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화 〉82. 대회 뒤풀이 겸… 그렇고 그런?(2)
모름지기 무상으로 밥 사주고 술 사준 친구치고 나쁜 놈이 없다는 말은, 반쯤은 진리 아니겠나.
…무조건 그렇다고 단정 짓긴 그랬지만, 아무튼 간에.
무엇보다 에드릭은 어쨌든 무도 대회 우승자다.
우승자가 한턱 거하게 쐈다, 자기 소원이란 명목으로.
뭐 귀족들 기준에선 썩 내키지 않을지 모르나, 적어도 백성들에게 에드릭의 존재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각인 될 건 당연지사.
그리고 이건 에드릭의 사업에도 영향을 미칠 여지가 다분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거기다 귀족들이라 쳐도, 에드릭이 단순히 이권, 황금 등에 휘둘리는 속된 인물이 아니라는 어필도 될 터이니, 다른 의미로 인상 완화에 기여할 여지가 생길 테며, 그런 에드릭과 친분을 다졌다고 소문이 나면, 백성들에게도 긍정적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지 않겠나?
이렇게 보면 또 너무 적절해서, 할 말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테고.
물론 탐욕스러운 몇몇에겐 금은보화, 황금이며 보석이 수북하게 쌓인 수레 쪽이 훨씬 메리트가 높겠지만… 그런 걸 일일이 그런 이들에게 이해시켜줄 필요까지야.
상대 쪽이 에드릭의 선택이 궁금해 직접 접근해 물어와도 대강 웃어넘길 판국에….
한편으로는, 이 자리에서 속내를 밝힌 게 맞는지 내심 후회되기까지 할 정도였다.
‘나도 아직 멀었네.’
아니라 입만 털었다 뿐, 본의 아니게 아직도 자랑하고자 하는 기질이 남아 있는 걸 보면.
그냥 호구 취급 받는 게 여기선 더 유용할 텐데 굳이 이걸 밝힐 필요까진….
‘아닌가?’
자기 PR에 너무 인색하면 그냥 호구가 아니라 개호구 취급받을 수 있는 만큼, 그건 아니려나?
“그보다 대회가 끝나 중요한 일들은 일단락 됐으니, 이제 약속을 지킬 수 있으렷다?!”
“약속?”
마이기신의 당돌한 말에 프리지아가 의뭉스러운 시선을 보내왔다.
“아, 그래. 대회 일로 집중하고자 했으니, 끝난 뒤에 용건을 진행하기로 약조했었지.”
“뭔 약속?”
“아기씨를 달라 했다.”
“……?”
프리지아는 이게 뭔 소리인가 싶어 잠시간 표정을 굳혔다.
“아, 아기씨…라면, 그건가요?”
데이시아 쪽이 먼저 의미를 파악하곤 당혹감을 내비쳤는데.
“그게 아님 무엇이겠나?”
하고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강조하는 마이기신 덕에, 뒤늦게 본뜻을 깨달은 프리지아의 안면이 그대로 굳어졌다.
“…언제 또 여자를 꼬아낸 건데? 조금 얌전해졌나 싶더니… 애당초 부군 후보인 주제 당당하게 여자한테 꼬리를 쳐? 미친 거 아냐?”
“…….”
에드릭은 내심 억울했다.
아니, 내가 유혹하고 그런 것도 아닌데 왜 나만 가지고….
“착각은 곤란하다. 그는 의리며 정조를 지키려 애썼다. 이건 일종에 내 희망 사항이며, 그가 약조를 했기에 내 쪽에서 이후 정당하게 요구하는 것일 뿐. 무릇 영웅이라 하면 남녀 구분 없이 짝을 여럿 감당 가능한 배포와 그릇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일찍이 동족들에게 전달받은 소문에 의하면 그는 여성 여럿을 단숨에 만족시킬 여력이 있다 들었으니, 질투심에 감정 상할 필요 없이 뭣하면 그대도 같이 참가하면 될 게 아닌가? 아님 그대는 독점욕이 강한 여성인가? 혼자가 아니면 내심 만족을 못 한다던가, 애정은 독차지해야 한다는 그런 주의인가?”
“…그,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
이 귀쟁이 여자는 왜 이렇게 당당한 거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건가?
마이기신은 고개를 내저었다.
“인간들은 왜 이리 성관계에 눈치를 보는지 모르겠군.”
에드릭은 그저 허허 웃으며 칭찬하듯 한마디 거들었다.
“대륙어가 많이 늘었네요.”
“연습 많이 했지!”
