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취직하니 떡을 침. 이세계에서 (227)화 (227/454)



〈 227화 〉59. 그는 다 계획이 있었다?(2)

그건 그렇고 머리카락이 참 근사해.
연한 적발인데 분홍빛은 아니다.
…대단히 소화하기 힘든 컬러인데 아무런 위화감이 없이, 천성적으로  어울린다는 감상을 절로 떠오르는데, 에드릭의 그런 시선에 엘핀네스가 근사한 미소로 화답해왔다.

“그건 그렇고 고의로 사유지를 파헤친  대체 어떤 의도로….”



생각해서 파악하기보단 역시 묻는 게 최고.
그러기에 바리우스는 곧장 의구심을 솔직히 밝히며 명쾌한 해답을 갈구했지만.



“그런 것도 눈치채지 못하니… 아쉽군요.”



엘핀네스는 자신만만한 미소로 그런 바리우스의 얕은 인내심, 어리숙함을 은연중 질타했다.



“…자신감이 넘치는군. 한 번 속 시원히 이야기해보는  어떤가?”
“저나 에드릭 님은 모두 아는데, 바리우스 님을 위해 제 입을 혹사시켜야 한단 말입니까? 부탁하는 이의 태도로는 만족스럽지 못한 소행이로군요.”
“…부탁할 거까지야 있나. 모르는 거 알려달라는데 뭘 그리 따지는지 모르겠군.”

역으로 뻔뻔함으로 밀어붙이는 바리우스.
체면 때문에 모르는 거 아는 척하며 콧대만 높여봤자 본인 손해라는 걸 그는 일찍이 깨우쳤나 보다.

나이 퍼먹어서도 저런 거 모르는 놈들 태반인데, 그렇게 따지면 이 친구는 그럭저럭 난 놈인 건 확실했다.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걸로 모자라, 순순히 부탁을 청할  있다?’


이건 콧대 높은 귀족들 기준으론 제법 훌륭한 덕목이다.
보통은 그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한다.
그리고 못 하는 걸 저들은 하지 않는다,  한다는 식으로 자기합리화에 빠져든다.
…개도 안 물어가는 체면이며 자존심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가문의 명예가 달린 일이면 이해는 한다.
국가 간의 자존심이라면 이해는 한다.
그러나 개개인은 사실 아무 의미가 없다.
자신의 행동, 행위, 실책이 가문에 누가 된다면 모르겠지만.

이걸 제대로 이해 못 하면, 자신이 욕먹는 거 자체가 가문에 욕하는 걸로 착각하곤 한다.

마치 우리 세계의 중국 쪽 옛 황제들이 땅이고 백성이고 모든 게 자신의 소유물이라며 대놓고 주장했던 예처럼 말이다.



“후우!”



그래서 그들은 보통 거래를 한다.
순순히 부탁하기 껄끄러우니 조건을 내세우고, 대가를  테니 너도 대가를 달라는 명목으로 말이다.

그런데 바리우스는 그딴 거 없이 바로 대가만 내놓으라 그러는 거고, 그게 못 마땅한 엘핀네스였지만….




“좋습니다. 생색낼 것이 따로 있지, 마구간의 짐말도   있는 걸 구태여 숨길 필요는 없겠지요.”

실리는 못 얻으니 정신 승리는 해야했던 모양이다.



“끄응….”



결론: 개나 소나 다 아는 건데 이걸 물어? 생각도 없는데 뻔뻔하기까지… 그래~ 알려는~ 주지! 무식한 새끼~! 낄낄낄!
…라는 식으로 재해석이 가능한  엘핀네스의 반응이라 보면  거다.


반짝이는 그녀의 푸른 눈이 우월감에 젖어든다.
…확실히 젊다 보니 이런 면에선 재미있네.

정치에 수십 년 구른 나이 지긋한 이들은, 속내가 워낙 복잡함은 물론 자기 주관이 뚜렷해 상대하기 불편한 감이 있는데….



“이것으로 에드릭 님은 최소 3가지, 많게는 5가지의 이점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렇게까지?”


