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화 〉64. 예상, 계획은 늘 빗나가기 마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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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 내에 자리한 정원.
실내에 자리한 인공 정원의 정중앙엔 다채로운 꽃과 맑은 물이 솟아나는 분수 형태의 호수가 보기 좋은 크기로 자리하고 있었다.
여인네들이며 귀부인들이 때때로 티타임을 가지며 한가로이 세월을 낚는 장소이기도 한 곳이나, 현재 그곳은 칙칙한 검은 갑옷을 입은 이들이 셋. 그리고 편안한 차림새로 앉아 있는 장년인과 그 뒤를 받치듯 자리하고 있는 백은색 갑옷을 걸친 이가 하나.
이 가운데 유일하게 왕과 독대하듯 맞은편에 자리한 이는, 어전(御前) 앞임에도 불구하고 전신 갑옷에 투구를 벗어 던질 조짐도 없이 편안히 앉아 있는 이가 있으니.
패왕녀로 이름 높은 그녀는 제법 커다란 알그리타 세력도가 세세하게 새겨진 가죽 지도를 검지로 가리키며 노려보는 왕.
카일론의 현 국왕이자 철왕으로 이름 높은 존재를 향해 언제나 그렇듯 투구 사이로 흐릿하게나마 시선을 고정했다.
“엘피나 공국의 넷째가 실로 생각이 깊고, 마음가짐이 올곧더구나.”
“세상 물정 모르는 풋내기란 말씀이시군요.”
“건너편 왕국의 공작 가의 둘째도 나쁘지는 않겠고.”
“먼 곳과 동맹을 맺는다는 명목으론 좋으나, 과연 타당할지, 당장에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지요.”
“팔레스텔 부족의 장자는 어떠하더냐?”
“당장은 저희가 퍼 주는 입장이 될 테지요. 이후로도 장담할 순 없을 겁니다.”
“구 제국의 후예라는 장 새겨 처먹은 잡졸 녀석은?”
“구 제국 확립 전선에 참전하고자 한다면 좋은 명분 거리가 될 겁니다. 어차피 그쪽 분쟁은 단기간에 정리되긴 글렀으니….”
“그 어린 개척 군주는 어떠한가?”
“…….”
“그나마 인물들 중에는 너하고 가장 연배가 엇비슷해 보이던데….”
“개척 군주라기보다는 상인에 가깝다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상인은 손해 보는 장사를 안 하는 법이지. 제대로 된 녀석이라면.”
“그 말씀은…?”
병마가 몸을 집어삼킨 이래, 늘 유화적이고 부드러운 모습만을 내비치던 철왕의 인상은, 자신의 자식과 측근들이 자리한 곳에선 여지없이 본색을 드러냈다.
그것은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늑대의 그것.
어금니가 빠지고 발톱이 망가졌다 한들, 늑대가 풀 쪼가리를 씹으며 생을 연명할 순 없는 법 아니겠나.
거기다 늑대는 사회성이 탁월하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짐승이다.
그들은 동족 무리를 이끄는데 있어 현명함과 성숙함을 보이곤 했다.
마치 인간의 자질구레한 인간군상, 잡다하고 이기적이며 어리석은 이합집산과 비교하면, 훨씬 신사적이고 훨씬 능률적이기까지 했으니.
“전사는 필시 적을 죽인다 장담하며 승리를 입에 담으니 앞만 보고 달려 시야가 비좁아진다. 이건 병사며 전사의 자질이지, 지도자의 자질은 아니지.”
“…….”
“내치를 신경 쓰고 공사를 논하며 행정이며 관리로서의 역할은 최악을 염두에 두고 못해도 차선을 택하는 것. 그것들이 언제나 올바른 선택을 한다면 세상에 불행하고, 불합리하고, 빈곤한 국가가 생겨날 턱이 없겠지. 인간 사는 곳은 언제나 불평등과 부조리가 뒤따른다. 사람이 많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적더라도, 누군 왕이며 누군 신하고 누군 백성이다. 이미 이 자체가 불합리 아닌가?”
“…….”
