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9화 〉74. 역시 이쪽이 편해.(3)
아무튼.
“…이런 소문 나면 네 평판이 오히려 더 문제 되는 건 아니고?”
프리지아의 물음에 에드릭이 미간을 긁적이며 답했다.
“그래야 정상인데… 이 나라가 참 신기해.”
결혼 전까진 이런 거 크게 뭐라 하지 않는 형편이니.
다만 결혼한 이를 건들거나, 불륜에 한에선 자비가 없다는 게 문제지만.
…이조차도 들킨다는 전제로 그런 거고.
거기다 부인 혹은 남편이 허용하면 죄가 아니라는데, 과연 그걸 대놓고 허용할 사람이 있긴 할까?
카일론의 경우 다종족이 어우러지고, 종족 차별 및 차등을 완화 시키기 위해 한때 피를 섞는 걸 장려하던 시기가 있었다.
보통은 부정적인 흐름으로 이어져야 마땅하나, 이게 그나마 잘 흘러가 100년 이상 지나고 나니, 타국에 비해 종족 차별이 줄어든 것도 사실.
“너야말로 주의해야 하지 않냐?”
에드릭이 그리 되묻자.
“…데이엔 가에 있는 시점에 주의고 뭐고.”
여성만 있는 가문인데 임신을 하고, 애를 낳는다.
…구설수에 노출되지 않는 게 이상한 거지.
그럼에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건 명예보단 철저한 실리를 택했기 때문이고, 데이엔 가문의 권위와 힘이 사실상 부에서 창출되는 이유 때문이리라.
무엇보다 그러한 자금을 바탕으로 데이엔 가는 크고 작은 규모로 다양한 투자를 해왔고, 상단은 물론 이를 바탕으로 직접 운송업까지 도모하고 있는 형편이라 들었다.
데이엔 가는 애초에 각 지역별 지점을 따로 두어 연계가 각별한 터라, 여타 가문처럼 가신단이 인근에 머물고 그런 것도 없는 것도 그런 맥락.
영지가 없지만 데이엔 가문엔 그 이상의 자금과 이를 바탕으로 한 연대가 확실하게 굳혀져 있는 실정이기도 했다.
거기다 테티아나 이전서부터 어떤 식으로든 피를 섞어댄다는 명목으로 딸을 상품화하여 씨를 받고, 이를 통해 자신의 아이일지 모른다는 어이없는 방식의 유대며 연대를 통해 형성된 교류 관계도 무시하기 어렵다고 했던가?
프리지아는 가문의 그러한 어긋난 관례에서 빠져나온 케이스지만, 그렇기에 더욱 압박감을 느껴야 하는 입장이기도 할 터였다.
‘…그렇다고 루이샤한테 그 짓을 시키려는 건 아닌 듯 보이니.’
애초에 에드릭의 자식인 게 뻔한 마당에 그러면, 에드릭이 참 좋구나 하겠다.
어차피 데이엔 가의 삐뚤어진 관례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게 또한 테티아나의 의지기도 했으니, 그렇게 흘러가진 않을 거라 생각됐다.
“그러면 다행이고.”
“…그게 다행인 일이야?”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던 일 아니냐?”
“…뭐, 조금은?”
똑똑한 척하는데 이런 걸 보면 똑똑한 건지 무신경한 건지.
하긴, 뭔 일하는데 주변 평판이나 소문, 구설수에 휘둘리면 뭘 할 수 있겠나.
악명조차 지지대로, 버팀목으로 삼을 수 있어야 뭐가 됐든 크게 되는 법 아니겠나.
그리고 이런 점은 아마, 테티아나한테 제대로 가르침 받지 않았을까 싶었다.
심지어 아르세이유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에드릭조차 검증 안 된 악담, 악의적 소문 가운데 일부는 크게 부인하지 않고 은연중 인정하는 태도를 내비치기도 했으니.
파라메라 대륙에선? 처음 만나는 이들 대부분이 초창기엔 입을 모아 악담을 퍼부어댔으며, 시간이 지나 알헤디나의 사도가 된 뒤에서야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이후 업적이며 행적이 증명됨으로써 경외 되기 시작한 거였으니, 좋은 인상보단 공포심을 부추기는 위명 쪽이 훨씬 컸다 볼 수 있을 거다.
여기서는 어떠한가.
애초에 성인군자, 현자로서 존경과 경외만 받으며 깨끗한 선전을 이어간다는 건, 더러운 것들의 주요 표적이 될 여지가 다분했다. 사람이란 게 적당히 더러운 면이 있어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거지….
