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화 〉70. 정말로 무서운 건 언제나...(2)
의도적으로 반쯤 말을 놓듯 내뱉은 에드릭.
당연 죽게 내버려 두진 않았을 거다.
…죽는 쪽이 상황을 더욱 의도적으로 주도하는데 있어선 확실하겠지만….
변경백이 그 정도로 냉혈한에다, 반쯤 내놓았다는 명목으로 핏줄에 대한 애착이 없을 순 물론 있겠지만… 그건 차마 아니길 기대했다.
정말로….
“그걸 왜 내게 묻지? 이제부터 그 문제를 파악해야 하는 게 나이거늘, 지금 장난하나?”
“…….”
그는 여전히 연기를 지속한다.
아마, 사태가 확실 시 되는 그 순간까지, 어쩌면 그 뒤에도 그는 천연덕스럽게 모른 척할지도.
아니, 그게 맞지.
그래야…….
“후우.”
개짜증나네.
빌어먹을 귀족이니 정치질이니 뭐니….
갑자기 환멸감이 치솟는다.
역시 상인 나부랭이는 정치인과 투닥 거릴 수 없는 노릇이라니깐.
애초에 민주 자본주의 세계에서도 정치인은 최고의 엘리트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개그 짓을 범한다 해서 방심해선 곤란하다.
그런 촌극조차, 다 눈속임일 여지가 다분하니.
정작 중요한 건 안 보이는 곳에서 발생하는, 개 같은 암약, 협약, 자기들끼리 샤바샤바 하는 것들이다.
우린 그걸 꿰뚫어 볼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진짜배기니까.
지금 이 상황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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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처에서 카일론의 국왕, 철왕이라 불리며 병마에 접어든 이후론 늘 웃는 얼굴로 주변을 대하던 그가, 이번만큼은 짓궂은 미소를 머금은 채 수정구를 통해 비치는 변경백의 보고를 잠자코 듣기만 하고 있었다.
이윽고 보고가 끝나자….
“머리가 제법 돌아가는 녀석이군.”
그것도 상당히.
“정보 제공처도 제법 다양한 듯 싶고.”
설명만 들어도 그가 어느 지점까지 도달했는지가 대략적으로 머릿속에 훤히 그려졌다.
“막연히 사람 좋은 게 아니라 저런 식견과 통찰력, 문제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는 명운이 따라줬기에 저것도 저런 위치에까지 도달한 모양이군.”
뒤에서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아도 죄다 말아먹고 손해만 일으키는 머저리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귀족이랍시고 허영심과 허례허식, 자존감만 드높아 정작 일머리는 하나도 없는 주제 무작정 잘 될 거라 생각하며 들이박고, 막상 요행으로 된 걸 자기 의도대로 된 양, 자기가 잘 나서 이룩한 것처럼 착각하는 족속들이라던가.
그런데 그런 것도 하루 이틀, 한두 번이지….
하늘이 보살펴줘서 매 순간 운이 따라주는 놈이 없을 거라 생각은 안 한다. 어딘가에는 있겠지. 어딘가에는.
“흑성 기사단을 보내놨으니 나머지는 그것한테 알아서 잘 처리하라 일러라. 자네도 협조하고프면 해두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수정구 속에 비치는 변경백은 무심하면서도 냉정한 태도를 고수했다.
문득.
“그나저나 서운하진 않은가?”
[…….]
철왕이라 불리는 이 폭군은 누군가를 시험하는 걸 즐겨대는 존재다.
말 그대로 당하는 이한텐 횡포가 따로 없지만, 그게 곧 그의 권위와 권력이 정점에 있음을 입증하는 바….
“수고가 많군. 단언컨대 이번 일에 대한 공은 자네 몫이 가장 컸다는 걸, 두고두고 기억해두겠다. 그만한 희생을 했다면, 응당 그 이상의 공과가 주어져야 마땅하긴 하지. 공식적으론 질타하겠으나, 뒤로 섭섭지 않게 챙겨주도록 하겠네.”
[망극하옵니다.]
“물러가보시게.”
정중히 고개를 수그린 그가 수정구로부터 모습을 감추었다.
이윽고 수정구에 들어오던 빛도 점차 사라져선….
