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화 〉69. 변수가 아예 없을 순 없지?
찐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단번에 깨어졌다.
“무슨 일이죠?”
축제가 한창인 시기에 돌연 보초를 서던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들 중 하나를 붙들어 사정을 들어본 결과, 산맥 부근에서 마물들이 준동하는 움직임이 발견돼 만약을 위한 대비에 들어간다는데… 문제가 생겨도 백작성이 자리한 직할 도시, 브레드린까지 위기가 당도하진 않겠지만,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한 대비,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는 모습을 무척 기민했다.
어쨌든 브레드린엔 제대로 된 성벽이 없기에 도시가 공격 당하면 다수의 병력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위협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인데….
“보고 받아 알겠지만….”
말트리우스 변경백이 갑옷을 주섬주섬 시종들을 통해 챙겨 입는 상태로 간략 브리핑을 진행했다.
그래 봤자 사실상 통보에 가까웠는데, 가신의 봉토에서 발견된 이번 조짐은 단순 보고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경각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와중에, 결국 산맥을 내려서는 마물들의 무리가 민가며 농가에까지 피해를 미칠 거란 계산이 치밀기 무섭게, 통신 마법을 통해 보고가 전해진 건데….
“자식 놈들이 하나하나 외지를 싸돌아다니고 앉아 있으니, 늙은 이 몸이 이리 고생이구나.”
“그게 영주란 자리의 무게 아니겠는지요?”
파스티나가 우스갯소리로 들먹이자, 백작이 피식 웃어댔다.
“그걸 이 나이 먹을 때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게 싱거운 일이지.”
“다른 귀족들은 그 자리 못 꿰차서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닌 걸로 아는데요.”
“추위와 배고픔, 불편함에 시달리다 보면, 귀족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어디 한적한 곳에 넋 놓고 자빠지고픈 게 사람이지. 난 젊은 적에 고생할 만큼 했으니 나머진 젊은 놈들이 알아서 해야지.”
마치 어디를 가리키듯, 특정 방향을 눈짓하며 투덜대는 파스티나.
“요새에 잠자코 있는 누구 씨한테 말씀하시죠.”
이에 백작도 담담히 답했다.
“놈은 의무 사항을 지키고 있는 셈이니, 그걸 뭐라 할 순 없지. 다른 놈들도 최소 내게 허락을 받고 뛰쳐나갔다. 누구처럼 자기 멋대로 말도 없이 뛰쳐나간 것하고는 다르지 않더냐?”
“노친네한테 고기 한 점 떼어주듯 출가시키려는 미친 짓을 제가 감당할 필요는 있고요?”
“가문을 위해선 당시엔 필요했으니까.”
“지금은요?”
따지는 듯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백작은 담담했다.
“아쉬운 건 여전하나, 그렇다고 네가 말을 들어나 먹을 거 같진 않구나. 내 말이 틀렸더냐?”
“…쓸데없는 이야기는 됐고, 그래서 어쩌면 됩니까, 저는.”
“네가 싸돌아다니면 봉신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으니, 여기 처박혀나 있거라. 이곳 일도 할 일이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아도 따라오라 했으면 욕이라도 내뱉을까 했는데….”
백작 곁에 자식이 없는 이유는, 요새에 박혀 있는 후계자와, 후계자가 못 된 이들이 나름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외부로 나갔기 때문.
그들 중 일부는 훗날 자신의 형의 가신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닌 이는 영지를 나가 스스로 일가를 꾸리든, 있을 곳을 찾아 나설 것이다.
쥐꼬리만 한 영지 내에서도 후계자 쟁탈전, 싸움으로 집안 말아먹는 게 흔한 마당에, 백작령의 규모 내에서 파벌이 형성돼 싸움이 벌어지면, 단순 신경전이 아니라 준내전으로까지 번질 텐데, 가뜩이나 국경 지대인데 자기들끼리 싸운다? 땅 따먹히기 딱 좋은 상황이지.
“혹여 그럴 리가 없으나, 이곳에 문제가 발생하면 알아서 잘 대처할 걸로 기대하마.”
“…대처 안 하면요?”
“그건 문제며 사건이 터진 다음의 재미로 남겨두마.”
사고가 아닌 사건이란다.
즉, 일 터지면 단순 불행, 불운이 아닌… 책임 소재를 묻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기분 탓은 아니겠지?
에드릭은 잠자코 둘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은연중 그런 에드릭을 내버려두고 있던 백작이 갑옷을 다 챙겨입곤, 시종이 건네는 검을 허리춤에 차며 말했다.
“그보다 이렇게 뜬금없이 떠나보내게 돼서 예가 아니게 됐군.”
“아닙니다. 이미 충분히 환대 받았으니, 염려치 마시기를.”
기존에 받은 검보다 길이가 작은 검을 재차 허리에 찬 그는.
“떠날 때 귀띔해줄까 했는데, 그럴 시간이 없을 테니 미리 말해두겠네. 우리 사이에 있었던 협약을 포함해, 모든 이야기는 국왕 폐하께 전달됐네. 내가 직접 보고를 드렸지.”