거기다 백성이며 시민의 인망, 호응에 대해선 에드릭은 예전서부터 대단히 회의적인 입장이기도 했다.
‘굳이 나쁜 인상을 심어줄 필요는 없지만….’
좋은 인상 심어주려 애쓴 적도 없다.
중간만 가면 된다.
그 외엔 실적, 실리로 치장하면 그만.
사람을 떠받들게 되는 건 선하기에 떠받들고 그러는 게 아니다.
지혜롭고, 훌륭하며, 모범이 되는 것조차도 차등.
가장 중요한 건, 그가 승리자인가 하는 거다.
승리자, 1등, 최고, 최강.
이게 바로 선망을 자아내는 거다.
에드릭의 명성과 위명도 사실상 그런 것에서 기인한다.
어린 나이.
크게 실패한 적 없는 경력.
실패를 떠나 성공 신화를 이어왔다는 경의적인 업적까지.
“중요한 건 돈 많이 벌고, 잘 나가는 거지… 착하게 사는 게 아니니까.”
“난 착하게 살고 싶은데?”
프리지아가 뚱한 시선으로 되받아쳤다.
“그럼 착하게 살면서 승승장구하시던가.”
착한데 승리자다? 이거야말로 시대가 부르짖는 최고의 영웅상 아닌가.
선한 자가 영웅이 아니다.
승리자이며 정의롭기에 영웅 대접을 받는 거지.
웃기지만 전쟁이 빈번한 난세에선 적병을 난도질치고, 홀로 남들이 못하는 위업을 달성하면 개나 소나 영웅 대접을 해준다.
이렇게 보면, 영웅이란 존재는 얼마나… 작위적이고, 부질없는 건지.
무엇보다 영웅은 대체로 나 자신이 그렇게 여기는 게 아니라, 타인에 의해 규정당하는 것인 만큼, 내가 열심히 어쩌고저쩌고한다고 영웅이 되고 그런 것도 아니다.
‘그래서 주변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인 거고.’
그딴 영웅 타이틀, 명함, 칭호… 그러니 너희들이나 가지세요. 난 필요 없으니.
“착하게 살면서 승승장구하기가 어디 쉽겠어?”
“그럴 수 있다면 좋은 거지.”
에드릭의 평온한 대답에 프리지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상인한테 그건 호구 되라고 하는 말과 같다던데.”
“누가?”
“누구겠어?”
프리지아한테 이런저런 조언하는 인물이 있다면, 테티아나나 가문 사람들이겠지.
아님….
“그래도 하는 일이 일이다 보니 인망은 중요하다만?”
“그조차도 사업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야지. 호의를 사면 거래가 원활해지고, 적의를 사면 거래가 틀어진다. 순리 아닌가?”
“…착한 놈의 대명사 같은 네가 그러니 뭔가 앞뒤가 안 맞기도 하고. 그게 그 뭐냐, 네가 말한 처세며 정치, 그런 거야?”
“대충?”
너무 말을 많이 했나 싶었다.
이런 속내는 되도록 노출 안 하고, 겉치레로 포장해야 마땅한데, 괜한 소리를 한 것도 같아 적게나마 후회감이 치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프리지아도 느끼는 바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는 척하더니.
“야심을 숨기고 있는 건지, 아님 순리대로 충실히 이행한 덕에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배울 건 있네. 맞아. 호의며 적의 같은 걸 감정에 휘둘리기 앞서, 상황 및 환경적 요인에만 국한시켜야 손해를 안 보는 것도 사실이니.”
“……???”
“표정이 왜 그래?”
이 아이가 프리지아라고? 몇 년 못 본 사이 애가 많이 바뀌었는데?
“너 솔직히 말해봐. 프리지아 잡아먹고 본인 행세하는 도플갱어 아니냐?”
“…….”
녀석이 깬다는 표정, 간만에 표독과 혐오, 환멸이 1/3씩 섞인 특유의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자, 조금은 안심이 된 에드릭이었다.
“못 본 사이 여자다워진 것도 그렇고, 내면도 많이 성숙해졌는데? 머리도 술술 잘 돌아가고?”
“…오히려 잘 컸다, 바뀌었다고 하는 건 내 쪽에서 그래야 하는 거 아냐?”
“볼 때도 암말 안 했잖으면서?”
“말해서 뭐하는데? 키 큰 거 굳이 지적해서 어깨에 힘 들어가게 해줄 일 있나?”
하여간 또 또 성격 나오네.
그래도 확실히, 이전처럼 은연중 꺼려하거나 경계하는 듯한 기색은 완전히 소멸된 터라… 섹스 프렌드보다는 훨씬 더 친근한 이복 여동생 느낌?
