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화 〉61. 상대 평가 + 반가운 인연.(2)
“…뭐 길 익혔다 치지.”
지도도 없고, 말로만 물어서 성 내부를 이동한다… 라는 건 어쨌든 재미난 경험 아니겠나.
거기다 게임상으로 접했던, 형식적인 공간이 아니다 보니 모든 구조가 필요에 의해 구성돼서 그런 걸까, 실감이 장난 아니었다.
‘아니, 전부 진짜 맞잖아.’
여기서 지낸 게 몇 년째인데 아직도 rpg하는 마인드로….
…딱히 나쁜 건 아니니, 향수병 안 걸리고 즐길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을지도?
노크 뒤 멍 때리며 그런 생각을 하자.
들어오너라! 하는 목소리가 울려 무심코 문을 여는데….
기분 탓인가,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고….
그렇게 문을 열기 무섭게 내부에서 풍기는 향은… 뭐랄까.
가죽과 잉크, 그 외에 장작이 타는 향기 같은 게 복잡하게 뒤섞여, 내려앉은 먼지와 함께 혼합돼 흘러나오는 듯한, 실로 기묘한 향기였다.
그러나 거기에 신기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왔구나.”
집무실 책상에 앉아 느긋하게 시선을 들어 이쪽을 마주해오는 이를 보곤, 무심코 입을 벌리고야 말았다.
아, 하는 감탄사는 덤.
간소한 복장이긴 했으나, 남성들이 입을 법한 상·하의가 구분된 복장.
특히 하의가 편의성에 치중된 바지라는 게 포인트다.
종교적 이유로 일부 국가에선 자국민 기준, 여성이 바지를 입는 것에 대해 죄를 묻기까지 할 정도인데, 카일론에선 그 부분이 문제가 없다 쳐도, 훈련 및 작업 등에 동원될 때가 아니면 대체로 무릎이 보일락 말락 하는 롱스커트를 입는 게 기본이기도 했다.
애초에 바지보다 그게 더 편하기도 했고.
아니, 그보다….
“어……?”
“오랜만이지 않냐? 하하하하!”
너무 뜬금없이 보게 된 탓일까. 순간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야 말았다.
당황한 에드릭이 잠시간 말문을 열지 못한 채 눈만 붕어처럼 깜빡이다 뒤늦게 반응했다.
“잠시만요. 제가 잘못 본 건 아니겠죠?”
“꿈인가, 생시인가? 그게 고민되나?”
의자를 뒤로 밀어 몸을 일으킨 그녀가 책상을 돌아 터벅터벅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타오르는 듯한 갈색 머리.
이전에 봤을 땐 색감이 조금 더 어둡고 거친 인상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타오르는 노을과 같이 반들거리고 있었다.
거기다 과거엔 엄청 키가 크게 느껴졌으나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에드릭 쪽 키가 큰 상황.
무엇보다….
얼굴의 한쪽을 가리다시피 자리하고 있는 안대가, 이전처럼 형편없는 가죽이 아니라 흑색 바탕의 실크로 바뀌어 세련되게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 무척 눈에 띄었다.
“설마 우리 꼬마가 이렇게 성장할 줄이야. 세상일이란 늘 그렇지만 경이롭기 이를 데 없군. 안 그러냐?”
“여기 계셨던 거예요? 대체….”
그 뒤로 소식이 뜸해진 게 아니라 완전 두절된 직후 좀 걱정했어야지.
소식을 어찌 알아보려 해도 알 수 없게 된 것도 내심 걸렸는데… 확실히 머리 색이 바뀌고 외모가 일부 바뀌니 완전 딴 사람처럼 느껴졌다.
크게 바뀐 건 없어 보이나 머리 색하고 헤어 스타일 하나 바뀐 걸로 이렇게 인상이 변할 줄이야.
그렇다 해도 저 안대 때문에라도 몰라볼 수가 없을 거 같은데?
“그럼 뭐예요? 브리앙르란 이름은 가명이었던 거예요?”
“가명이라기보다는 서부 지역 발음으로 브레나임을 유사 모방해서 차용한 거지.”
“그럼 본명은…?”
이미 알고는 있다.
오면서 이런 세세한 건 죄다 접했으니까.
그러나 그녀 입을 통해 직접 소개받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 아니겠나.
그러기에.
“파스티나 멜 브레나임. 내가 일전에 말하지 않았나. 그럭저럭 집이 먹고는 사니 문제는 없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도 대강 믿기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 규모의 가문이 배후에 자리하고 있을 거라고는….