“흐음… 판단 거리가 남아는 있는데, 과연….”
철왕은 생각한다.
이 새끼가 돌아오면, 어찌 굴려볼까, 과연 정말로 만족스러운 녀석이라면… 기존의 그런 걸 죄다 무너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쪽이 이익이라면, 그쪽으로 상황을 굴려 나가는 게 도리에도 맞을 거고.’
인재는 소중하다.
하물며, 그 인재가 단순히 한 집단을 좌지우지하는 게 아니라, 국가를 좌지우지할 만한 그릇이라면….
대가리가 잘 굴러가고, 말재간이 좋고, 능력이 걸출한 건… 왕의 기준에선 죄다 거기서 거기다.
똑똑한 놈 찾아보면 널렸고, 힘이 쎈 놈도, 말 잘하는 놈도….
그러나… 그걸 전부 포용하면서, 그 이상인 것….
그리고 눈과 귀, 심지어 머리로도 판단하고 판가름 짓지 못하는 재능이란 게 있다.
과연 녀석에게 그런 보배와 같은 게 있을까?
철왕은 그 점이 몹시 궁금했다.
어쩌면 자기 모자란 딸내미의 공백을, 일정 부분 채워줄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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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진행은 일사천리….
패왕녀와 기사단 무리가 등장해 대놓고 요새 밖으로 향해 바트리온 국경 부근에 포진해 위협을 가하기 시작, 초원 부족들도 다수의 병력을 끌고 와 포진시켜대니 상황이 긴박하게 굴러가는 모양새였다.
본사 직원 말로는 내부에서도 이러한 문제로 책임 소재며 갈등이 심화 되기 시작.
이로 인해 바트리온 내에서 나름 대주교로서 입지를 공고히 다져, 나름 대주교령까지 확보하고 있던 바멜른 대주교에게로 문제며 책임의 소재가 돌아갔다.
다분 누명에 가깝고 모함에 가까웠지만 작정하고 준비된 구렁텅이에 그는 대비도 제대로 못 하고 빠져 허우적대기 시작.
무엇보다 거짓 증거가 진실인 양 속속들이 드러나고, 애초에 카일론이 피해자인 척하면서 작정하고 바트리온 왕당파 쪽의 증거를 인정하며 압박을 넣다 보니, 대주교의 입지가 단번에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본사 측 직원들이 파악해둔 비리 명부를 다시금 왕당파의 핵심 귀족에게 제공해 잘 타오르는 불길을 더욱 복 돋아줄 땔감 역을 톡톡히 해냈으며, 이로서 대주교는 재상직인 동시에 선제후의 위치에서 떨어져 나가 바트리온의 수도에서 발을 빼내, 주교령으로 발을 빼게 된다.
명명백백하나 확실하지 않으니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은 점이 노련했다.
구석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
그 유명한 프랑스의 전쟁 천재, 나폴레옹조차도 적병들을 결코 구석에 일방적으로 몰아넣은 예가 없었다. 언제나 살길을 터줬고, 그 살길이 사실상 추락하는 절벽이란 사실을 그들이 몰랐을 따름이지.
결국 바트리온은 공식적으로 이 불미스러운 사태에 대한 사과와 함께, 향후 5년간 평야 지대에 대한 불가침을 천명함으로써 카일론과 초원 부족, 엘피나 공국을 비롯해 협정을 위배해 물의를 빚은 문제에 대한 사죄를 요청했고, 초원의 대족장이 이를 받아주었으나, 카일론은 불만을 토로하며 사과를 받지 않되, 평야 지역을 일부 차지하는 쪽으로 정치적 태도를 고수함으로써 전쟁 한 번 안 치르고 일부의 땅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에 대한 공증을 초원 부족의 대족장과 엘피나 공국 쪽, 그 외에 바멜른 대주교를 대신해 새로이 당도한 새로운 주교가 이를 지켜보는 가운데, 이전보다 더 폭넓고 넓어진 의미로… 새로운 무역 및 불가침 협정이 동시에 체결됐다.
당연 이런 불공평 흐름을 유발한 원인 제공자로 지목받으며 지탄 받은 바멜른 대주교는, 자기 주교령에서 꼼짝도 않고 짱 박혀 있어야 했지만… 어쩌겠나. 그게 정치라는 건데.