에드릭도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선 첫째, 에드릭 님께서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를 배려한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줬습니다.”
엉?
“저번에 있던 경선 대회 당시, 부하들을 챙기고 솔선수범해서 전선을 휘젓는 건 많이 회자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카일론의 문화에 적응해 전사와 기사를 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요. 연회장에선 스스로 술잔을 나르는 모습을 보여 괴짜라 불리기까지 했으나, 이렇듯 위아래 할 거 없는 접근성, 수용 능력은 윗자리에 앉은 이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덕목이고, 이러한 덕목을 몸소 실천하고 있단 사실은 실로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을 겁니다.”
“반대로, 고위 귀족들한테는 아니꼬운 일이  터인데….”
“그래서 더 좋지요.”
“응?”



바리우스의 의아한 표정에 엘핀네스가 불연 설명을 덧붙였다.



“에드릭 님이 혹여 부군이 되신다 쳐도 정치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고, 파벌을 형성할게 아닌데 고위 귀족들과의 친분을 확대할 필요성이 있겠는지요?”
“아…… 하지만… 그래도 여왕 폐하의 부군 되시는 분이 아닌가? 귀족들 눈에 나서 좋을  없을 텐데?”
“말했든 에드릭 님이 부군으로서 적극적으로 여왕 폐하를 보필한다면, 그 또한 타당한 주장이긴 하겠지만… 에드릭 님은 이렇게 찾아온 저희를 만나주시기는 하나, 스스로 찾아가진 않고 계십니다. 이러한 행보 자체가 이미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겠다는 의도가 아니겠는지요?”

그러면서 에드릭을 향해 고혹적인 미소를 띄우는 엘핀네스.
그보다….


‘그거하고 신분 고하 막론해서 모두 배려하는 게 왜 연결이 되는데?’

이건 뭐 의식의 흐름도 아니고.

물론 엘핀네스의 설명이 그쪽으로 흘러가게 된 배경은 바리우스 때문이기도 하고, 에드릭도 충분히 그럴싸하다며 무의식적으로 고개까지 끄덕이고 있었지만….


‘의도가 맞긴 한데, 반쯤은 그냥 싸돌아다니기 싫어서인 것도 있는데.’



애초에 윗 사람이란 가까이 닿는 이들에겐 익숙함과 친근함, 동시에 두려움, 경외를 사야만 한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이들에게도 이런 점을 잘 컨트롤해야 하는데….



‘연기 배우나 정치인이 따로 없지.’



항상 바른 모습, 그들이 바라왔던 이상적인 형상, 모습을 보여줘야 했기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닐  없었다.

아르세이유의 대형 백화점, 거기 대표이사일 때도 주변 시선 때문에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부군 후보가 되니 이건 이전보다 더 해졌다.

‘파라메라, 신대륙의 개척 군주.’

본의 아닌 유명세, 타이틀 효과가 아주 강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부풀려 주고 있던 탓.

거기다 에드릭 자신은 자주 잊지만, 그의 출중한 외모와 빼어난 육신은 남녀 모두의 선망을 사기 충분한 여건이기도 했다.



“이어서 가죠.  번째.”

엘핀네스가 배가 산으로 가는 걸 방지하듯, 거두절미하며 다시금 본론으로 복귀했다.


“앞선 이야기와 맞물리는데, 에드릭 님은 부군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성립함으로써, 여왕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몸소 실천한 셈입니다.”
응? 거기까지?
“그게 아니면 안하무인하게 날뛰어도 에드릭 님을 만류할 이가 과연 몇이나 있겠습니까?”
“흐음….”

왜 거기서 그럴싸하다며 납득을 하는뎁쇼?
에드릭이 짧게 헛기침으로 무안함을 달랬다.


에드릭 자신은 간과했지만, 개척 군주로서 이미 신대륙에 기반을 가지고, 천문학적인 자금을 벌여 들었다는 식의 소문도 그의 위세며 위명을 드높이는 이유 중 하나.
그러다 보니 그에게 밉보이거나 반하는 사태가 벌어질 시, 그가 분노하거나 역정을 보일 시, 그가 누가 됐건 온전히 이를 감당해야 한다는 건데… 당장 눈앞에 뭐가 없다 치더라도 장기적으로 그런 손해를 감당하려고 자처하는 머저리는 없는 상황.

어차피 에드릭은 아직 카일론의 백성도, 귀족도, 일원조차 아니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고, 사라질 수 있는 몸.


그리고 혹여 문제가 발생한다 쳐도 결국 왕실이나 고위 귀족이나 이를 견제  질책을 넣을 수 있다는 건데… 이건 이것대로 심각했다.