“어쨌든 잘 왔어. 네가 이곳에 온다 했을 때, 솔직한 심경으로 운명마저 느낄 정도였는데.”
그러고서 하는 말.
“부군 경선 떨어지면 우리네로 와. 왕태녀 님께서 기회를 낚아채지 못하신다면, 내가 그 자리를 대신 할 수도 있는 거니.”
이전에 보았을 때 보다 더욱 성숙해진 그녀는, 한쪽 눈만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에드릭을 향해,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만면에 선보였다.
“이렇게 서서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예가 아니니… 안으로 들지. 날도 슬슬 쌀쌀해지는 시국이니.”
에흠! 하고 애써 정중한, 그러면서도 무게감 서린 목소리로 말투를 달리하나, 그녀 특유의 투박함이 느껴지는 표현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상일이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여기서 브리앙르를 만나게 될 줄이야.
…그래서였을까. 시작이 좋다고 에드릭은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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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에게 술을 가져오라 이야기한 브리앙… 아니, 파스티나가 집무실을 떠나선 접견실도 아니고, 자신의 방으로 에드릭을 안내했다.
“만나자마자 술인가요?”
“그게 북부의 방식이지.”
카일론 기준으로 여기가 북부는 맞으니… 그렇다 치고.
카일론이란 나라 자체가 알그리타 대륙 기준으론 동부 지방에 해당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론 동북방.
왕도 카젠드라는 그런 카일론 내에서도 남부에 위치해 있는데, 지정학적 위치 외에 강이며 뱃길의 메리트 때문에 아무래도 그곳을 고른 점도 있겠지만….
‘분쟁지에서 많이 떨어져 있기도 하고.’
산맥 덕분에 적대국이 산맥 건너편에 있기에 쉽사리 침입도 불가한 상황.
단순히 지형만 험하면 그렇다 쳐도 마물들이 득실대는데, 애초에 카젠드라에서도 연례행사 마냥 마물 토벌을 해대고 이를 바탕으로 축제까지 여는 마당이니, 험한 지형과 범람하듯 생겨나는 마물들이 명확한 방파제로 작용하는 건 아닐지.
반면 이곳, 브레나임 령은 철저하게 인간 대 인간, 인간 외에 이종족들 간의 분쟁이 범람하는 지역이라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평야 지대가 중립지대로 정의된 문제도 한몫 단단히 했지만, 계절의 변화와 함께 말들을 먹일 풀들과 지내기 좋은 위치로 옮기기 위한 유목 부족들이 한동안 그곳에 거주를 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
다행히 부족 간에 불화가 잇따라 자기들끼리 싸워대서 그렇지, 통합한다면 우리 시대의 칭기즈칸 급은 아니어도, 고대 북방,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초원 깡패들 마냥 주변을 공포로 물들일 건 명확했다.
‘이래서 카일론 북부는 기사들보단 전사나 사냥꾼 쪽 비중이 높다 했던가?’
숙련된 궁기병 앞에서 중무장 기사는 먹잇감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경무장한다 해서 사태가 호전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기에 브레나임에선 이들을 상대할 때면 기마 전차에 전투 마법사를 태워 마법 폭격을 때린다는데, 문제는 마차 속도가 정신 나갈 정도로 빨라 처음 거기에 타는 마법사들은 속 내용물을 게워내기 바쁘단다.
근데 그렇게 안 달리면 초원 부족의 과녁 밖에 안 되니, 살려면 부지런히, 미친 듯이 날뛰어야 한다 했던가?
단순 유목 부족의 활 솜씨도 눈이 돌아갈 정도인데, 초원의 엘프라 불리는 것들은 정령술까지 더해 일반적인 사격 거리에 최소 1.5배는 더 멀리 쏘는지라, 사실상 말 위에서 초장거리 저격을 해댄다 봐도 무방할 지경이란다.
‘개무섭네.’
활로 고정된 타겟을 정밀 사격으로 맞춘다 치면 1km는 거뜬히 넘고, 심하면 이상도 무난히 가능하단다.
그러다 보니 움직이는 말 위에서 겨눠서 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데, 이걸 또 정밀하게 타격하려 하니 그때부터는 거리가 좁혀지나, 이건 그들 기준에서 아쉬운 거지, 상대적 개념에서 이미 적수가 아닌 이들 기준에선 괴물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보통 그들 부족들이 평야 지대에 자리 잡으면 인근 국가와의 국지전, 신경전을 포함한 단순 분쟁조차도 멈추고 잠자코 지켜보는 게 암묵적인 룰.