……그게 뭔데?
자신이 정의하고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삼킨 에드릭이었다.
“뭐야? 너 지금 속으로 나 욕했지?”
“아닌데? 잘 컸다고 뿌듯해했는데?”
“헛소리는.”
어쨌든 서로 공사가 다망한 만큼 잡담은 적당히 하기로 했다.
내심 회포를 풀고자 하면 하루 이틀 가지고는 모자란 구석이 있는 만큼, 나중을 기약했다.
…생각해 보니 어제도 그럭저럭 술 마시면서 이것저것 이야기한 거 같긴 한데, 헤어진 기간이 길다 보니 아직도 아쉬운 구석이 여럿 남아 있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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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으로 하루 이틀 지나다 보니 본격적으로 축제 겸 각 대회가 열리는 날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당연 메인 이벤트는 무도 대회였지만, 그전에 식사로 치면 에피타이저 개념으로 열리는 각종 대회들도 있기에 반쯤은 규모가 축소된 올림픽 같은 분위기가 퍼져가고 있었다.
무도 대회는 나름 등용문이기도 하기에, 거기서 눈에 잘 띄려면 예선을 넘어 본선에 진출해야 했기에 그만큼 작정하고 준비하고, 대비하여 참가하는 이들이 태반.
그리고 부군 후보들 가운데 무도 대회에 참가할 이들은, 예외 없이 예선전을 시작으로 어떠한 혜택이며 특혜 없이 남들과 동일한 조건으로 참가해야만 했다.
그러기에 참가한다 치면, 무조건 본선 안에는 들어야 할 터였다.
…안 그러면 안 하느니만 못하지.
도망치고 도주하는 건 환멸하고 멸시하는 임전무퇴의 정신, 개념이 팽배한 이곳에서 어설픈 태도는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냥 나 전사 아니오, 학자니 칼 안 들겠소, 하는 게 야유며 망신은 뻗치겠지만, 그게 차라리 낫다는 거다.
열심히 싸웠다. 분투했다! 멋졌다!
……여기엔 그딴 낭만을 기대해선 곤란했다.
애초에 용병의 나라인 만큼, 요리로 치면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셰프인데 어설프게 요리 솜씨 과시한답시고 참가해봐라. 망신당하기 딱 좋지.
이런 걸 간단히 설명한 에드릭을 향해 프리지아가 코로 한숨인지 코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뿜더니.
“그런 거 치고는 긴장감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이리 투덜대는 게 아닌가.
의외로 준비할 땐 엄청 분주해 보인 주제, 좌판이며 가판, 그 외에 할당 블록 및 구역에다 상품 전시 등, 각종 세팅 다 완료하니 도리어 시간이 널널해졌나 보다.
덕분에 놀러 온 양 에드릭의 객실로까지 당도한 프리지아가 천하태평한 에드릭을 향해 위기감을 가지라는 양 쪼아왔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준비한다고 해결될 거였으면 평소 노력이 무슨 소용인데?”
“그래서 뭐 그거야? 평소에 열심히 했으니, 지금 와서 유난 떨 거 없다?”
“정확한 지적이야.”
“…얼마나 잘나졌길래 이리 태평해지셨을까?”
“나 이래보여도 신대륙 쪽에서 나라 세울 뻔도 했다? 그게 혀만 잘 놀리는 걸로 가능했을 거 같아?”
“좆 대가리 잘 놀려서가 아니고?”
“…….”
아, 이 여자.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네.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기에 순간 에드릭도 벙 쪄버렸다.
“예리해.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시점에 그 내용을 꺼내든다고?”
“부인하지 않는 거냐?! 와아! 그럼 소문이 사실이야?! 거기서 남근신으로 숭배 받는다 어쩐다 하는 거?”
“…….”
아니, 그거까지 소문이 났다고? 미친 거 아냐?
간만에 난감해진 에드릭이 이 오해를 수습하기 위해… 아니, 오해도 딱히 아니지만 어쨌든 분주히 손을 놀려가며 이것저것 썰을 풀어야만 했다.
그나저나 이게 당황할 일인가?
말하다 보니 묘하게 의아해진 에드릭이었다.
……그냥 자랑하듯 능청 떨었으면 족했던 건데, 괜히 사람이 모자라 보이잖아?
음, 아니야. 이런 인간미가 더더욱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거지. 실수도 때때로 긍정적 반응으로 이어지면, 그거야말로 더욱 좋은 거 아니겠나?
긴장을 풀고 있다 한 대 맞은 격이었지만, 에드릭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뭐, 리지 녀석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