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화 〉69. 변수가 아예 없을 순 없지?(3)
에드릭은 노력했다, 라는 식으로 만족하며 위로받고, 스스로 씁쓸함, 후회, 안쓰러움을 곱씹으며, 나는 할 만큼 했다며 자축하고, 자위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굉장히 오랫동안 해오지 않았던가.
…본사에 발 들이기 이전까지, 평생 해왔던 게 그거였으니.
붉은 여왕 효과, 가설, 딜레마.
과거, 그 시기에 에드릭은, 아니 태민은 노력을 할 만큼은 했었다.
그러나 그 노력은 남들 모두가 하는 거였고, 그들보다 탁월할 정도로 열심히 했냐 하면? 그가 과연 그렇다 하고 자부할 수 있었을까?
아니었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나온 용어로 붉은 여왕의 효과는, 앨리스가 나무 아래에서 여왕과 함께 뜀에도, 제자리였기에 여왕에게 이리 묻는다.
‘저는 계속 뛰는데 왜 나무에서 벗어나질 못하나요? 제가 살던 나라에선 이렇게 달렸음 벌써 멀리 갔을 건데!’
이에 붉은 여왕이 말하길,
‘여기서는 힘껏 달려봐야 제자리다. 나무를 벗어나려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하지.’
하고 답한 예로, 이는 진화론, 비즈니스 이론을 포함해 여러 곳으로 파생돼 전파된다.
예컨대 이거다.
계속해서 발전하고, 진화하지 않은 한 결국 도태된다.
거기에 단순한 노력, 막연한 열심히는….
결단코 의미가 없음을.
…정말이지 냉정하고, 냉혹한 이야기가 아닌가.
에드릭은 그게 정말로 싫었다.
그래서 꾸준히 노력하고, 진화며 발전이며 이런 것보단… 그저 입맛에 맞게, 적당적당 살아가길 꿈꿔왔다.
그리고 현재, 그럴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
여기서부턴 이제… 속된 말로 평균치, 평타만 치면 된다.
그래… 딱 그 정도만.
더도 덜도 말고….
‘근데 왜 이러고 있는 걸까?’
글쎄다. 내가 어찌 아냐.
산길을 벗어나, 이윽고 굴곡진 방향, 비탈이며 계곡을 벗어나 주변이 살짝 트였다고 느낄 때쯤….
이전보다 더 드높은 산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
짜증난다.
그래도….
루넨브리스가 그쪽을 향해 뛰어가고 있다.
결국 길은 저 뒤, 건너편에 있다.
어쩌면 그 뒤에도 또 단순 구릉, 산줄기가 아니라 아예 다른 산맥이 자리하고 있을지도.
그럼에도….
에드릭은 멈춰 서선 절망하거나, 체념하기 앞서….
무작정 뛰었다.
…후회하고, 생각하고, 잡념에 휘둘리는 시간조차 아깝고, 웃기는 노릇이지만, 그조차도 귀찮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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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전날 비가 쏟아진 게 거짓이라도 되듯 날이 활짝 개이고 있었다.
아직 해가 떠오르려면 조금 남았다고 짐작되는 게, 하늘은 마치 해가 저문 직후 마냥 남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허….”
흠뻑 젖긴 했지만 몸을 말리고자 한다면 별 어려움은 없었다.
그냥 몸이며 옷을 적신 수분만 모조리 빼내면 그만이니.
그렇게 한참을 움직여 다시 브레드린의 정경이 눈에 보이는 구릉, 언덕에 당도했다.
아직도 가려면 한참이 남았지만 한치 앞도 안 보이는 곳에 비하면 이 정도 거리는 일도 아니긴 한데….
문제는 멀리서 봐도 눈에 띌 정도의 연기가 그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는 점.
망원경을 눈에 대고, 정령술을 통해 렌즈를 형성해서 다시 살피자….
성채 일부에 불이 옮겨 붙어 활활 타올라 시커먼 연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불이 나는 곳들을 살펴만 봐도 이게 한순간에, 잠깐하는 사이 일어난 게 아니라 제법 번져나간 것임을 깨달았고, 이건 다시 말해… 문제가 터진지 시간이 조금 흘렀다는 의미와도 일맥 상통하는 바.
조급한 마음이 들었지만 혹시나 싶어 성채 바깥, 예컨대 백성들이 머무는 주변을 살폈는데, 의외로 그 주변으로까지 불이며 피해가 번진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성채가 마을하고 떨어져 있다곤 하나….’
