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화 〉61. 상대 평가 + 반가운 인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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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락의 도시 아즈라엘.
그리고 그곳에 자리한 에라힘에서 당시 로메리스의 소개로 알게 된 그녀.
이후 아르세이유에 처음 발을 들이던 시점까지 호위 명목으로 함께 했고, 그 이후로도 인연이 이어져 체력 단련 겸 호신술 선생이라는 명목으로 다시 함께 했다가 친해져 몸까지 섞고….
불현듯 떠나지 않았더라도 아마 진득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진 않았을까.
그 정도로 당시 분위기는 제법 끈적하면서도 진지한 면이 있었다.
이후 슬슬 일에 치이고 바쁘게 휘둘리다 파라메라 대륙으로 향하고….
생각은 드문드문 났지만, 그렇다 해서 찾으려 노력하진 않았었다.
인연이 있으면 또 볼 것이고… 어쨌든 과거에 집착하기 앞서 현재에 치중하는 편이 마음에도 편했고.
아마 알리샤 누님과 에우리에와 비슷한 명목으로, 아르세이유에 있던 당시 가장 최초로, 진한 관계를 이어온 덕분이 아닐까 싶었다.
집착하고, 사랑하고, 애정을 쏟다 보면 결국 더욱 거기에 빠져들게 되는데, 결혼이고 정착이 불가하다는 본사 규정 때문에라도, 그런 식으로 집착하고 빠져드는 건 새삼 번거로울 수밖에.
그래서 더 노력하면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일부러라도 마음을 내려놓고야 말았다.
그렇게 잊게 되는가 했는데… 수년 만에 예측 못 한 시점에 재회해버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제부터 한동안, 얼굴을 맞대고 지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는데….
만나기 무섭게 회포를 푼다는 명목으로 몸을 섞은 둘은… 서로가 다른 의미로 놀라게 됐다.
‘잘 버티시네?’
보통 자신의 물건에 박히면 좋은 의미로 눈이 돌아가는 게 보통인데도, 그녀는 제법 잘 버티는 편이었다.
그뿐인가.
‘뭔 성욕이….’
혼자서 거의 몇 사람분의 강력함을 선보이시는 게 아닌가.
거기다 브리앙르, 아니 파스티나는 그렇게 즐긴 다음에도 딱히 혼절한다거나 널브러지는 기색도 없이 곧장 의식을 되찾더니, 마치 낮잠이라도 잔 것처럼 더욱 개운한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닌가.
“영주님은 내일 중에 오실 예정이니 오늘은 편히 보내면 된다. 시간 난 김에 내가 직접 이 일대를 안내해주도록 하마.”
그러고는 성 내부를 둘러보고, 성을 나서서 도시도 둘러봤는데, 전부를 둘러보진 못했지만 어쨌든 대강 둘러 보는 정도만으로 해가 곧장 내려앉기에 이르렀다.
횃불을 둘고 주변을 순찰하는 경비 인원들을 뒤로 한 채 다시금 영주성으로 돌아온 둘.
“야밤에 돌아다닐 땐 반드시 횃불을 들거나 주변을 밝히는 마법 도구, 마법 등을 사용할 것. 그런 거 없이 돌아다니면 경고 및 벌금이 부가 되니 이 점은 잊지 말기 바란다.”
뒤가 구리지 않은 한 빛 한 점 없는 거리를 구태여 은밀히 싸돌아다닐 이유가 없을 테니.
“통행 자체는 문제 없는 건가요?”
“그래. 하지만 경비들이 신원을 물을 시 신분증을 포함해 자신을 증명할 것들을 준비하는 게 좋을 거다. 이건 내일 중으로 도시 내에서 사용 가능한 자체 신분증을 발급하라 명해둘 테니 수령해서 잊지 않고 소지하고 다니거라. 잃어버리면 골치 아프니.”
“알겠습니다.”
그 외에 어떤 식으로 이곳에서의 생활이 굴러갈지에 대한 간단 조언이라던가.