무엇보다 이곳의 종교는 소브릴 정교회로, 에드릭과도 제법 친분이 있는 교파기도 했다.
본래라면 인근 국가들처럼 정교회가 아닌 소브릴 교단, 정통이자 정식 소브릴 교라 주장하는 그들 계파였어야 정상이나, 이 기회를 빌어 소브릴 교단 측의 바멜른 대주교를 수도에서 물러서게 한 그들은, 백성들에서 더욱 친화적인 소브릴 정교회의 주교를 초청하곤 그들의 교회를 새로이 짓는 등의 대대적인 정치 개혁, 종교 개혁을 감행했다.
이 결과는 당연… 이를 주도한 왕권과 왕당파의 강세로 이어질 것이지만… 덕분에 주교파에 해당했던 파벌이 갈라져 귀족파와, 구 주교파로 나누어지게 됐는데, 여기에도 상당한 신경전과 여러 정치적 개입이 엮인 듯 했지만… 바트리온에 살거나 그쪽에서 사업하는 게 아니니 에드릭은 그쯤에서 생각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얻은 건 많네.”
카일론 입장에선 위태롭긴 하나, 잘만 활용하면 천군만마가 될 법한, 그러면서도 실리적 이득이며 명분적 이득까지 쟁취한 걸 보면….
다만 공식적으로 파스티나는 암살자들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는 식으로 소식이 퍼져갔는데….
그녀를 찾게 된 건 어이없게도 초원 엘프들과 몇몇 이종족 유목 부족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으면 이젠 자유지.”
어느새 안대를 푼 그녀는, 일전과는 달리 그곳에 선명하게 의안이라 구분될 여지조차 없는, 새로운 눈을 장착한 모습으로 냉소와 허물없는 표정을 섞어 홀가분함을 표출했다.
“…백작 각하는 다신 공식적이든, 사적으로도 못 찾아뵐 텐데, 괜찮으시고요?”
“미련도 없고. 어차피 영지를 내린다 했어도 싫은 판인데… 내가 왜?”
혈연의 끈끈한 정이자 인연 따위, 그녀에겐 보잘 것 없는 족쇄였던 모양이다.
“애초에 아버지하고 그리 친하지도 않고.”
이런 소리를 태연하게 내뱉으며 냉소를 머금는 걸 보아하니, 이번 선택이 강요로 억지 결정된 사안이 아니라는 걸, 에드릭은 대강 짐작하게 됐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각하가 이를 명하신 겁니까?”
국왕이나 참모진들이 이런 구상을 짜긴 했겠지만….
“폐하께서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시던데.”
“응?”
폐하?
“왕이요?”
“어. 자유롭고 싶지 않냐면서, 그렇게 해주겠다고, 왕의 이름을 걸고 이를 보장해주겠다나? 심지어 지내는데 불편함이 없을 만큼의 재물도 안겨주시겠다고 하셨고.”
“…….”
“내가 바라는 건 정확하게 알고 계셨던 거지.”
보통이라면 그 가문에서 축출, 사실상 존재의의를 박탈당하는 격이라 결코 좋게 받아들일 수 없는 명이었겠지만….
“아무튼 간에, 조심해라. 패왕녀께서도 대단하시지만, 애초에 그녀의 권위와 권력, 위엄은 현 국왕 폐하로 인해 비롯된 거니까. 네가 정말로 왕녀님 부군이 된다 치면, 가장 두려워하고 경외 시 여겨야 할 분도 그분이란 걸 잊지 말고.”
“…이번에 단단히 체감했습니다.”
정말로 본의 아니지만….
“그건 그렇고 언제 왕도로 복귀할 참이야?”
“…이번에 왕녀님 돌아가실 때 같이 동행하기로 했습니다. 며칠 더 머물며 주변 정리하고 공국 쪽하고 초원 부족들하고 이것저것 나눌 이야기들이 많다고 하시니….”
“그러면 시간이 조금 남는 건가?”
“…그럴지도요?”
서로를 마주 보던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피식하고, 작지만 길고, 진득하게 웃음보를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