“…….”
“무슨 의미인지 잘 헤아려두도록.”
왕에게 전달한 걸 구태여 입 밖에 냈다.
말인즉….
‘은혜를 베풀어두겠다? 아군 포지션이니 혹여 오해는 말도록?’
어느 쪽이든 에드릭을 향해 선을 댔다는 걸 밝힌 셈이긴 한데….
‘어떠려나.’
이게 무작정 좋다며 박수칠 수 있는, 그런 상황은 아닌데 말이지.
세상엔 뭐가 됐든 흑과 백이 있다.
장점이 있음 단점이 없을 수가 없지.
…못 보거나 알아채지 못한 거라면 모를까.
밖으로 나서서 말 위에 올라 일부 호위 병력과 함께 영주성을 나서는 모습을 끝까지 배웅한 에드릭과 파스티나.
“아, 뭔가 분위기가… 팍 식네.”
조금 전까지 취기도 오르고, 무드도 딱 좋았는데….
“나중에 구설수 생겨날 수 있으니 눈치를 안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백작령 내에서 가장 높은 자, 주인 된 자는 봉신의 위기에 몸소 늦은 저녁, 무장을 갖추고 출정했는데, 딸이란 작자는 남자하고 영주성 내에서 자기가 주인 된 마냥 음탕하고 번잡하게 뒤엉켜대고 있더라.
…이건 에드릭한테도 그다지 좋은 소문으로 번지진 않을 터.
“…막판에 똥 먹이는 것도 아니고.”
의도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짜증이 빗발치는지 표정을 구기는 파스티나.
한쪽뿐인 눈 미간을 대놓고 문지르는 그녀를 보며, 에드릭은 그럭저럭 그녀의 어깨와 등을 쓸어주었다.
“언젠가 또 기회가 있겠죠.”
“……술이나 몇 잔 마시고 말지.”
“괜찮으시겠어요?”
“…적군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소수로 약탈한답시고 여기로 오진 않을 테니, 괜한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그녀도 구를 대로 구른 용병.
나름의 판단,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 본 바, 큰 위험을 없을 거라 판단했나 보다.
“…그러시다면야.”
여기서 괜한 걱정을 내비치는 것도 그녀의 판단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결과에 이를 수 있기에, 에드릭은 전적으로 그녀의 의중을 존중해준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노파심이 항상 골수에까지 치민 에드릭으로선, 이 모든 게 사실 모종의 계획이나 음모가 개입된 게 아닌가 괜한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그건 나 혼자 알아서 떠안고 있으면 되는 거고.’
그녀는 그녀답게 알아서….
에드릭도 에드릭 나름대로 알아서 행동을 취하면 되는 거니.
어느 쪽이 됐든, 가산점을 받았으면 받았지, 마이너스가 될 일은 없을 거다.
그렇게 술 몇 잔 더 걸치고 잠들기까지 그럭저럭 이야기를 나눈 에드릭은, 그녀가 잠드는 모습을 본 다음에야 그녀의 방을 나섰다.
“흐음….”
밖은 어둡고, 성곽에서 주변을 둘러봐도 은은한 횃불들의 존재감 외엔 크게 보이는 바가 없었다.
가뜩이나 겨울.
해가 떨어진 시점이 무지막지하게 길고 춥기도 오지게 추워서 주변은 싸늘한 걸 떠나 바람이 휘몰아치는 걸 제외하면, 적막이 짙게 자리하고 있었다.
“노파심 말이지.”
만약 부군 경쟁에 누군가가 위협을 느껴 유력 경쟁자를 무너뜨리고자 한다면?
혹여 백작이 겉은 오냐오냐 했지만 내심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 대놓고 물을 먹이고자 한다면?
그 외에도 여러 가정들이 줄줄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괜한 걱정이다. 기우다.
…근데 문제 터지면 결국 뒤집어쓰고 피해 입는 건 에드릭 자신이 아닌가.
그리고 원래 아무리 대비 잘해도 문제가 되는 게 세상 삶이고.
참 신기한 건, 불안불안할 때는 별문제가 안 생기는데, 괜찮겠지, 하고 넘기는 일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뭔 일을 터지게 만든다는 것.
딱 지금이, 그런 기분이었다.
신경쓰기 귀찮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퍼잘까? 하는 욕구가 매우 충만해지는 바로 이 시점.
“그렇다고 내가 순찰을 돌 수도 없고.”
순찰 다 돌면 해 뜰라. 여기가 오죽 넓어야지.
거기다 골목까지 다 둘러본다? 이것도 말이 안 되고.
순찰대하고 같이 합류해서 돈다? 이것도 또 직무상 문제가….
“아, 거 되게 따지네.”
어떻게 돌다리를 두드려보고 건널까? 두드릴 때의 하중, 무게와 아예 위로 발을 내딛였을 때의 무게가 차원이 틀린데!
애초에 이건 말이 안 되는 소리지!
그래, 두드릴 바엔 차라리 판자를 깔고 가는 게 훨 낫지! 배를 타고 가던가!
