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화 〉85. 뭐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라지.
검증이란 건 본디 의구심, 의혹 등을 날려버리고 확고한 확신을 가지기 위한 절차에 일환.
그런 의미에서 질문자들의 독사와도 같은 물음 등으로 문제가 불거져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을 정도로 그쪽 관리를 더디게 한 이가 있을까 싶었지만, 막상 파고 보니 아예 문제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특히 에드릭의 경우는, 근본이 어디냐가 사실상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됐다.
귀족도 엇비슷하나 왕가에 속하는 이의 경우엔 이 문제가 더욱 민감해질 수밖에.
사실상 부계가 아닌 모계, 즉 패왕녀의 부군으로 들어가는 식인지라, 자식 또한 결국 카일론의 뒤를 이을 것이기에 나중에 따로 어떤 신분이 있고 어쩐다 하더라도, 에드릭의 존재 덕에 승계권이 크게 구애될 건 없겠지만… 세상일은 또 모르는 거니.
역으로 만약이지만, 에드릭이 구 제국 측 핏줄이라면, 뜬금없이 제국의 적이었던 카일론 측에 제국의 땅을 집어삼킬 정당한 명분이 생겨나는 걸 테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럴 리가 있겠냐는 게 대다수의 의견이었지만… 의심이 심한 종자들은 그 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거기다 단순히 에드릭을 까는 선에서 끝나지 않고, 이건 에드릭을 포함해 각 부군들을 품게 되는 패왕녀에 대한 견제 및 의혹을 추궁하는 문제로까지 번졌는데, 이런 질문도 포함돼 있었다.
“어차피 왕녀 전하께선 전쟁을 일으키실 참 아니시오? 제국의 몰락 이래 각자가 제국의 정통성이니 뭐니를 따지며 들고 일어나 서로를 갉아 먹질 않나, 하나가 아니라 수십으로 쪼개진 나라 아닌 나라들이 태반이니 외부에서 덮쳐대기엔 이보다 좋은 요건이 어디 있겠소? 과거야 제국령이니 침범 자체로 제국과 싸우자는 거니 쉽사리 시도가 힘들었겠지만, 현재로선 그러한 위험 부담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으니, 이 얼마나 수월한 문제요? 명분이야 그런 것도 다 만들고 어떻게 하면 그만인데….”
거기다 이종족들도 수월하게 품은 덕에 인간 이외의 종족들과의 연계라던가, 적대감도 훨씬 적어 그들과 국경을 맞대더라도, 이종족을 배척하며 혐오했던 여타 구 제국 출신 국가들에 비하면 훨씬 환영받을 건 불 보듯 뻔했고.
“군비를 확충한다 하여 그런 오해를 사는 건 곤란하군.”
이에 대해 패왕녀는 단호히 부정하고 부인하는 형태를 보이지 않고, 되려 그러한 점을 억지로 부각 시키려드는 태도를 꼬집어 역공을 취했다.
“정통성이 있다곤 하나 카일론은 엄연히 중앙 집권을 토대로 이룩한 왕국. 중앙의 힘이 낮아지면 각 영주들의 개인주의 및 성향이 강해지고, 이로 인한 분열과 혼란이 심하면 내전으로까지 이어질 터.
이럴 때 이를 제지하고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왕가를 포함해 국가가 힘을 비축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 거지? 더군다나 반대되는 의미로 제국의 유지를 잇겠다며 제국의 적이라 칭했던 우리 카일론과, 종교적으로도 논란이며 분쟁 명분을 여럿 둔 우리로선, 어설프게 방심하고 얕보일 낌새를 보여 적들로 하여금 침범 및 침탈의 소지를 두는 게 도리어 국가를 어지럽히는 요소일 거라 생각한다만.
외적이 침범한다는 거 자체로 국가는 대혼란을 맞이한다.