“그럼에도 내세우는 바 없이, 성실하게 부군 경선에 응하고 있는 이러한 태도, 행실은 긍정적으로 평가받기 적합한 요소이기도 할 겁니다. 이는 곧 카일론을 존중한다는 의미이고, 왕실과 귀족들 입장에서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면 받아들였지, 반감을 가지고 적대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외국에서 사신이 온다 쳤을 때, 사신이 나름 한 나라의 대표랍시고 거들먹거리며 난리법석을 떨면, 그 자체로 국가적 반감으로까지 확대되는 바.


애초에 무례한 사신을 보낸 거 자체가 우린 너희를 인정 않는다. 말인즉 너희 따위는 벌레만도 못하니 모멸감을 주겠다는 것.


이는 쫄리면 뒤지세요, 하는 식이라 선전포고를 자신들이 하기 싫을 때  먹일 요량으로, 양아치 마냥 구사하는 추잡한 외교 방식 중 하나로 강대국이 약소국의 쪼인트를 깔 때 심심풀이로 자주 사용해왔던 방식이기도 했다.

애초에 강대국이라 하여도, 나름 존중의 뜻을 담아 의견을 전달하여도,  전달자가 슈퍼 갑을 자처해 전쟁이 난 케이스는, 우리 세계에서도  많은 형편이기도 했고.

당장은 아니어도 이  깨물고  키워 나라 파탄 내는 원흉으로 번진 예까지 있을 정도니 오죽하겠나.

“그렇게 해서 에드릭 님은 자신의 위치를 확고하게 성립시켜놓았습니다. 능력을 갖추되 겸허하며, 아랫것들을 다독이되 윗사람 된 자들의 눈 밖으로 나지 않는다는, 그러한 처세의 본 분을 확고하게 다졌다고 봐도 무방할 테지요.”
“흐음….”

바리우스는 꽤 느낀 바가 있는지 팔짱을  채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확대 해석 쩔긴 하네.’

굵직한 의도 자체는 전부 들어맞았다.
그러나 이는 엘핀네스가 유독 특출나서가 아니라….




‘이 정도가 기본이란 거지.’




귀족이란 정치적 인간이다. 태어날 적부터 정치를 배우고, 죽는 그 순간까지 정치에  담는 게 보통.


정치가 혐오스럽고, 싫고, 꺼려지면 그들은 정쟁에서 떨어져야 하는데, 이조차도 정치적 행동으로 해석해 결국 파탄으로까지 연결된다.



“그러면 이어  번째.”

엘핀네스는 재차 설명했다.

“경계심을 흩트리고자 의도적으로 무른 행동을 보여줌으로, 이에 대한 실책을 스스로 빠르게 인정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한 책임을 짊어지겠음을 앞서 밝혀 이조차도 행동으로 보여주셨지요. 그뿐 아니라 이러한 실책을 기회 삼아 역제안을 하는 수완과 배포. 이건 에드릭 님이 순수하게 부군으로서 얹혀살겠다는 의도, 혹여 부군이 된다 한들 맹목적으로 신변을 의탁해 부와 권세를 누리겠다는 의도에선 사뭇 벗어난 흐름이라 볼 수 있을 테지요.”
“그건… 그러니까…?”



바리우스는 감을 못 잡았나 보다.

‘뭘 그리 어렵게 설명하는데?’



간단한 이야길 복잡하게, 미사여구 추가해 고풍스럽게 만드는 건 역시나 귀족들의 패시브 같은 건가 보다.


수사법을 바탕으로 아름답게, 명료하게, 적절하게, 통쾌하게 언변을 구사해 핵심을 꿰뚫는 것과, 고풍스러움을 과시하여 마치 공작새 마냥 있어 보이게 꼬리깃을 펼쳐대듯 어필하는 거긴 한데….

‘가끔 적응 안 된단 말이야.’


여전히  흐르듯 그런 쪽 멘트가 안 나오는 것도 그렇고.
…이게 다 파라메라 대륙의 솔직 단순 어투에 익숙해진 덕분일 거다. 거기 파견되기 전까진 에드릭도 제법 능숙하게, 있어 보이게 멘트를 쳤었으니 말이다.



“아직도 이해를 못 하시다니….”



과장되게 한숨을 푸욱 내쉬는 엘핀네스.
결국 단계를 낮춰 아이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로 판단했나 보다.

“바리우스. 우리가 필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인간상은 무엇입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