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화 〉59. 그는 다 계획이 있었다?(4)
“그렇군요.”
철영 씨한테 간략하게나마 보고를 받긴 했는데 나름 제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의 정령을 다루는 만큼, 강줄기를 끼고 있는 이 왕도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지 않겠지.’
그리고 목욕탕 같은 시설도 따지고 보면 물을 천문학적으로 끌어들이고, 사용하는 시설 아니겠나.
강이 닿지 않은 안쪽이라 하여도 시설 확대를 통해 영향력 행사를 어느 정도 누려볼 수 있을지도?
당연히 강물을 끌어들이는 방식을 사용할 테지만, 그렇다면 강의 상류에 자리잡아야 할 터다.
이 시대의 상하수도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기에 대부분 오물을 비롯한 하수 처리는 모조리 흘려보내는 단순한 방식.
그러다 보니 페어른 강의 하류로 접어들수록 수질의 상태가 좋지 못한 형편이었다.
그나마 이것이 흐르고 흘러 바다로 쏟아지니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닐 터였다.
‘태민 씨 세계의 선진국이었다던 영국이란 나라도, 근현대 직전까지 수도의 뎀즈강의 수질 상태가 가히 심각했다고 들은 적도 있고.’
여러모로 참고하고 배울 점이 많았다.
나중에 그쪽 출신 사람한테 어땠는지 물어봐도 나쁘진 않을지도.
에드릭과 팀장인 윤미라가 속한 본사는 한 세계만 따져도 다국적 기업이고, 세계의 제한을 벗어나면 다세계, 다차원 기업이었다.
그러니 그쪽 나라 출신 찾는 건, 크게 어려울 것도 없으리라.
어쨌든 에드릭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을 짚곤 그 부분을 확대해석하곤 나름대로 뿌듯한 웃음을 지어 보이자.
“기쁜 일이라도 있는가?”
“아무렴요.”
실내임에도 투구를 눌러 쓴 패왕녀를 보며, 멜크리우스는 자신의 고운 입술 위로 희미하게 미소를 그려 넣었다.
실로 의미심장하게 느껴질 법한….
세상 일이라는 게 이렇다.
내가 생각하고 계획한 게 전부가 아니듯, 그로 인해 발생하고 생겨날 영향 등이 누구에겐 전혀 다르게 비칠 수 있음을 말이다.
나중에서야 이 점을 덩달아 깨우친 에드릭이었지만….
‘목욕탕 짓는다고 내 영향력이 강해질 게 있긴 한가?’
물이 풍부한 곳이면 당연 에드릭의 기운도 활성화되며 여러 시너지를 얻긴 하지만… 그게 그렇게 대단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보기엔, 그렇게 여기지 않는지도.
에드릭은 그 점을, 의외로 자각 못 하고 있었다.
…일일이 그런 거 죄다 고려하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건 그 자체로 대단한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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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공식적으로 왕을 보게 될 시, 대체로 알현실로 인도된다.
왕을 알현한다, 라 하는 것도 이에 해당.
물론 여기에도 종류가 있는데, 일일이 논하면 끝이 없다.
그나마 정해진 회의 이외의 시간대에 알현실로 인도된다면 부담은 적어진다.
왕을 포함해 소수더라도 일부 신하들이 참가한 상태로 대소사를 논하게 되는데, 이러한 것은 알게 모르게 양지로도, 음지로도 소문이 퍼지기 마련.
사신단이며 중요한 안건을 논할 때라면 공식 회의 때, 왕도에 몰린 귀족 대다수가 모인 시점에 이를 회자 시켜 안건을 굴리겠지만, 아직까진 그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
그리고 여기서 어차피 논한 것들이 타당하다 결정 되면, 추후 다시금 정리해서 또 대다수의 귀족들에게 이러쿵저러쿵 설명하는 시간, 설득과 선동의 시간이 도래한다.
제아무리 중앙집권제, 절대 권력의 왕이라 한들 귀족들을 대놓고 무시하고 이러면 지지 세력이 죄다 박살 날 테고, 대우받지 못하며 존중받지 못하는 신하들은 이를 잊지 않고 기억해두니 장기적으로 왕가를 이어감에 있어 썩 좋은 방식은 아니었다.
물론 왕족이며 왕위 계승자들 모두가 저 철왕이나 패왕녀 급의 존재라면 모르겠지만.
그러기에 왕과 친왕파를 납득 시켰다고 전부 끝이 아닌 거다.
정치라는 건 그래서 밑 작업이 중요한 거다.
민주주의만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는 게 아니다.
무수히 많은 귀족들이 죄다 합심해 반대하면 제아무리 강력한 왕권을 지닌 왕조차도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는데, 그걸 밀어 붙이려면 적어도 대의명분만큼은 확실하게 갖춰야 한다.
이건 일종에 암묵적인 룰이다.
그리고 이 룰을 깨면, 이거야말로 진흙탕 싸움 가자며 선전포고하는 거 밖에 안 되는 거고.