“에드릭, 네게 주어질 시험들은 영주님이 직접 내릴 예정이니, 궁금하거나 의문점이 있다면 그때 말해두면 좋을 거다.”
그리고 새삼 덧붙인다.
“제안 사항 등도.”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까도 그렇지만 많이 어른스러워졌어. 일전의 꼬맹이는… 이제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서… 조금은 섭섭하기도 하구나.”
“누님 앞에선 전 언제나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꼬맹이인 거 아시면서 그러시네요?”
“말은 잘하는구나.”
피식 웃은 파스티나는.
“마음 같아선 다시금 내 방으로 초대해 재차 회포를 풀고 싶지만… 슬슬 눈치가 보일 거 같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파하고… 내일 식사 자리에서 다시 보도록 하자구나.”
그러고는 어딘가로 손짓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시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아이가 당분간 네 직속 시녀로서 널 보필할 거다. 필요하거나 궁금한 사항, 그 외에… 무언가가 있다면 이 아이에게 묻고, 요청하면 될 거다.”
“배려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무슨.”
피식 웃고는 별다른 작별 인사 없이 손만 휘저으며 등 돌려 사라진 파스티나.
이윽고 둘만 남은 복도에서 잠시 멀뚱히 시녀에게 시선을 주자, 주근께가 서린, 그럼에도 제법 미모가 출중한 시녀가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수그렸다.
“전 에드릭 코넬이라 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대의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말씀 편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미셀. 일개 시녀에 불과하니 편히 대해주시기를.”
“비록 봉사를 요청하는 입장이라 하여도 기본 예를 표하는 건 당연한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짐승도 하물며 선의를 베풀면 기뻐하여 머리를 쓰다듬어달라 고개를 내미는데, 하물며 사람 아닙니까. 미셀, 당신이 이곳에서 일하는 시녀라 하여 저는 당신의 인격과 존엄을 무시하고, 훼손하고 싶지 않습니다. 미셀 당신이 스스로의 본분을 다 하듯, 저 또한 기본적인 예를 다해 봉사를 받을 테니, 혹여 불편한 사항이나 주의 사항, 또 제가 숙지해서 좋을 법한 조언 등이 생각나면 편하게 말해주시기를. 아시겠습니까?”
“예, 예에! 여부가 있겠나이까!”
“좋습니다! 그럼 우선… 오늘은….”
은연중 말끝을 흐린 에드릭.
어두운 복도, 타오르는 불길과 창을 통해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가나, 그다지 불편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다만 아무도 없는 복도 한가운데에 남녀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묘한 분위기를 형성하기엔 사뭇 나쁘지 않긴 했지만… 구태여 이 이상 오해를 불러일으킬 무언가를 취할 필요는 없겠지.
밝은 갈색 머리의 소녀, 미셀이 당황하지 않도록 에드릭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제가 머물 객실? 맞나요? 어디로 가면 좋을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무, 물론입니다! 그러라고 제가 있는 거니… 절 따라오시지요.”
딱 봐도 10대 중반대 소녀는, 아직 세상 물정에 어두운 듯 보였지만 시키는 일만큼은 의욕적으로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왜 이런 젊은 소녀를 내 직속으로 배치해준 걸까? 알다가도 모를 일일세.
객실로 들어와 랜턴 불을 밝히고 방을 나선 그녀를 가벼이 배웅한 나는, 이윽고 이곳에 도착했다는 실감과, 반가움에 미처 오랜 기간 넋 놓고 여기까지 이동해 왔음을 그제야 자각하기라도 하듯, 긴장이 풀리기 무섭게 피로감이 단숨에 밀려 들어왔다.
“지치네.”
체력이 갖춰진 것과는 별개로 이건 여독이라고 할까, 익숙지 않은 환경에 놓여 심적 부담, 긴장감이 더해진… 일종에 그런 피로감?
