하게 하는 공간을 보며 에드릭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그건 에드릭 사정.
‘왜 나한테….’
나무를 가져오라 하는 거지?
어디로 가서, 누구한테?
명을 받아 대뜸 작업 현장에서 빠져나온 여기사는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어려운 건 아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차라리 수백의 적진에 혼자 닥치고 돌격하라는 쪽이 백 배는 낫지.
한숨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는 상황!
이 막막함이란!
졸지에 흑성 기사단 소속 여기사들이 해괴한 짓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게 됐다.
전부 거두절미하고.
그렇게 해가 떨어질 때쯤….
“후우!”
울타리만 없다 뿐 대강 윤곽이 잡혔다.
배수 방식을 정하는 게 사실 제일 큰 걱정이었는데… 그나마 상하수도 설비가 이루어져 있어 그쪽으로 억지로 물길을 트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음, 사유지에 이상한 짓 했다고 막 뭐라 하는 건 아니겠지?
어차피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테고….
정령술을 활용해 돌들을 깎고 평탄화해서 바닥에 까는 것과, 배수 목적으로 지하로 물길을 트는 것만 제외하면, 에드릭 자신은 중노동이란 생각까진 들지 않았다.
정말로 힘쓸 일들은 여기사들이 도맡았고, 섬세하고 세세한 것들 위주로는 에드릭도 나름대로 신대륙 당시 개척지를 뒹굴며 이것저것 해온 깜냥이 있다 보니 금세 적응해버린 점도 있고….
‘재미도 있고 말이지.’
안 하던 짓도 가끔 하면 이렇게 재미났다.
십자수나 바느질을 심심풀이로, 아무런 이유 없이 하게 됐을 때도 이런 기분이긴 했지.
‘왜 했었더라?’
학교 다니던 시절엔 그렇다 쳐도, 어머니하고 함께 하루 종일 그랬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야 기억 났다.
“다 된 겁니까?”
옆으로 온 아르세우스가 허탈한 건지 시원스러운 건지 구분이 안 가는 표정으로 완성된 직사각형의 넓은 웅덩이…와 에드릭을 번갈아 살펴대고 있었다.
“일단은요.”
온천물만 올라온다면 노천탕, 야외 온천이 따로 없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걸 기대하기란 곤란.
“돌 잘 끓이고 있나요?”
“…예. 시키는 대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불을 피우며 솥단지 안에다 짱돌을 수십 개나 밀어 넣은 덕에, 그 주변은 벌써부터 열기가 장난 아니었다.
“흐음….”
그러면 이 다음엔….
배수로를 이용해 물을 끌어올까 잠시 고민해봤지만, 고생해준 그게 있기에 이쪽도 조금 힘을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후우!”
그래도 엄한 공간에 물을 생성해내기란 여간 힘든데 말이지.
생성이라기보다는 소환에 가깝지만, 모르는 이가 보면 만들어내는 걸로 보이겠지.
몇 차례 심호흡을 한 에드릭이 이어 오른손을 펼치곤 의식을 집중했다.
없는 걸 가져온다, 소환하는 개념은 일종에 문을 여는 것과 같다.
그건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한편으론 보이고 심지어 느껴지기까지 하는데, 이걸 얼마나 제대로 실감하고 확신하는지에 따라 되느냐 마느냐가 결정된다.
현대인은 사실 철저하게 과학적 사고와 편견에 경직돼 대체로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해선 좀처럼 확신을 가지지 못한단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려 해도 살아온 기간이 오래될수록 무의식에서 이를 받아 들이지 못하고 배척을 한다는데, 이걸 대부분 이해를 못 한다더라.
에드릭의 몸이 마나와 친숙하지 않기에 더더욱 에드릭은 마법도 그렇지만 혹여 기사를 지망했다 쳐도, 이런 사고 방식을 고치며 훈련하고자 했다면 아마도 배는 수고스러웠을 거라는 게 본사 쪽 평가였고, 에드릭은 팀장님을 통해 이러한 평가 내용을 전달받았었다.
