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화 〉60. 정치적 인간 연습.(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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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론은 비교적 예법을 비롯해 허례허식이 여타 국가들보다 간소한 편이란다.
물론 상대적 기준에서 간소하다는 거지, 실상은 전~혀.
일전 전투 참가를 비롯해 부군 경선에 참가한 이들이 모르는 사이, 수없이 많은 이들이 그 가운데 걸러졌다 한다.
그러기에 최초엔 경선 인원은 백 단위에 육박했으나, 현재는 걸러지고 걸러져 스무 명이 고작.
그리고 그들 가운데 쟁쟁하지 않은 이가 단 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는데, 그중 몇몇은 신분적으로 미천함에도 남아 있는 걸 보면, 가진 바 재주며 능력이 어지간히 탁월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에드릭이야 다른 이들에 비해 외부 활동을 가급적 삼간 탓에 인지도 측면에선 소문만 무성했는데, 연회에 참가하게 됨으로서 본의 아니게 제대로 얼굴이 팔리게 됐다.
지난번처럼 술 나르는 시종인 척할 수 없었기에 별수 없이 복장을 단정히 하고 참가하게 됐는데….
‘귀찮다.’
익숙하고 자시고를 떠나 피곤한 건 피곤한 거다.
왜 귀족들은 사교회나 무도회장에서 친분을 다지고 계획을 모색하며 사적인 이야기, 중상모략이며 음모를 꾸미는가?
우선 귀족은 아닌 거 같아도 무척 바쁘다.
일하는데도 바쁘고, 놀고먹는데도 바쁘다.
또한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 훈련 때문에라도 바쁠 테고.
시간이란 게 참 신기해서 남아돈다 치면 한없이 남아돌지만,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모자란 법.
거기다 왕성에서 알현실에 사신을 불러들이는 것과, 객실이며 집무실 쪽에 불러들여 공사를 논하는 건 의미가 완전히 틀린데, 귀족들 간의 만남 또한 이와 같다.
가뜩이나 바쁜데, 바쁜 시간까지 들여 파벌이 다르거나, 같다 하더라도 어쨌든 자기들끼리 만난다?
이 자체로 구설수에 오르기 딱 좋으며, 다른 의미로 음모론에 휘말리기도 아주 좋은 명분이 아닐 수 없을 거다.
예컨대 고위 귀족들은 행보 자체가 화제를 몰고 오며, 그로 인해 무수한 소문을 비롯해 각종 영향으로 번져 가는데, 그들의 모든 행사가 국가 간의 행사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치기에, 결국 그들의 행보는 모든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거다.
그나마 카일론은 왕당파, 친왕파가 확고부동한 국가니 이 점이 덜하지만, 정치적 분쟁이며 암투가 심한 곳은 이러한 눈치며 영향이 더욱 크게 작용한다.
그런 그들이 그나마 공식적으로 약속을 잡지 않고 만나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눌 수 있는 자리가 과연 어디 있겠나?
그러기에 사교회며 무도회장, 연회며 각종 파티 자리에서 그러한 것들을 해결하곤 하는데, 이는 굳이 왕이 주최하는 행사가 아니어도, 귀족들 내에서도 이런 행사는 흔한 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파티며 연회 등을 개최하고 주최한다는 건 자금이 상당히 깨져 나가는 짓인데, 그럼에도 이를 각오하며 여는 이유는, 그만큼 우린 잘 나가고 있다는, 일종에 이 시대에 걸맞은 위세를 홍보하고 광고하는 행위에 일환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맥, 일종에 인간관계 중 가장 윗줄에 해당하는 귀족 간의 관계가 이어지고, 꽃이 피어날 뿐 아니라, 영향력을 과시함으로써 지배계층은 지지 기반을 다지며 위세에 도전해오는 것들로 하여금 생각을 달리하게 만들 수도 있는 건데, 역으로 이러한 위세를 빌려 투자를 유치 받기도 하고, 새로이 충성 맹세를 해오는 기사며 가신을 받아들일 기회로도 작용하는데, 연회며 무도회, 사교회를 연다는 거 자체가 자본이든 영향이 확고하다는 거기에, 이 시대엔 의식주를 해결해주며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 가능한 주인을 모실 수 있느냐 없느냐가 또 무척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카일론이 용병의 나라라 불린다 쳐도, 결국 용병은 용병일 뿐이며 거기에 회의를 느끼고, 다른 의미로 출세를 보장받거나 노리고자 하는 이도 있을 터.