어쨌든 에드릭이 공식적으로 왕에게 불려 알현실에서 알현을 했다는 거 자체는 늘 있는 일임에도 한편으론 쉽게 볼 수 없는 노릇.
왕의 집무실이나 사적인 공간에서 본 것들은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식 석상에서 봤다는 건, 여기서 논해지는 게 공적으로 회자 될 수 있으며, 그렇게 만들겠다는 의도를 지닌, 다분 정치적 개입 및 접근에 가깝다고 봐야 했다.
하물며 정기회의조차 왕이 참관했는가, 소집 및 주최를 그가 했는가 아닌가에 따라 마찬가지로 무게감이 달라진다.
철왕이 병마에 접어들면서 공적인 소집은 대체로 패왕녀가 주관하나, 패왕녀는 이를 공작과 궁재, 왕의 비서 겸 집사장을 겸하는 이에게 일임하곤 본인은 전쟁 군주 겸 장군, 기사단장으로서의 역에 충실하고자 했다.
사람이 제아무리 잘 났어도 여러 방면에 신경 쓰다면 집중력을 상실하게 되는 바, 이는 뛰어난 이일수록 더욱 확고했다.
뛰어나기에 다방면을 소화 가능하지만, 그러기에 하나에 집중하면 더한 시너지를 불러올 터.
알렉산더가 마케도니아의 왕이라 해서 원정 가서 이기고 마케도니아로 돌아와 평생 거기서 머물렀다면, 어찌 인도까지 원정을 나갔겠는가.
반대로 그는 복귀를 접고 지나친 원정 욕심 때문에 병사들에게까지 온갖 원성마저 사지 않았던가.
그러나 한편으론 이조차도 믿을 만한 측근이 있기에 가능한 것.
만약 내실을 맡길 이들이 권력 암투의 경쟁자였다면, 어찌 믿고 맡겼겠는가.
동양 국가의 재상직, 실제로 재상이라 불리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직위를 지닌 국가는 알그리타 내에서도 그리 많지 않은 형편이었다.
카일론이야 종교적 영향이 적으니 그나마 낫지만 다른 나라들은 아니었다.
일부 국가 중 종교적 영향을 짙게 받은 국가는 어쩔 수 없이 그 영향력을 이용하기 위해 각 종교의 대주교에게 선제후 직위와 함께 재상직을 맡기곤 했다.
그래야 종교적 입지를 강화함은 물론, 여러 가지 의미로 백성들과 귀족들의 지지를 원활하게 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로 인해 종교 인사들에게 좌지우지 되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철왕은 운이 좋은 게, 백성들도 그렇고 귀족들도 다수가 친왕파, 왕당파에 무려 최대 경쟁자가 될 뻔했던 형제, 공작조차도 그의 극단적 지지자였단 점.
거기다 왕국의 제일가는 무력을 지닌 플로란테 공작의 장녀가 무려 패왕녀인 알브레시아스 칼 에스클리오네.
장녀라곤 하나 사실상 양녀인데, 이는 철왕이 그를 평소에도 아버지 대하듯 대하며, 자신이 문제가 생길 시 그를 철왕인 자신과 동일하게 대우하고 존중하라 공식적으로 명했기 때문이다.
이게 살짝 애매한 건, 철왕 자신이 문제가 생길 시 동생이 왕위 계승자의 첫 순위가 되는 게 한편으론 타당하나, 이러면 성년에 이른 패왕녀의 입지며 영향력, 정통성 등에 문제가 생겨날 수 있다.
이는 자연적으로 권력의 분산을 야기할 거고, 자연스럽게 내부적 암투, 구질구질한 전개로 인해 단합과 통합에 가장 큰 악영향을 미칠 텐데, 그러기에 플로란테 공작은 스스로 은퇴해 은거하겠다 밝힌 걸, 철왕이 이런 식으로 엮어 패왕녀의 뒤를 받쳐주고자 한 셈이었다.
이건 다른 의미로 그를 전적으로 믿는다는 건데… 권력은 부모 형제하고도 나누지 않는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대단한 형제애가 아닐 수 없었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기에 한편으론 타국에서 형제가 권력 암투로 난리를 칠 때, 흔히 논하는 게 철왕과 플로란테 공작의 일화.
무엇보다 철왕은 약속했다.
‘훗날 구 제국으로부터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을 시, 그 영토는 플로란테 공작, 그의 것이 되리라.’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는 의문이지만, 왕이 대놓고 그렇게 선포한 시점에, 그것은 지켜져야 마땅했다.
안 지켜진다?
이후로 왕이 하는 말엔 신빙성도, 신의도 없어질 테니, 자신의 발언이 개소리로 취급되기 싫다면 그는 스스로가 한 말의 무게를 감당해야 할 터.
물론 철왕이 죽고, 패왕녀와 여왕으로 등극한 이후에도, 과연 이러한 약조, 선포가 이어질지는 의문이지만.