여전히 발음상 어색한 면은 있으나 언어 구사 자체는 이전에 비하면 괄목상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성향이며 성미가 급하고 과격한 면이 있다 뿐, 결코 지능이 뒤처지지 않았다는 건 저런 뛰어난 학습, 습득 능력만 봐도 충분히 파악 가능한 요소가 아닐까 싶었다.
“마음 같아선 공용어까지 익히면 좋겠지만, 그건 그쪽 일대를 정복한 이후에나 고려해보면 좋겠지.”
“하하하….”
대놓고 정복이라 하네. 진짜로 침탈해서 싸그리 날려버릴 속셈이라거나… 그건 아니겠지?
대륙어는 공용어와 함께 사실상 대륙 전체에 통용되는 언어지만, 문명이 발달한 곳일수록 대체로 공용어를 사용하며, 후미진 곳일수록 과거적 언어인 대륙어를 사용하곤 하는데… 이조차도 안 사용하고 자기들 언어를 사용하는 곳들은 결코 적지 않은 편이었다.
애초에 공용어는 문자 쪽이 강세고, 책을 집필할 때나 기록을 비롯한 신학 언어가 공용어로 굳어져서 대세화 된 것일 뿐, 신학이 발 디딜 틈이 적은 카일론에선 여전히 대륙어가 대세며, 그래서 고전파 마법사들이 이곳에 제법 친화적이라는데….
‘여기도 신학 계통이 학문이며 역사, 기록의 주력층인 건 변함이 없다 이건가.’
애초에 조선왕조실록 마냥 왕실, 왕가에서 각 잡고 미칠 듯이 세세하게 기록하는 예는 드물기도 하고….
“약속은 했으니, 원한다면야 제가 거절할 명분은 없는 거 같군요.”
“좋군!”
마이기신은 사탕을 받은 아이처럼 순박하게 미소 지었다.
음, 외모에 어울리지 않은 순수한 자태에 긍정적인 의미로 흠칫했다.
아름다운 여성, 미인, 미녀에 익숙해져 있다곤 하나, 가끔씩 그들이 내비치는 매력엔 여지없이 눈길을 빼앗긴다고 할까, 강탈을 당한다고 할까.
그리고 그럴 때면 없던 단순 매력의 개념을 더나… 이게 성욕으로 곧장 신호가 가는 경향이 큰데, 이건 언제 어느 때고 박아도 문제 없는 여건과 환경에 노출됐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발기하는 걸 자제할 필요가 없는 세계에서, 물건이 서는 게 뭐가 잘못됐다고?
하지만….
‘불청객…은 아니고, 대놓고 그러기엔 조금 애매한 사람이 하나 껴있지.’
마이기신도 당연 매력적이고, 프리지아도 말할 여지없이 검증된 매력을 보유한 미녀였지만, 데이시아는 다른 의미로 신비스러운 외양 덕에 묘하게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양 묘하게 의식을 사로잡는 면이 있었다.
말 그대로 그냥 끌린다고 할까.
모래색을 닮은 머리 색과 전체적 옷차림도 엇비슷하며, 무엇보다 이곳 세계 기준으로 현대적이지 않은 차림새는 나름의 개성을 부가해주는 면이 있었다.
갈색 바탕의 두 눈은 초롱초롱했으나, 약간의 그늘 진 면이 깊이를 더해갔는데, 자세히 보면 이게 또 아름답단 말이지.
그러다 문득 눈이 마주치고야 말았다.
데이시아가 애써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전환하려는 양 살포시 미소 지었다.
“하면 저는… 이쯤에서 자리를 비워 드릴 테니, 원하시는 바들을 실천하심이 어떠신지요?”
“왜? 너도 참가하면 되지 않나?”
마이기신의 직구는 참으로 당돌한 면이 있었다.
덕분에 데이시아의 미소가 그 상태 그대로 굳어버렸다.
“제, 제가 왜….”
“야밤에 사내가 있는 곳을 찾아와 술을 함께했다. 이건 의도가 너무 명확한 거 아닌가?”
“…저는 단순히 축하 의미로… 그리고 아직 날이 아주 어둑해지진….”
“이미 해가 졌으니 거기서 거기지.”
“…….”
에드릭이 슬쩍 웃으며 마이기신을 만류했다.
“너무 그녀를 곤란하게 하지 말죠.”
“왜? 그녀처럼 능력 있고 아리따운 여성을 너는 설마 그대로 놓아줄 참인가? 이 참에 내 것으로 삼지 그러더냐?”
마이기신의 폭탄 발언에 그녀를 제외한 모두의 얼굴에 당혹감이 치솟았다.
“…….”
“하?”
“허….”
“왜? 내가 틀린 말 했나?”