“모두가 이득을 쫓게 하면 신하가 왕을 죽여 왕이 되길 욕망할 테고, 백성은 신하며 부호며 각자의 계층을 뛰어넘고 극복하기 위해 발버둥 칠 테지. 그러니 저 쓸데없는 여타 국가들은 종교쟁이들에게 나라를 좀 먹히더라도 신의 뜻이란 명목으로 자신들의 권력 수호를 위해 발버둥 쳐대며 자기 권력과 권한을 그들로 하여금 분리시켜 지탱하고자 하는 차선책을 실행했다. 우리 카일론에 종교쟁이들이 섣불리 발 딛지 못하는 이유는, 그걸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고.”
달리 말하면 카일론은 조상신, 위대한 존재, 그리고 그런 조상신을 내린 하늘을 선조이자 신적 존재로 떠받들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는 고대 왕조들이 왕권의 정통성을 주장할 때 흔히 써먹던 방식이기도 했다.
“그러니 내부를 신경 쓰고 관리하는 안주인이 자기 멋대로 권력에 심취해 횡포를 부리게 해선 아니 된다는 건, 너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다.”
패왕녀는 내정보단 결국 외부로 나아가고 개척하고, 최전선에서 진두지휘를 하게 될 숙명을 강제당했다.
그런 면에서 부군인 자는 너무 뛰어나서도, 모자라서도 안 되며, 그 외에 부수적인 이득까지 챙겨오며 자신이 아닌 카일론과 추후 여왕이 될 패왕녀에게 헌신과 희생을 자처해야만 하는 존재여야 마땅한데… 사내 된 자로서 그러기가 쉬울 턱이 있을까.
“아까운 것들은 많아. 고르고 골라 남은 이들 가운데 아쉬운 이는 하나도 없지.”
“…부군은 온전히 폐하께서 결정하신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거기에 본 왕녀의 의중이 무슨 의미를….”
“무엇이 국가에 이익이 될지, 이에 대해 네 생각을 들어보고자 함이다.”
“…그 누구보다 현명하신 폐하와 거듭 잘난 신하들이 짐작하고 예측 못 할 무언가를 소신이 어찌 알겠사옵니까.”
“다스릴 것들에게 적대감을 내비쳐서 어떤 이점이 있다고 그러는 게냐?”
“…….”
담담하게 심장이며 폐부에 비수를 꽂는다.
“짐을 증오하는 거야 올바르나 아랫것들을 질시하고 적대하는 건 짐승들도 하지 않는 추태다.”
“…시정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자신을 증오하는 게 타당하다니.
…역시, 이 미친 왕은 잘못됐다니깐.
“그리고 그딴 싸구려 연기는 집어치우고, 어서 물음에 대한 답이나 말하도록 해라.”
“뜻하시는 대로.”
의례적인 표현 뒤, 패왕녀는 차분하게 자기가 생각한 바를 털어놓았다.
결론은.
“말 잘 듣고 돈 잘 주는 놈을 택하는 게 타당하다 이 말이로구나?”
“객관적 평을 이야기한 겁니다.”
일일이 하나하나, 조목조목 다 짚어서 장단점을 설명했다.
특별히 누굴 옹호하고 비호 하는 듯한 티는 일절 내비치지도 않았고.
“근본이 없는 듯 하나 이놈은 근본이 기괴해.”
그리고 철왕은 상인 자식, 어린 개척 군주에 대해 평했다.
“숲의 현자가 추천한 것도 기괴하고, 상인이되 유력한 이국의 권력자가 뒷배로 영향력을 과시한 것도 기괴하며, 신대륙으로 넘어가게 된 연유 또한 기괴하다.”
“…….”
촉이 좋으시네.
철왕은 스스로의 통찰력으로 이를 짐작해낸 거였다.
에드릭이 자의가 아니라 타의, 그보다 더한 무언가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을음.
왕의 의심병은 천연에 가깝다.
배신당하기 전서부터 저 노쇠한 왕은 의심병에 시달렸고, 배신당한 이후로도 그 증세는… 기괴할 정도로 더 증가하지도, 줄어들지도 않은 채 늘 균형을 유지해 왔다.
이미 그 이상 의심하고 배척하고 몰아붙이기 시작하면, 자신의 권한, 권리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조차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만 거다.
말 그대로 타고난 압제자의 자질.
이성이며 감성 모두가 의심하라 속삭여대도, 그런 허황 된 유혹엔 끄떡도 안 한다.
그조차도 감당 못 하면 죽어야지.