그런 이들은 결국 귀족의 휘하로 들 수밖에 없으며, 그들 또한 당연 선택을 위한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귀족에 대해 그들이 알아봤자 얼마나 알겠나?
유서 깊은 가문이야 그 자체로 이름이 드높으니 그렇다 쳐도 아닌 곳들은?
그나마 근본 없는 기사 지망생, 후보자들이 노릴 곳이 있다면 신생 귀족들인데, 새로이 발돋움하는 가문이라 하여도, 잘만 하면 핵심적인 위치에 자리매김도 가능할 뿐 아니라, 대대로 이어갈 가신단에 속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그들로서도 기회라 볼 수 있을 터다.
그리고 이조차도 설명하고자 치면 아직 시작에 불과한데….
어쨌든… 복잡했다.
일일이 고려하자면 정말이지 끝이 없다.
별거 아닌 거 같아도, 그런 문화며 관례가 고리타분할지라도 퍼져 나가 정착된 연유엔 다 그럴싸한 이유가 있는 건데….
솔직히 머리 아파서 면밀하게 알아보고픈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
그런 의미에서 에드릭의 경우엔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 특이한 케이스지만.
여기에도 여러 사정이 얽혀 있었지만….
적당히 사람들을 상대하다 결국 외부로 도망치듯 튀어나왔다.
“번거롭기는….”
아르세이유에 있을 당시에야 이런 걸 일상이라 받아들이곤 했지만, 확실히 파라메라 대륙에서 구른 게 영향을 꽤 많이 받았는지, 이젠 이딴 것들이 죄다 고리타분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화끈하게 들이받고, 싸우고, 화통하게 웃으며 술이나 퍼대는 게 대가리 굴릴 일 없어 마음이 편하긴 했지.
그리고 다음 날이면 아무렇지 않게 화합하고….
…술 퍼마신 상태로 취기 오른 채 떡 줄기차게 치는 것도 그럭저럭….
“크흠!”
연회는 내부 뿐만 아니라 외부 정원으로까지 연계된 상태라 외부로 나와서도 꽤 많은 귀족 남녀가 한데 어우러진 상황.
거기다 일부는 인적이 조금만 드물어지면 서로 부대끼고 떡이라도 칠 것처럼 분위기들이 제법 그윽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등불이며 조명, 불빛이 닿지 않은 부근에서 은밀한 소리들이 들려왔지만, 은연중 무시하는 듯 그 인근으로 사람들이 향하지 않는 것도… 생각해보면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왕성 내부에서 저런다고? 저거 불경죄 아닌가?’
…그래도 남 일이고 정의니 불의를 따지고 할 뭔가도 아닌 만큼, 에드릭도 구태여 거기에 엮일 생각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 인적이 드문 곳에 가면 뭔가 낭만적인 만남이 있다거나 할지도 몰라 은연중 사람 안 모인 부근, 거기다 배경도 적절한 위치를 물색하고자 차분하게 주변을 둘러봤는데….
‘없네.’
어딜 가든 사람이 보인다.
귀족이 안 보이는 곳엔 시종이며 시녀들이.
조금 더 나가니 병사들마저 보인다.
낭만은 개뿔.
인사 나눌 사람들하곤 다 인사 나눴고, 자꾸 사람들이 달라붙는 것도 귀찮으니 슬슬 자리를 뜰까 싶었는데….
“마치 몸에 안 맞는 옷을 억지 삼아 입은 것처럼 보이네요?”
“어…?”
익숙한 목소리에 불쑥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칠흑색 전신 갑옷을 몸에 걸친 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패왕녀 본인은 아니었다.
“팀장님?”
“쉬잇.”
수려한 칠흑색 철제 글러브가 끼워진 손, 그중 유독 가느다랗게 느껴지는 검지를 펼쳐 투구의 입 부근에 가져간 그녀가 자그맣게 주의를 덧붙였다.