사실상 돌로 쌓은 성채며 성곽에까지 불이 옮겨붙는다는 건, 어지간한 인화성 물질로 밑바탕을 깔아뒀다거나, 안쪽이 제대로 익어 지지대며 버팀목에까지 죄다 불이 옮겨 붙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의미인데… 거기까진 아닌 듯 보였다.
‘어째서 이런 건 맞아 떨어지는 거지?’
거기다 성채만 습격 당했다고 치면… 이건 누굴 노린 건지 너무 명백하지 않은가?
내달리면서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그 와중에 가장 크게 걱정이 되는 건… 의외로 파스티나의 생사며 안위 문제가 아니라… 막상 떠난 자신이 이런 식으로 저곳에 다시 당도할 시, 의심을 사거나 누명을 쓰거나 하는 등… 괜히 복잡하게 엮이는 게 아닌가 하는… 실로 편협하고 간사하기 짝이 없는 자기 안위에 대한 걱정거리였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지만… 이거야말로 자신이 정치며 처세에 녹아들어 있다는 의미기도 하니… 억울함을 품기도 뭐했다.
내달리면서 스마트폰을 펼쳐 혹여 자신이 미처 캐치 못 한 메시지나 이런 게 있나 살펴봤는데… 선배에게 전해진 미확인 메시지가 몇 개 전송돼 있었다.
그것을 대충 살펴보니….
일전에 협약을 맺은 초원 엘프를 비롯한 여러 부족 연합 쪽에서도 카일론과 바트리온 왕국 인근까진 아니지만 충분히 개입하고도 남을 위치까지 본거지를 옮겨오고 있단 정보였는데, 주둔지가 따로 없이 전체가 그런 식으로 오고 있다는 거 자체가 사실상 그들 본진이 인근까지 진입하고 있다는 의미인데….
‘어디서 조짐을 읽고?’
뭔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무언가가 오고 간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본래라면 말을 타고도 수십 분은 족히, 힘차게 내달려야 했지만 지쳤더라도 에드릭의 전속 질주는 말의 전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단거리 자체면 그보다 빠르겠지만, 여기선 한참을 내달리는 인내력, 지구력이 문제였는데… 그렇다 해도 에드릭은 개의치 않고, 쉬지 않고 자신의 옆을 따르는 루넨브리스와 함께 브레드린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서도 영주성까지는 또 한참.
그래도 지붕을 디딤돌 삼아 팍팍 치고 나아가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영주성에 도착하기 무섭게 상황을 파악한 에드릭은 대기 중에 흥건히 퍼져 나간 수기며 수분을 대략적으로 긁어 모아온 터라, 불길로 주변의 수분이 모조리 증발한 구역이라 한들, 불길을 잡을 만한 충분한 물을 새로이 확보할 수 있었다.
땅에서부터 젖어 든 물기가 대기 중으로 솟아나 지면이 바짝 마르고, 젖어 든 돌이며 목재 등이 순식간에 건조해졌지만, 불을 끄고자 우물에서 물을 퍼오고 난리를 부리는 이들 눈에 그것은 실로 몽환적이면서도, 구세주의 재림과도 같은… 신위로 내비쳤으리라.
거대한 물줄기를 휘둘러 불이 난 구역을 단번에 휩쓸고, 그걸로도 모자라 산소를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물의 막을 둘러쌓아 화염 자체를 감싸듯, 일부 구역을 차단하듯 막을 형성해 주변을 조여 불길을 끄는 등, 주변 사람들 기준에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화마를 순식간에 잠재운 에드릭이 한숨 돌리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상황을 탐문했다.
무엇보다….
‘파스티나가 없어.’
그리고 이건 영주성 내에 있던 시종들이며, 이를 책임지는 시종장, 시녀장 모두가 자각하고 있는 문제였다.
거기서 목격자 중 불이 난 곳에 그녀가 있었다는 말이 들려 시커멓게 탄 내부를 둘러보며 혹시나 모를 사태에 마음의 준비를 거듭한 에드릭은….
‘탔다면 흔적이 있…겠지.’
인간의 몸을 두른 가죽은 연약하기에 타버릴 수 있더라도, 체내에 굳건히 자리잡은 뼈는, 어지간한 열기론 뼈째로 타서 잿가루가 되긴 어려웠다.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지만, 여기에도 여러 환경 및 여건상 부합되는 것들이 필요한데….
그러나 그런 자연적 사태로 인해 시체가 철저히 훼손된 게 아니라면, 이건 다른 의미로 상황이 유도됐다고 봐도 무방할지도.
불을 낸 건 증거 인멸에 일환.