감정, 의혹, 의구심의 노예로서 그것이 말하는 대로 끌려만 다닐 텐가?
철왕이 패왕녀에게 가장 먼저 가르친 건 그거였다.
네 내면의 속삭임이 널 위한다 착각하지 말라.
공포는 널 조련하기 위한 채찍이고, 쾌락은 널 다스리기 위한 꿀일지니.
그런 것에 혹해 휘둘리고 부려진다면 가축과 무엇이 다른가?
모두가 거기에 혹할 때 패왕녀만 거기에 저항했다.
철왕이 했던 저 말에 의미를 깨닫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이다.
나머지는?
전부…….
“그래도 네 말처럼 이것의 가치가 탁월한 것에 대해선 부정하지 않겠다. 저게 외부로 빠져나가는 건 우리들한테도 썩 내키지 않은 일이지.”
그래서.
“…변경백에게 넘겨주면 어떨까 생각하는데, 네 의견은 어떠하더냐?”
“…….”
언제나 이런 식이다.
이미 다 결정해놓고 통보하듯, 그러나 마치 배려하며 충분히 숙지하겠다는 양 물어온다.
죽을 때까지 변치 않겠지.
그렇게 살아왔고, 그런 삶이 통용되어온 삶으로 현재에 이르렀다.
저건 죽어서도 안 고쳐진다.
그러니 맞춰가야지 어쩌겠나.
패왕녀는 불편한 기색도, 번거로운 기색조차, 심지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분히 응답했다.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 폐하께서 살아계신 한 저는 폐하의 유능한 충신 아니겠습니까.”
자식 된 년이 굳이 소신이라 스스로를 자처하는 이유도 그런 맥락.
아바마마가 아니라 폐하라 부르는 것도 그런 맥락.
자식을 자식으로 안 본다.
마치 왕국을 유지하기 위한 훌륭한 도구 취급을 해댄다.
문제는 저게… 이 나라를 강성하게 만든 원인 제공자라는 점이 문제지만.
개인의 행복, 자유, 권리….
그딴 걸 일체 용납 안 하는데… 그러다 자신이 죽고 마음이 달라지거나 각오가 변질되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압제자의 죽음, 그로 인한 후계의 변질은 흔한 일이다.
그러니 무언가… 조치를 취해놨겠지.
그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최대 후원자이자, 최대 악적이… 바로 패왕녀 자신의 아버지 되는 작자이니.
‘내 나라를 물려받는다는 건, 내 죄업마저 물려받는다는 의미 아니겠느냐.’
그러기에 패왕녀로 불린 시점에 그녀는 이미….
철왕은 결코 그녀가 순수하고, 고결하고, 깨끗하길 원치 않는다.
진흙탕과, 핏물에 발이 아닌 전신을, 그걸 담그는 것조차도 내심 아쉬워하고 있었다.
아주 빌어먹을 인간이 아니겠나.
그리고 그런 적대감, 두려움, 공포와 증오심이… 자신을 키울 거라고.
알면서도 사람 짜증나게 하는 면이 있다니깐.
과거와는 다르다.
지금의 그녀는… 뼛속 깊이 새겨진 공포심 외에도, 짜증과 불쾌감 쪽이 훨씬 더 강렬해졌다.
왕은 점점 노쇠해져 가고 있으며, 자신은 서서히 최절정에 달하고 있기에.
“부디 오래오래 살아 계셔서, 제가 탑이며 어디 고궁에 유폐시킬 때까지 거듭 만수무강하셨으면 싶으시군요.”
“전하! 말씀이 지나치시옵니다!”
“됐다.”
뒤에 시립한 근위기사단장의 호통에 철왕이 손사레를 치며 만류의 제스처를 내비쳤다.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말만 놓고 보면 오래 살아서 자기가 이루는 업적을 누리라는 거 아니더냐?”
“…….”
하여간 자기 좋을 대로 만….
“알았으면 물러가거라. 어차피… 그리 정했다 한들, 그게 결정되고 말고는, 그것들 본인들의 행동과 의중에 달린 문제이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패왕녀가 형식적인 목례를 하곤, 그대로 등 돌려 모습을 감추었다.
“흠, 그래.”
이윽고 정원 내에서 완전히 인기척이 사라졌다 느낄 때쯤.
“이 녀석을 원한다 이거지?”
철왕의 입가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