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화 〉60. 정치적 인간 연습.
“하이고….”
오랜 시간 시달린 건 아니어도 거진 2시간은 넘게 시달려서인지, 알현실을 나설 시점엔 진이 다 빠져버렸다.
자기들끼리 판 깔아놓고 북 치고 장구 치는 곳에서 적당히 무례하지 않게, 적당히 선 지키며 이쪽 입장을 밝히고, 의견을 피력하고, 조율하는 과정은 그리 순탄한 게 아니었다.
실수를 과장되게 질책하고 물고 늘어지질 않나.
인도적 접근을 통한, 감정적 호소에 가까운 제안으로 갑자기 끌고 들어가려 하질 않나.
다른 속셈이 있는 거 아니냐며 본심을 털어놓으러 대놓고 까대질 않나.
사소한 잘잘못에 구애되지 않고 그조차도 책임지려는 모습이 훌륭하다 뭐다 해서 부담을 한껏 안겨줘 자진해서 더 투자하게 만들려고 하질 않나….
벌어들인 돈이 많긴 하나 그렇다고 무한정인 건 아니다.
애초에 이쪽이 쏟아 부어대는 비용 외에도, 추가적 투입이 이어질 건데 이에 대한 선 선배 측이 투자자들을 어느 정도 끌어당긴다 치고, 대공사로 인한 인근 경제 활성화로 인한 시너지의 일부를 추가로 이쪽으로 돌린다 쳐도….
‘호락호락한 게 아니지.’
물론 여기에 가장 중요한 건 부지 선정이다.
당연 왕도 내부에 있어야 하는 게 정상.
그러나 왕도는 이미 포화 상태고, 확충을 한다 치면 성벽을 허무느냐, 그걸 유지하고 따로 입구를 트곤 다시금 성벽을 둘러 새로이 영역을 넓힐 텐가.
백성이며 외지인이 유입된다면 이쪽이 타당해 보이긴 했다.
이 경우도 복잡해지는데, 재개발 차원에서 기존에 머물던 일부 지역을 죄다 허물고 새로이 우리 쪽 시설을 짓는데 활용하고, 그곳에 살던 이들은 다른 영역 쪽으로 이주를 시킨다던가, 아니면 새로 넓히는 영역 쪽에 시설을 지음과 동시에 다시금 생활 시설, 시장, 거주 구역을 새로이 다질 텐가.
거기다 이주민들을 받는다 쳐도, 시기가 시기다 보니 광고며 홍보하기가 애매하니 이조차도 필시 시간이 흐를 테고… 장기적 준비를 통해 공사 인부 확보를 포함해 외지에 사전에 홍보 작업을 공고히 다지고, 대외적 공표까지 감행한다 치면, 정작 시설물 공사 시작도 당장이 아니라 못해도 1년, 늦어도 2, 3년은 뒤에야 첫 발을 내딛을 수 있을 거란 관측이 섰다.
알현실 쪽엔 전문가며 관리까지 참관한 상태였기에 이에 대한 논의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얕볼 수가 없네.’
판타지 세계의 국왕은 만두 국왕에 아무 생각 없는 뭐시기…라 생각하기 쉬우나 현실은 정말 치열했다.
‘더더욱 정치 참여를 안 해야겠군.’
부군이랍시고 혹여나 여왕을 대신해 잠깐이나마 통치며 어떤 일을 일임 받는다 치면 어떨까 하는 구상이 아예 없던 건 아니지만, 실제로 이런 걸 조율하고 제어하고, 중재하는 것만 해도 어지간한 눈치며 지식량, 통찰력이 없으면 아예 개입조차 못 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지식 정보가 부족해도 말하는 것들을 토대로 판단하며 중재하는 거야 어려운 건 아니다만….
‘자칫 왜곡된 정보나 선동에 휘둘려 뻘 판단 내리면, 그게 전부 국왕이며 입안자, 제안자들의 책임으로 넘어간다 이 말이지.’
그리고 그러한 소식은 귀족들을 포함해 백성들에게 스트레이트로 꽂혀 다시금 선동의 명분으로 쓰일 테고.
제아무리 국왕의 권위며 지지층이 확고해도 불만은 어디에나 있는 법.
그래서 권력자는 안심해선 안 되고, 우후죽순 솟아나는 불만 사항, 적대자, 불순분자를 꾸준히 추려야 하는데, 이게 조금만 지나치면 폭군, 독재자 되기 딱 좋단 말이지.
문제는 독재자며 폭군 본인은 그걸 알 도리가 없다는 거다.
뛰어난 통치자와 독재자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종이 한창 차이기에.
무엇보다 현재엔 뛰어나도 역사가 훗날 독재자로 정의 내리기도 하는데, 역사를 서술하고 작성한 이의 편견이나 성향이 그런 쪽으로 치우칠 여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것치고는 능숙히 대처하지 않던가.”
집무실이라곤 하나 접대 겸 접견 목적의 테이블이며 소파가 없는 건 아니었다.