애초에 죽인 다음, 시체 자체를 모종의 방식으로 녹이든 태우든 어떻게 해서 흔적 자체를 날려버렸다던가.
“…….”
자작극일 가능성은?
그녀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긴 하고?
애초에 에드릭이 그녀에게 맞긴 그 역할은 쉽사리 내려놓거나 손 놓을 만큼 속 편하고, 간편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은 그녀로 하여금 권리와 정당하면서도 대접받기 용이한 역할군으로 그녀는 충분히 원하는 거 이상의 대우를 받을 건 자명했기에… 그녀가 이를 거절하고 포기하고자 이런 자작극을 벌였다고 하면, 이건 이것대로 앞뒤가 안 맞는다.
애초에 에드릭 자신에게 말도 없이?
‘…외부의 불온한 소행 쪽이 역시… 타당한가.’
암살, 파괴 공작, 그 외에….
목적이 대체 뭔가.
당연 무역 협상의 결렬 및 그로 인한 이득일 텐데….
어느새 재가 된 방을 선 채로 둘러보던 에드릭은, 더 이상 둘러보길 포기한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흐음….”
철커덕 소리를 내며, 영주성의 원 주인인 변경백이 인기척을 내며 여럿과 함께 내부로 들어섰다.
그나마 영주성 태반이 돌로 이루어졌기에 불이 나더라도 건물 자체가 무너질 정도의 심각한 타격으로 연계가 되진 않았지만, 이를 보수하고 공사하는데도 아마 예상 이상의 수고 및 비용이 뒤따를 건 불 보듯 뻔한 일.
애초에 무너지지 않은 시점에 결정을 하긴 해야 할 터.
다시 무너뜨리고 새로 지을 텐가, 문제가 안 되는 선에서 보수, 보완을 할 것인가.
…별걸 다 걱정하네.
에드릭은 목구멍 아래에서 쓴물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떠났다고 들었거늘, 돌아온 건가?”
“…….”
뭐라 답해야할까.
답을 잘못하면 괜한 오해며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그런 오해를 산다는 거 자체가 어이없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문제기도 했고.
그래도 다행히 변경백은 그에 대해 추궁할 생각은 없는 듯 느껴졌다.
“…내 방으로 가세. 자네가 직접 조사하고 살펴볼 게 아니라면….”
“살펴는 다 봤습니다.”
“그래서?”
“…가서 말씀드리죠.”
납치 문제도 슬쩍 떠올라 그쪽 메리트, 의도, 목적 등도 다시 재검토해봤지만… 여전히 뭔가 탁 까놓은 듯 결정되고, 결론 지어지는 건 무엇 하나….
떠오르지도, 생각나지도 않았다.
공교롭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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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이더군요.”
“무엇이?”
“…시체 말입니다.”
생존의 가능성을 앞서 제시한 에드릭.
“…….”
영주는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두 눈을 반개했다.
에드릭은 굳이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창 쪽으로 시선이며 몸을 고정한 채, 아직도 그럭저럭 흔적이 남아 미약하게나마 연기를 내뿜는 자취를 노려봤다.
막상 다급해서 몰랐는데, 그 공간을 나서니 재며 탄내가 몸에 잔뜩 밴 것처럼, 매캐한 기분이 들었다.
“가던 길에 되돌아온 건가?”
“…예.”
“어째서지?”
“제가 뭔가 불안하면 좀처럼 마음을 놓는 법이 없어서 말입니다.”
어차피 하루 늦게 빠져나간 것도 소식으로 들었을 테니, 아예 설득력이 없진 않았을 거다.
“같은 일도 재확인하고, 나중에 보고로 모자라 직접 확인할 정도로 불안 요소가 일말이라도 있는 걸 거북해한다는 보고는 접하긴 했네만.”
“원체 위험 부담이며 리스크는 짊어지지 않는다 주의인지라….”
“그게 돌아온 이유라 이건가?”
“말론 설명이 불가능한데, 불안했거든요.”
일이 그럭저럭 잘 풀리면 늘 고민되고, 의심이 됐다.
내가 이렇게 일이 잘 풀릴 리가 없는데… 하고.
그래서 내심 한숨을 삭인 에드릭은, 아주 직설적으로 물었다.
“아무튼 제가 놓친 게 뭡니까?”
“무엇이 말인가?”
잠시 뜸을 들인 에드릭은, 그가 답할 때까지 기다릴까 하다, 몇 초 안 돼서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애초에 이 상황 자체가 전부 의도 하에 벌어진 일 아닙니까? 제 짐작이 틀렸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