그러다 재수 없게 유목 부족끼리 안 싸우고 합심해서 약탈하고자 하면 아주 골치 아파진다.
‘…그리고 그 시기가 얼마 안 남았단 말이지.’
여기선 가을이어도 저들 기준으론 여기조차 따스한 편이란다.
어쨌든 평야에 널린 말 먹이 등이 죄다 얼어붙어 황무지가 되는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그게 부족하다 치면 주변 나라며 마을, 인근을 약탈하면 되는 거니.
예컨대 척박한 곳에서 자리를 떠서 몸도 녹일 겸, 보급품도 챙길 겸 주변을 휩쓸고자 하는 게 저들의 목적이다 이 말인데….
큼지막한 나무잔 한가득 담긴 건 검은색 액체.
흐릿한 거품도 꽤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음?”
“브레나임 명물, 검은 핏물이다.”
“검은 핏물?”
자료상에 있긴 했다.
병사들이 마신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는데, 간단히 언급된 정보라 실물로 보는 건 처음.
건배와 함께 어쨌든 그걸 입안으로 밀어 넣자….
‘맥주?’
도수도 꽤 된다.
거기다….
쓴맛에 뭔가 그윽한 맛이 있는데… 중간에 훅하고 올라오는 쇠 비린내는 대체….
‘아, 이래서 핏물 소리 하는 건가?’
피를 핥거나 맛보았을 때 느낄 특유의 꺼림칙함, 쇠 비린내가 혀를 타고 코 안쪽으로 훅 올라오는 게 무척…….
“크으!”
아니 근데… 이게 왜 시원스럽게 느껴지지? 미친 건가?
“어떤가?”
“…꺼림칙한 맛인데 목에는 잘 넘어가네요.”
“하하하! 그게 묘미지!”
나중에 고기나 여타 음식하고 먹어봐야 조금 더 판단이 될 거 같기도.
아닌가? 이건 그냥 술맛 자체로 뻐기는, 뭐 그런 종류인가?
“땀 쭈욱 빼고 마시면 이게 또 색다른 맛이 날 거다. 입에서 안 받는다면 몸이 편안하다는 증거이니.”
즉, 술을 뭔 보양식 겸 스포츠음료 느낌으로 마신다는 것처럼 들렸다.
성의가 있으니 어쨌든 나무 컵에 든 내용물을 쭈욱 다 마셨는데, 벌써 정신이 오락가락해왔다.
‘도수 장난 아니네.’
도수가 꽤 강했지만 이게 첫 잔엔 그러려니 했는데 두 번, 세 번 기울여 전부 내용물을 비우니 갑자기 훅 하고 치고 들어왔다.
술을 그다지 안 즐기기에 이런 경험이 그리 유쾌하진 않지만… 그래도 성의가 있으니 취기를 무마하는 등의 요령을 피우진 않기로 했다. 그러면 티도 확 날 테니….
“하하하! 좋구나! 좋아!”
그리 웃고는 본인도 술을 확 들이킨 그녀는.
“오랜만에 만나 참으로 기분이 좋구나!”
“…여태 어떻게 지내신 건가요?”
“그건 차차 이야기해줘도 되니 지금은 잠자코 있어라.”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선 맞은편에 앉은 에드릭이 있는 부근으로 은연중 테이블을 무릎걸음으로 타고 와 얼굴을 불쑥 내미는 게 아닌가.
“그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게 있지 않더냐?”
“…….”
“흠! 이곳에 지내다 보니 말투가 조금 엄해진 건 그냥 그렇다고 쳐라. 습관이라 고치기 번거롭다. 우리 사이에 이 정도야….”
이어 완전히 테이블을 타고 내려와 에드릭의 옆에 떡하니 앉아 몸을 기대오는 그녀.
“어디, 오랜만에 네가 못 본 사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해보도록 할까?”
그러고는 기대감이 서린 눈으로 특유의 서글서글한 미소, 그러나 눈에 드리워진 강렬한 애욕을 발견한 에드릭은.
“바라시는 대로.”
차분하게 달라붙어 오는 그녀의 몸을 받아들이듯 스스로도 그곳에 몸을 기댄 채로, 접근해오는 그녀의 얼굴을 맞이하듯 거칠게 입술을 포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