반면 그 나이 먹고 여전히 상상력이 풍부하다거나… 달리 말하면 현실적인 사고가 미묘한 구석이 있다 보니, 의외로 이쪽이 적성이여서 키워보는 게 낫다는 조언까지 전달받았다.
그러기에 타이밍 좋게 파라메라 대륙으로 가서 우연이긴 하나 알헤디나와 접선해 가호를 받곤, 정령체를 이룬 모든 것이, 실은 본사의 철저한 계획적 인도라는 걸 에드릭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본사에 속한 이래 그런 징후를 오죽 많이 접해봤어야지.
“자아….”
이윽고 허공에서 물벼락이 떨어졌다.
“오오!”
“이건….”
몇 초도 안 돼 넘치다시피 할 만큼의 물이 수영장… 아니, 욕탕을 가득 채워넣었다.
그런데 물의 색깔이 조금 신기했다.
“새하얗네요?”
“뭐지?”
이윽고 한숨 돌린 에드릭이 팔뚝으로 이마를 훔치곤.
“자자, 잠시만요.”
이어 욕탕을 채운 물과 흘러나와 바닥을 적신 물기마저 활용해 뜨겁게 달궈진 솥단지를 그대로 후려치듯, 욕탕 안쪽으로 낚아채듯 밀어 넣었다.
치이이이익!
동시에 달궈진 솥단지를 엎어 안에 있어 달궈진 돌들이 죄다 물안으로 파고 들자.
“???”
욕탕 물이 금세 뜨겁게 달궈지기 시작했다.
사람 20명 정도 들어갈 규모로 만든 거라 살짝 부족한 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일부러 온도 변화에 민감한 물을 투입한 터라 열기가 빠르게 확산함과 동시에 유지 또한 오래 갈 건 명확했다.
정령계에선 별의별 게 다 있고, 믿으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거짓이 아닐 정도로… 물에 한에선 온갖 선택지가 놓여 있었다.
단지… 상상력 부족 및 확신의 부족, 그리고 무지에 의해 이를 모를 뿐.
심지어 욕탕 물이 보글보글 끓어대며 새하얀 수증기를 피워올리기까지 하니, 그때서야 이게 뭔지 감을 잡은 듯 놀라워하는 그들이었다.
“저 정도로 물을 다 달굴 순 없을 텐데….”
애초에 목욕 문화가 발달했다는 건, 단순히 씻는 거 뿐 아니라 몸을 담그는 것도 익숙하단 의미다.
그러나 물이 제아무리 풍부하다 한들, 이걸 데워서 온탕을 즐기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이다.
물을 달궈 이를 일일이 퍼다 날라 채우는 방식이 보통이고, 마법적 구조를 통해 물을 채우고 전체적으로 달궈 뜨겁게 달궈대는 식인데… 상식적으로 이건 귀족이더라도 쉽게 맛볼 수 없는 사치였다.
그렇다고 현대처럼 사우나나 제대로 된 공중 목욕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면에서 보면 공중 목욕탕이 있어 이를 신나게 즐겼다던 로마는 참….
물론 기존에 에드릭이 머물던 무역 도시 아르세이유엔 공중목욕탕이 여럿 있지만, 거긴 아르세이유지 왕도 카젠드라는 아니었다.
“자,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별거 아니지만 여기서 피로도 조금 푸시고… 허기도 졌을 테니 야외에서 이를 즐겨보죠.”
말 그대로 사치의 끝판왕이다.
야외 온탕에서 전신욕, 반신욕, 자기 취향껏 그걸 즐겨가며 먹고 마시고….
직사각형 탕이긴 해도 가로 방향으로 높이를 조절한 터라 앉고 싶은 이는 우측으로, 서서 즐기고자 하는 이들은 좌측으로 가면 됐다.
좌측으로 갈수록 바닥이 깊어지는 단순한 수심 조절 방식이었다.
그러고서 생각하자니, 그냥 계단식으로 만들 걸 그랬나 괜한 아쉬움이 뒤따랐지만….