“여기선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않나요?”
“아, 예….”
검만 없다 뿐 전신 무장 상태다 보니 사람들 눈길이 단번에 몰려든다.
갑옷을 입었음에도 체구가 여타 기사들에 비해 다소곳하게 느껴지는 건 무슨 연유인지.
“어차피 나서려던 참이면, 객실까지 조금 걸을까요?”
“예, 물론이죠.”
바라디 마지않은 일 아니겠나.
무작정 자리를 뜨는 건 그렇기에, 몇몇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연회 장소를 빠져 나왔다.
“여기서 머무는 일들은 어때요?”
“…그냥 그렇죠.”
“대우를 제법 좋게 받고 있는 걸로 기억하는데요?”
“운이 좋았죠.”
“사업 제안을 걸어 호감 및 관심을 사는 건 제법 바람직한 방법이었어요.”
“…….”
괜스레 가슴이 찔렸다.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논리는, 상대가 나로 하여금 얼마나 커다란 이문을, 이득을 안겨줄 것인가, 겠지요. 특히 권력자에겐 그것이 전부라 해도 과언은 아닌 만큼.”
“…….”
“허나 무작정 퍼주기 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짐작하고 있지요?”
에드릭이 즉각 답했다.
“예. 당연 퍼줄 생각은 없습니다.”
“혹여 부군이 되지 못한다 쳐도, 이를 빌미로 이곳에 온 김에 사업 확장도 겸하고 말이죠. 기왕 여기서 시간을 소비하기로 했으니, 그런 식으로라도 보험을 들어놓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요. 가진 것들을 일방적으로 밑 빠진 독에 쏟아붓는 게 아니라면.”
“현지 문제가 있다 보니, 제아무리 의욕이 앞서고 우리가 준비됐다 쳐도, 이쪽에서 지연시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긴 하겠죠. 그래도 저들도 바보가 아니니 이쪽 메리트를 아예 모르진 않을 테고….”
“메리트를 알아도 정치가 엮이면 그 메리트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하잘 것 없는 실리를 따져야 할 때가 있는 법이랍니다.”
“…그 말씀은?”
거기서 살짝 대화의 흐름을 지연시킨 멜크리우스, 윤미라 팀장은.
“일이 완전히 결정지어지는 그 순간까지, 낙관하는 일은 없도록 하세요. 되면 하고 아님 만다, 큰일일수록 그로 인한 여파는 거대하게 엄습하는 법이랍니다.”
“…흐음.”
무언가 힌트를 주고자 한다는 건 확실한데….
“여기까지만 말해주면 대강 알 거라 보고….”
얼마 걷지도 않은 거 같은데, 벌써 객실 건물 인근이었다.
아니, 진짜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내부에선 현재 부군 경선이 반쯤 진행된 걸로 취급하고 있어요.”
“벌써요?”
제대로 뭐 시작한 거 같지도 않았는데? 역시 다른 의미로 지켜보며 관찰하는 게 평가의 반절은 잡아먹고, 뭐 그런 건가?
“후보를 명확하게 정의했으니, 이제부터 제대로 진행될 거라 봐요. 이에 대해선 따로 힌트를 주지 않겠지만, 잘 할 수 있으시죠?”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좋아요.”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그러면 조만간 또 보기로 하죠. 혹시라도 보고가 늦은 거에 대해선 크게 걱정 안 해도 되요. 중요한 건은 알푸스 쪽에서 알아서 보고를 건네오니까요.”
알푸스, 철영 선배의 이쪽 아바타 이름 중 하나.
에드릭이야 에드릭 하나만 사용하지만, 철영 선배의 경우는 근래에 와선 대략 3개 정도의 아바타를 다룬다고 들었다.
…하나도 피곤한데 대단도 하시지.
떠나가는 팀장님의 무심한(?) 모습을 끝까지 배웅하며, 에드릭은 뭔가 뒤숭숭한 기분을 대충 수습하곤 객실 방으로 들어섰다.
“…….”
별로 생각이 없었음에도, 팀장님을 보고 나서 그런 걸까. 이대로면 도저히 잠이 올 거 같지 않아, 애써 술을 반 잔 정도를 더 입안에 흘려 넣는 에드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