최소 10명 이상은 수용하고도 남을 소파가 사방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중 나름 상석이자 주인의 자리라 명명된 단일 소파에 앉은 게 패왕녀.
여전히 갑옷 풀 무장에 투구마저 쓴 그 상태 그대로였다.
그리고 보란 듯이 그녀의 양 옆, 뒤편에 정립해 서 있는 두기사들까지.
심지어 이들도 투구까지 눌러쓴 전신 무장 상태.
알현실을 나선 뒤, 패왕녀의 부름에 그녀의 집무실 쪽으로 딸려간 에드릭은 정면이 아닌 좌측, 옆면의 널따란 소파에 엉덩이를 걸친 채 홀로 따스한 김을 뿜어대는 찻잔이 놓인 걸 멀뚱히 보다, 눈치껏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았지요.”
“그래, 운은 중요하지. 그게 전부일 순 없지만.”
왜 권력자며 부호들이 미신에 허우적대는가?
그들이야말로 그 운적 요소로 인해 흥망성쇠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많이 갈리는 부류들이기 때문이다.
은화 몇 개 다루는 이와 금화 수천 개를 다뤄대는 이들은 자그마한 실수, 실책의 경중이 일반적인 이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러다 보니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신경 쓰기 마련이고, 사건 사고가 터지면 그 피해에 대한 부담은 실로 천문학적.
그러다 보니 그런 미신적 요소며 종교적 요소에 많이 휘둘릴 수밖에.
단순 여행자가 폭풍을 만나면 어딘가에서 피해 가면 그만이지만, 수천 명을 대동한 상단이며 군대가 예고 없이 폭풍우를 만나면 이건 예사 문제가 아니었다.
“다들 개척 군주라 하여 귀공이 무례하고 야만적이리라 예측했건만.”
“눈으로 직접 목격하기 전까진,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일부는 그러한 세간의 평이 과장됐다 여기기도 했었지. 너무 움츠렸고, 위축된 감이 있다는 눈치기도 했으니까.”
“그 또한 좋지 않습니까.”
“하면?”
“상대로 하여금 절 어렵게 여기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경계를 사지 않는다는 의미 아닌지요.”
“그로 인해 번거로운 일을, 사사로이 맞이할 수 있음에도?”
“그거야 상황에 맞게 대처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아무 때나 눈 부릅뜨고 칼 들고 서성이는 미치광이보다는, 신사적이며 합리적으로, 명분에 걸맞게 발톱을 드러내는 쪽이 본래 훨씬 무서운 법.
동시에 그런 존재가 위협적이면서도, 멋들어진 법 아니겠나.
미치광이와 신사, 기사는 입장이 완전 틀리다.
상대가 얕보고 어쩌고 하는 거야 어차피 그들 사정.
안 보일 땐 나랏님도 욕하는 게 세상일 아니겠나.
그러나 그걸 대놓고 들이대면 이야기가 완전 틀려지는 거고.
질투야 인간의 패시브 같은 거니 그렇다 치자.
그런 감정조차 조절 못 한다? 오히려 그쪽이 더 고맙다.
물론 그조차도 이용해 소심한 척, 기회주의자인 척하는, 본질은 전혀 다른 존재가 훨씬 더 무섭겠지만.
정치 계통에선 그런 게 흔하다 하니, 기회주의자이며 속물인 것에 혐오감을 지니거나, 편견을 지니지 않은 편이 좋단다.
사실 그조차도 그가 이를 유도해 그런 인식을 지니도록 주도하고 계획한 것일 수도 있으니.
편견이 한 번 뿌리 박히면 이를 뒤바꾸는 게 그리 쉬운 편은 아니었다.
심지어 이건 죽을 때까지 유지되는 경우도 허다하고.
그가 진면목을, 본색을 드러내지 않은 한.
“그러한가.”
별달리 설명을 안 해도 이해한 듯한 낌새를 내비치는 패왕녀.
이건 좋다.
단순 몇 마디로 이쪽의 의도가 즉각 전달된다는 건.
부연 설명은, 설명이 필요한 이들한테 해줘야 하는 거고, 이건 이 자체로 설명자보다 식견이며 이해도가 부족하단 의미가 아니겠나.
그런 면에서 오히려 패왕녀보단 에드릭 쪽이 더 긴장해야 하는 건 확실했다.
“예를 논할 때도 존중에 대해 이야기했지. 이러한 발언이 몇몇 이들에겐 대단히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더구나.”
“기본 도리를 다했을 뿐이죠.”
“타자(他者)를 존중한다는 것이 밑지는 행동이라 착각하는 이들이 상당수이니, 그럴 만도 하겠지.”
알현실에 있던 당시 일부는 이러한 지적을 해왔었다.
‘개척 군주라 불리는 그대가 이리 공경한 태도를 내비치는 걸 우린 어떻게 받아 들여야 마땅하겠나?’
예컨대 너도 나름 군주씩이라 불리는 새끼가 왜 이리 저자세냐? 혹시 우리가 너 자극하고 까대고 있는 것도 제대로 눈치 못 채고 있는 거냐?