…예전에 릴리에나한테 이 소리 했다가 미친놈 취급받았는데… 이 기질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위기를 몇 차례 방지해주긴 했었다.
대신 이런 기질 때문에 추진력이 느려 터졌다며 릴리에나가 암 걸리겠다고 난리 친 게 한두 차례가 아니었지만….
‘녀석하고 같이 일을 도모하면 그건 좋았지.’
배합, 조합이 잘 맞았다고 할까.
급발진을 마구 해대는 릴리에나의 브레이크로서, 느릿느릿 움직이는 에드릭에게 있어서 채찍질로 마구 달려가게 만드는 그… 뭐랄까.
“생각해보니 혼자 나댄 적이 그닥 없었네.”
아르세이유에선 선배를 포함해 주변 지인들이 꽤 많았었고….
에드릭 자신은 그리 뛰어난 편이 못 됐다.
주변으로 하여금 그렇게 여기도록 하는, 연기나 처세를 잘할 뿐이지….
‘밑바닥이 훤하니, 야망이 없는 거지.’
주제를 잘 알면, 원래 고만고만하게 가고자 하는 거다.
포부를 크게, 야망을 크게?
…귀찮아요. 왜 그리 귀찮을 짓을 구태여….
“딴 생각하기는.”
자, 그러면 어떻게 할까?
어차피 하루 이틀 안 자는 정도는 일도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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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움직이면 하루 정도는 충분히 여유가 있다고 판단해서 다음 날 떠나기로 한 일정을 하루 더 미뤘다.
혹시나 해서 주변을 고루 둘러보긴 했지만, 브레드린 내부며 인근에 위협 및 불길한 조짐은 크게 발견되지 않았다.
“괜한 걱정이라니깐.”
“그러게요.”
시국이 요란하다 보니 요란 법석하게 떠나는 일 없이, 조용히 떠나기로 결정.
이곳에 온 이래 해낸 일들, 겪은 것들은 여럿 됐지만, 막상 갈 때가 되니 별로 한 게 없는 듯 느껴지는 건, 무슨 영문인지.
마차를 타고 브레드린을 떠나, 백작령을 빠져나오기까지 장장 하루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길이 험한 탓도 있지만, 직선이 아니라 빙 돌아가서 그런 거기도 한데….
사실상 마차 내에서 잠이나 퍼 자고 있던 터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자각은 크게 없었다.
…이것도 슬슬 익숙해져야지.
예정을 하루 앞당겨야 하니 이전처럼 느긋한 속도가 아니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터라 탑승감이 그리 좋지 못했지만, 누워서 퍼 자며 갈 수 있는 게 또 어디인가.
해가 저문 직후 깨어나 잠시 말을 비롯해 휴식을 취하는 마부를 보곤 에드릭은 할 일도 없어 스마트폰을 살폈다.
그러던 중.
[소식 들었냐?]
직원들 소식지 및 칼럼들을 살피다 선배로 하여금 메시지가 오게 됐는데….
[팀장님이 조만간 그 부근으로 이동하신다던데.]
[그 부근? 제가 있는 곳 말인가요?]
[그래. 무슨 백작령이라 했지?]
[여길 왜요?]
[일 터졌다고 하던데.]
무슨 일?
머물렀던 에드릭 자신이 일 터진 소식을 못 들었는데, 그건 또 무슨….
에드릭이 선배를 향해 간단히 정황을 설명했다.
[마물들이 준동했는데 규모가 그렇게 위협적이진 않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백작 자신이 직접 봉신의 영역으로 지원은 갔거든요? 그게 어제인데….]
[마물? 팀장님 말로는 전쟁까진 아니어도 비슷한 명목으로 출정하는 거라던데.]
[출정요?]
그냥 오는 게 아니라 출정을 한다?
이건 전쟁을 치르겠다는 의미 아닌가?
설마 자리를 비운 시점에 뭔가 크게 문제가 터졌다거나?
시대는 중세여도 통신 마법이란 게 있기에 이 시기에 정보 전달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귀족들을 비롯해 고위층 한정된 이야기지만, 그게 어디인가.
그나저나….
에드릭이 물었다.
[팀장님께 직접 메시지를 전달해봐도 될까요?]
[기사단 소집해서 움직여서 당분간 대놓고 이런 거 다루는 모습 못 보인다고 하셨다. 아마 보내도 답 못 하실 걸?]
[흠….]
[그래도 혹시나 싶어 나한테 물어보라 해서 보내본 건데, 정말로 아무 일 없었던 거야? 그 마물들 말고.]
[예. 일단… 제가 오늘 오전 중에 왕도로 복귀하려고 나선 참이라서… 혹시 그 이후 문제가 벌어졌다면….]
[그 인근에 있는 직원이나 관계자들한테 물어봐야겠네. 누구들인지는 아냐?]
[따로 밝히지 않잖아요. 본사 사정으로 엮이는 거 아닌 이상….]
[흠, 그래. 그럼 내가 알아보마. 별일 아닐 수도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에드릭은 낮게 잔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놓친 게 따로 있나?
아니면 정말로 우연히 사건 사고가 터졌다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