‘그건 나중에 추가한다 치고.’
여건이 된다면야.
그리고 그녀들 몰래 야외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게끔 식재료와 식기, 조리 기구를 요청하곤 동시에 술도 통째로 가져오게 했다.
“이것들은 전부 제가 사는 거니까 마음 편히 드시기 바랍니다.”
“꺄아아앗!”
“멋지시다!”
“역시나 통이 크시네요!”
현대와 달리 과거는 사람이 조금 단순한 게, 먹을 거만 챙겨줘도 목숨 걸고 충성하는 이들이 비교적 적지 않았다.
그만큼 자본이며 사유 재산에 대한 가치관 확립이 미흡한 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급여 외에 무언가를 공짜로 받는다는 건, 고대고 현대고, 이세계고 나발이고 즐거운 일이라는 것만큼은 마찬가지!
거기다 명분도 좋다.
열심히 도와주셨으니 제가 식사 쏩니다! 술도!
그리고 열심히 일한 대가로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야외 노천탕이라니!
불을 피우고, 거기서 고기를 굽고, 덩달아 전신욕을 즐겨 땀을 씻어내기까지.
“에드릭님도 같이 들어오셔야죠!”
“맞아요!”
“…….”
눈치를 줬지만 에드릭은 고기를 구우며 방긋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저는 나중에 해도 되니 먼저들 씻으시고… 자, 나와서 배도 좀 채우고… 아, 아르세이유 백화점 산 특제 비누도 몇 개 가져왔으니, 가실 때 다들 하나씩 가져가시고요.”
“맙소사! 그 비싼 걸….”
“맞아, 개척 군주님께선 본래 대상인이셨었지?”
“어린 나이에 아르세이유의 명물, 거대 상점을 만드셨다고….”
“백화점이라잖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을 주는 걸 마다할 이가 있을까.
‘사내가 너무 떡 치는 거에 얽매이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지.’
호색한이 나쁜 건 아니다.
실제로 에드릭은 여태껏 신명 나게 떡을 쳐왔고, 그걸 굳이 부인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할 시간은 많은데, 언제나 떡을 치더라도 그럭저럭 호감과 관심, 친애의 감정을 안고 몸의 대화를 나누고픈 에드릭이었기에, 앞서 그녀들이 기쁜 마음으로, 흥겹게 자신에게 안길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고자 이번 이벤트를 마련한 거였다.
‘조금 예측엔 벗어났지만.’
새하얀 물이어도 진흙들이 마르지 않아 역시나 물이 탁해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크게 신경 쓸 건 아니지.’
새하얀 물에 진흙과 기존의 모래며 흙, 먼지가 섞여 탁해지긴 했으나 그것에 불결함을 느낄 정도로 이곳 세계가 극단적 청결을 호소하진 않았다.
애초에 진흙이 스며들었다 쳐도 저건 정령계에서 가져온 물이기에 그 자체로 맑으며, 무엇보다 몸을 담그면 혈액 순환에도 지대한 도움을 줘 피로를 개선해주는데 매우 탁월한 면이 있었다.
거기다 물 자체에 스며든 향도 제법 달달했고.
이날은 이런 식으로 그녀들의 심신의 피로를 씻어주고 케어하는 것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가림막 없이 알몸으로 노천탕에 열댓의 여성이 멀쩡한 사내라곤 에드릭 한 사람 두고 야외에서 온욕을 즐기며 먹고 마시는 광경을 접한 여러 사람들은, 이를 잘못 오해해 면밀히 확인도 않고 무작정 소문을 퍼트렸으니.
결과적으로 에드릭이 문란하게 야외에서 여자 수십과 관계를 가졌다는 식으로 맛깔나게 퍼져가기에 이르렀다.
…솔직히 그 지경 가서 안 하는 게 비정상이지.
안 그런가?
그런데 정말로 안 했다.
거기서 여기사들 일동은 다시 놀랐다.
‘아니 왜?’
물론 그 속내는 에드릭 밖에 모를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