누구든 새로운 환경에 놓여 미지의 나날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접하면, 기대감과 한편으론 불안, 심하면 공포마저 느끼기 마련인데, 이건 그로 인해 파생된 부담감에 해당하리라.
에드릭이 제아무리 겉으론 태연함을 가장한다 쳐도, 개척 군주니 뭐니 불린다 쳐도 실상은 평범한 청년, 중년으로 향하고 있는 그런 나이 대의 사내가 아니겠나.
…에드릭의 몸이야 아직도 파릇파릇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러고 보니 한참 지났구나.”
처음 브리앙르와 함께 아르세이유에 온 나날로부터 벌써 몇 년이 지난 건지.
오랜 인연을 보게 된 탓일까. 괜스레 과거적 기억이 샘솟아 괜스레 감성에 젖어 드는 듯 느껴져, 궁상 떨기 전에 후딱 잠이나 자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다 지난 일인데.”
추억 정도로 족해야지, 거기에 집착해 그리움을 가지다간, 궁상 밖에 더 되겠나.
찬란한 과거, 유쾌하고 즐겁고… 흥겨웠던 과거는 두고두고 떠올리며 곱씹어대기 마련이지만, 현재가 더욱 찬란하며, 미래가 더욱 스펙타클하고, 흥미로울 거란 확신을 지닌 에드릭으로선, 그저께보단 오늘을, 오늘보단 내일을 더욱 갈구하고, 기대하는 형편이었다.
미래가 불투명하더라도, 확신이 있고 자신감이 있다면 미래는 반가운 손님처럼, 언젠가 당도하게 될 그 날처럼 기쁘기 그지없는 시간이 될 거다.
그래, 비유하자면 고대하다 주문한 택배를 받을 때 느낄 법한 그 기분?
그러나 불우하고, 인생이 답도 없다 여기며, 미래가 좀처럼 예측되지 않으며, 불안불안할 때면… 그건 택배가 아니라 빚 독촉장처럼 느껴질 거다.
공통점은 둘 모두, 언젠가는 온다는 거다.
어떠한 이변이 일어나지 않은 한.
그러한 잡 생각을 품다 잠든 에드릭.
무심코 눈을 따기 무섭게, 창밖이 밝아짐과 동시에, 거기서 흘러든 빛이 객실 내부를 밝히는 걸 보곤 무심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생각해보니… 여기 방 더럽게 좁네?
양팔 벌려 열 걸음 조금 넘게 걸으면 그게 끝인 정도.
그나마 테이블이 있고 침대가 있으며… 어쨌든 쉬는 것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방보다는 낫다 쳐도….
“뭐, 주제에 맞게 살아야지.”
공짜로 빌려주는 게 어딘가.
이윽고 기다렸다는 듯이 노크 소리가 들려 들어오라 말하자, 어제보다는 조금 침착해진 시녀, 미셀이 세숫대야 같은 길쭉한 나무통을 들고 내부로 들어섰다.
“잘 주무셨습니까?”
“예, 덕분에요.”
의례적인 아침 인사와 함께, 에드릭은 이후 세면 용도의 도구를 따로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곤, 정령술을 활용해 세면 및 양치, 머리를 감는 모습까지 덩달아 보여주곤.
“아, 수건 정도는 가져와 주세요. 깨끗한 녀석으로요.”
이리 덧붙이며 그녀의 수고스러움을 일부 덜어주게 된 부분에 작게나마 만족감을 느끼며, 아침 식사를 함께하고자 자신을 호출했다는 파스티나의 소식을 접하곤, 아직도 브리앙르란 이름이 훨씬 익숙한 그녀가 자리한 곳으로 향하고자 시녀 미셀을 따라 가벼운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왔느냐?”
“예, 왔습니다.”
얼굴만 봐도 웃음이, 미소가 흘러나온다.
별거 아님에도 피식하고 웃은 둘은.
“앉아라. 간밤엔 어땠고?”
가벼운 식사로 배를 채워가며, 화기애애하게 다시금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