그러면서 데이시아에게 시선을 주더니.
“너는 에드릭을 어찌 생각하나?”
“어, 어찌 생각하고 자시고, 대단하신 분이라고….”
“그러면 뭣하나? 너 또한 빠르게 그가 딴생각 못 하도록 몸으로 그를 사로잡아야할 거 아니냐?”
“…….”
대단한 발상이시네 그려!
에드릭은 상상 이상으로 마이기신의 저돌적인 발상에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생각해보니 초원 엘프 중 잘 나가는 녀석들은 일처다부가 기본이긴 했지.’
심지어 남편이 여럿 되도 남에 남편이나 다른 남자 끼고 노는데 거부감이 없는 족속들이다.
예컨대 이것들한텐 바람이란 개념이 없다.
…일부, 소수는 그게 심한 케이스도 있다지만, 한편으로는 공공재 느낌으로 다룬다고 할까.
그 와중에 잘난 사내, 남성의 경우는 다른 의미로 공공재로 부려지는 게 아니라, 대우를 받는다지만… 잘나고 자시고 성욕 왕성한 엘프 여럿이 매일 같이 쉬지 않고 덮치면, 그가 용사라도 과연 버텨날까 싶기도 하고….
“그래도 에드릭 님은 훗날 왕녀 전하의 부군이….”
“지금 그런가?”
“……?”
“세상 일 모르는 거지. 부군 안 되면, 그때가서 다시 도전할 참인가?”
“도, 도전이라니… 저는 거기까지는….”
그보다 구도가 참 재미있네.
왜 내가 아닌, 마이기신 쪽이 데이시아를 설득하는 양, 한편으론 강요하듯 몰아붙이고 있는 거지?
실제로 프리지아 또한 그게 어처구니가 없어 뭐라 만류하려는 듯 보였으나, 결국 내버려두기로 결정했는지 술잔만 기울여대고 있었다.
“어차피 이런 것도 다 경험이니, 이 참에 에드릭의 겉 모습과 그가 지닌 능력을 보았으니, 이제 사내다움이 어떤지도 몸소 겪어봐야 할 거 아닌가?”
“…….”
그게 그런 건가? 맞는 건가?
혼란스러운 데이시아의 표정에, 에드릭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아니, 이게 왜 설득되고 있는 거지?
조금 시간이 지나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니 아예 공감이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에드릭은 객관적으로 보면 잘난 케이스다.
외모, 몸매, 능력, 인격, 지성.
…누워서 침 뱉기, 아니 자기 얼굴에 금칠하는 격이지만, 에드릭 자신도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놓고 만약 자신이 여성이라 가정했다 치면, 이런 남성이 애인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으리라 생각할 정도로, 스스로가 애초에 그러한 기준을 내심 연기 겸 진심으로 대하려 노력하는 터라… 이런 면만 보면 여성 입장에서 에드릭과의 관계 개선에 내심 마음이 끌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라고 생각은 하나, 그조차도 과연 진심 객관적인 건지 아닌지는… 솔직히 본인이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소재는 아니라 그는 생각했다.
‘제아무리 객관적이라 쳐도, 본인인 이상 그걸 완벽히 판단하기란 힘들지.’
애초에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진득하게 탐구하고 싶지도 않고.
어쨌든 에드릭이 잠시 딴청을 피운 사이, 마이기신이 몇 마디로 잘 구워삶았는지, 술 한 컵을 그대로 들이킨 데이시아 또한, 자리를 비울 결정을 만회한 채… 남기로 결정을 내렸나 보다.
그리고 여기서, 현실적인 주제로 상황을 전환한 프리지아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보다 이리 말했다.
“…그러면 방을 옮기지. 침대 하나 정도 추가해서 붙이면 되겠지 뭐.”
“…….”
그러곤 혀를 짧게 차며 이럴 거면 아예 대형 여관방을 빌렸을 텐데 하고 중얼대는데… 에드릭은 왜 그 혼잣말이 그렇게 무섭게 들리나 싶었다.
그보다, 내가 딱히 신호를 준 것도 없는데 왜 뜬금없이 4p 상황이 알아서 밥상 차려지듯 차려진 거지?
문득 눈이 마주친 마이기신이 살짝 윙크했다.
…아무래도 혼자 감당 안 되니, 독점에 앞서 내 호감마저 고스란히 사고자 하는… 여성의 술책, 처세술이 아닌가 무심코 고민해보지만, 설마 저 탐욕스러운 초원 엘프 출신이 잡아먹을 대상(?)으로 취급하는 사내를 위해 그런 배려와 수고를 감수했을 거라 생각하자니 이건 또… 애매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