라는 의도로 대놓고 지적한 이가 있었는데, 이때 에드릭은 이리 답했다.
‘제가 군주로 불리며 위명을 떨치고, 업적을 쌓아둔 곳은 신대륙.
그리고 제가 발붙이고 있는 현재의 이곳은 카일론 왕국의 왕도, 카젠드라입니다.
무릇 그 땅의 주인이 정해져 있어, 그분의 혈통과 업적과 전설이 살아 숨 쉬는 이 땅 위에 제가 제 위업과 위명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것은 당연 예가 아닌 줄로 압니다.
이곳의 통치자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온전히 카일론 왕가의 주인이신, 에스클리오네의 이름을 이어받은 국왕 폐하와, 그분의 유일 후계자, 그리고 그런 그분들을 앞뒤로 받쳐주어 나라를 지탱해온 여러분들이라 저는 생각하옵니다.
저는 아직 적대자도, 우군도 무엇도 아닌… 지금의 저는 단순 내방자. 비를 피해 이곳에 온 자이든, 잠시 머물다 떠나갈 이라 한들 그가 집주인께 정당하며 정중히 예를 표해 머무는 곳으로부터 선처를 구하고, 양해를 구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대륙의 원주민들 또한 그러한 도리를 알기에 주인의 영역을 빌릴 일이 생기면 항상 극도의 예를 갖추곤 합니다. 저는 그러한 정신, 도리가 옳다고 생각해왔고, 그러한 올바름을 몸소 실천하고 있을 따름이온데, 이것으로 만족스러운 대답이 되었는지요?’
말은 길었지만 요약하면 이렇다.
나 잘 났다고 난리 쳐봤자 여기 너희들 땅인데 내가 여기서 나 알아달라며 갑질한다고 뭐가 좋냐?
내가 적이거나 우군이면 이걸 더 확실히 하지만 아직은 아니지.
그리고 원래 남에 집에서 기본 도리 지키는 건 신대륙 원주민도 아는데 너흰 혹시 몰랐수?
그리고 일부 해석을 과장되게 하면 이런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으리라.
‘여긴 너희 땅이니 당연 너희를 존중해야지. 내가 너희들의 적이면 또 모르겠지만.’
일부는 이렇게 또 해석하곤 했다.
‘날 너희 편으로 받으면 여러모로 좋을 텐데?’
같은 내용이어도 해석하기에 따라 내용이 천차만별.
그러나 여기엔 공통적인 의미 또한 당연 포함돼 있다.
“두려워 예를 표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도리이기에. 훌륭한 대처 아닌가.”
자기 체면을 낮추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존중하고 띄워주며, 더욱 자신의 품위며 품격을 드러내기까지 하니… 지닌 바가 적고 식견이 낮으며 품위가 저질적인 것들은 항상 자신의 잘남, 대단함을 내세우지 못해 안달인데… 세간엔 이런 이들을 일컬어 얼간이, 애송이, 머저리라 칭하곤 한다.
그가 혹여 정말 대단하다면, 그는 결실이며 실적을 내야 하고, 이것이 명약관화하게 드러나지 않은 한, 그건 결국 과시 욕구에 충실한 풋내기에 불과한 바.
“인간, 제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저 광대한 하늘에 비하면 자그마한 모래알에 불과하지 않겠는지요.”
그래서 이런 쪽에선 잘난 척하지 않으며 잘난 티를 내는 건데, 지금도 그렇다.
굳이 하늘을 비유해대는 것도 그렇고.
“하면 하늘을 전부 집어삼키면 되지 않겠느냐?”
“저는 해가 뜨고, 지며, 달이 떠오르고 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를 따르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한 사람이 패기와 광오한 포부를 드러냈다면, 한 사람은 순리며 순종을 표현했다.
이것만으로 이미 에드릭은 철저하게 부군으로서의 자기pr을 잘 표출한 셈.
‘하아, 피곤하다.’
그냥 직설적으로, 대강대강 이야기하면 오죽 좋나.
그러나 정치적 인간을 상대할 땐, 그러한 순수성이 때때로 잘못 오해를 사거나, 문제의 소지로 꼽힐 수 있으니… 을의 입장에 놓인 에드릭 자신이 맞춰가는 수밖에.
어쨌든 차 한 잔 마실 시간, 진땀을 빼며 애써 태연함을 가장한 에드릭이었다.
“아무쪼록 오늘 고생 많았다. 하면 다음 정기회의 때 보도록 하자구나.”
그리 말하곤 가보라 손짓했을 때가 돼서야, 에드릭은 속으로 안도했다.
‘아, 스트레스 장난 아니네. 오늘은 그냥 퍼 자야겠다.’
왕성에 붙들려 있기를 4시간 조금 넘은 상황.
…역시 익숙하지 않은 곳에 붙들려 시달리다 보니 몸이며 정신적 피로감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지.’
여기가 아니면 이런 경험 어디서 해보겠냐.
나름 RPG 게임 했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을지도.
정치적 인간 체험이란 건, 취향만 맞으면 이보다 재미있는 것도 없긴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