정치란 게 원래 그런 거 아니겠나?
거기다 혹여 그 약속이 지켜진다 쳐도, 현 플로란테 공작의 양녀이자 장녀가 또한 패왕녀가 아닌가.
…명분적으로 추후 그 영토를 그대로 왕가의 이름으로 삼켜도 전혀 하자가 없단 점.
아무튼.
‘굳이 알현실로 불렀다는 건….’
알현실만 따져도 족히 수백 평은 거뜬해 보였다.
운동회를 열어도 되겠는데?
카펫이 깔린 중심부를 제외한, 양옆만 해도 족히 수백은 거뜬히 수용하고도 남을 공간.
그런데도 넓게 깔린 카펫과 왕좌, 그 외에 각 위치에 따른 신하들의 좌석들을 포함하면 왕의 주변 공간은 더욱 과장스러울 정도로 넓은 형편이었다.
누군가가 왕에 근접할 수 있다는 건 언제든 암살의 여지가 있단 점.
그러기에 왕좌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조차도 최소 15걸음 정도의 거리였는데, 거기에 다시금 호위로 자리한 근위 기사가 왕좌를 사각형의 꼭짓점 부근을 에워 쌓듯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왕좌의 시야가 막히거나 할 일이 없는 건, 여기서 왕좌의 위치가 가장 높았기 때문.
계단이 무려 열다섯.
열다섯은 카일론 왕가에 있어 꽤 의미심장한 숫자였다고 한다.
그나마 계단 하나하나가 높지 않아서 망정이지, 하나하나 높았다면 왕좌에 앉을 왕을 보고자 할 때 고개를 쳐올렸어야 할지도.
물론 평소엔 어차피 고개를 바닥에 내려놓기 때문에 크게 부담을 가질 필욘 없었지만.
알현실에 들어서기 앞서 어떻게 절차가 이뤄지며 기본적인 예법 등을 철저하게 숙지 당했다.
사실상 알현실에 들어가 인사를 하기 전서부터, 속된 말로 기선 제압, 길들이기가 시작된 셈인데… 강단에 서거나 연예인이 공연 준비하기 전 리허설 하듯 이렇게 진행되니 이렇게 하세요, 자 해보세요, 아 여기가 틀렸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실례이고, 그 실례가 어쩌고저쩌고.
……왕을 본다는 게 뭐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판타지에서 대강 이계로 소환돼 배불뚝이 왕 보고 어쩌고저쩌고하고 물러서고.
나라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허례허식 엄청 따지면 귀족과 평민이 다르며 왕족이 귀족하고는 근본 자체가 다르다는 걸 명분 삼아 통치하는 이런 시기에 예법이며 허례허식은, 하나의 관문이자 통과 절차 같은 거였다.
이조차도 소화 못 하면 넌 여기 발 딛고, 머물 자격이 없다.
이해하기 쉬운 설명으론, 수능 못 보고 수시 못 붙으면 일류대 올 자격 없다~ 라는 예처럼.
…조금 설명이 구질구질한가?
그나저나 에드릭이 왜 구태여 반쯤 정신줄을 놓고, 시선을 카펫 바닥 쪽에 깐 채 이런 딴 생각에 잠겼는가 하면….
“코넬 경이 제안, 주청 드린 내용을 들어보건대 이에 대한 문제는 터무니없는….”
“자금이 해결된다곤 하나 부지를 설정하는 것도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옵니다. 이 문제까지 접어들면 들어가는 비용은 곱절로 이어질 터인데, 그 비용까지 감당한다는 발언이며 언급은 아직까지 없던 것으로….”
“성벽을 허물 순 없을 터인데, 아예 성벽 밖, 일부 특수 지구로 형성해서….”
“그렇다면 개척 사업까지 진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물들을 몰아내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말 그대로 저들끼리 북 치고 장구를 마구 쳐대는 중.
거기다 그 내용들이 하나 같이 이러했다.
‘그걸로 되냐? 돈 더 쏟아부어라!’
‘말 잘 했는데 하는 김에 선심 좀 더 쓰시지?’
‘개척 군주답게 배포를 보여라!’
그리고 철왕은 그들의 발언을 가끔 제지하고 중재하며, 너무 지나친 거 아니냐는 식으로 지적했지만….
‘말리는 시누이가 따로 없네.’
마치 이런 문제들 있으니 해결책 제시해보셈! 하고… 겉은 근엄한 척, 태연한 척 웃고 있으나 속으론 그런 음모의 미소를 띄고 있지 않을까 하고, 에드릭은 생각했다.
거기다 지금 여기엔 패왕녀마저 참관한 상황.
여전히 아름다운… 택틱컬한 칠흑색 전신 갑옷에 뿔 달린 투구까지. 아주 끝내주십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하아, 골 때리네.’
그렇게 해서, 본의 아닌 알현 신고식을 아주 제대로 때리고 있는 에드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