그로 인해 생겨나는 물자도 전부 국고며 세금, 그 외에 후원 등, 절박할 땐 지원을 빙자한 탈취로까지 이어질 터. 이로 인해 다시 더 큰 혼란과 불만이 함축되면 또 다른 불씨가 생겨날 터인데, 댐의 중요성이 무엇인가?
폭우가 오고 기상 이변이 생긴 시점에도 충분히 문제가 터지지 않도록, 이를 원활하게 조절하고 다루고, 활용하기 위함이 아닌가? 군대를 확충한다 하여 그런 식의 의심은, 그대야말로 병력을 모으고, 용병에게 거금을 치러가며 그들을 긁어모으고, 병기 및 병력 확충을 위한 장비, 도구 등을 보충하는 것조차 결국은 침략의 일환이니, 그러한 것을 포기하고, 손 놓아야 한다, 그게 정당하다 그 의미인가?
한번 말해보도록.
무엇보다 비대칭 전력으로서 적들은 종교적 신념과 믿음으로 백성을 통제하고 이를 이유, 명분으로 내세우는 상황에 우리 카일론이 그들과 맞서기 위해 택한 것이 무엇인가?
전사, 기사. 그리고 유서 깊은 조상들의 영광된 유지와 얼. 그리고 새로운 것을 배척 않고 수용해 더욱 성장하고 발전하고자 하는 복합성과 수용성까지.
저들의 교단에서 비롯된 온갖 것들을 맞서고자 우린 뜬구름 잡는 무언가가 아닌, 실재하는 혈통, 종족, 그리고 학문과 사상, 신념 등을 혼합해 맞이함으로써 새로운 통합 구조를 이룩했다.
구 제국의 자부심이라 일컫는 그 오만방자한 인간 존귀론이라던가, 인간 구제론 같이 잘난 맛에 자기들만을 칭송하며 우대받고 존중받고 대우만 받길 강조하는 그런 불평등하고, 불합리하며, 일방적으로 세간의 대부분에게 피해와 희생을 강조하는 그 모든 것들, 출세의 기회, 성장의 기회조차 박탈한 채 타고난 것에 한정돼 삶을 확정 당한 그런 것들로부터, 우린 온전한 해방과 자유를 꿈꿔온 것 아닌가? 구 제국의 유지를 잇는다는 건 다시 한번 인간을 위대하게 어쩐다 하는데, 그렇게 인간이 주류가 된 다음은? 다시 인간 내에서도 차별 및 차등을 둘 테고, 거기서 다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분쟁과 갈등, 투쟁이 잇따르겠지.
존귀한 자는 입이 아니라, 타고난 그런 걸로 정하는 게 아닌, 태어나 살아온 흔적, 그 결실이 증명하는 바. 그러나 세상엔 거저 누리고, 얻고, 쉽게 가고자 하는 것들이 부득이하게 악을 쓰고 용을 써가며 자신들의 권리, 권위를 수호하고자 난리가 아니었지.
자, 그러면 다시 묻지. 이런 게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 구 제국이 정의로워서? 신의 선택을 받아서? 고귀하기 그지없어서?
결론은 무척 간단하다. 그들에게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대, 국가 통치 이념, 제도, 민족성, 법률, 상식관.
그러한 것들의 총합으로 제국은 성장했고, 동시에 몰락했다. 제국이 강대할 땐 크고 작은 왕국, 혹은 영지는 힘 있는 자가 원하면 언제든 침탈 당해 모든 권리와 권위, 가장 기본적인 자존감마저 박탈당했다.
왕은 미모로 소문 난 공주를 딸로 뒀다는 이유로 국가가 유린당했고, 피눈물을 쏟으며 자기 딸이 자기 눈앞에서 겁탈당하며 조롱당하는 꼴을 지켜보다 피를 토하고 죽고, 공주 본인은 그 충격으로 폐인이 되기도 했다지?
카일론에게 제국이 그러하지 못한 이유는 실로 간단하다.
카일론이 이에 대비했고 힘이 있었으며, 이를 대항할 대항마이자, 약자들의 성원과 백성들, 군중들의 힘을 합해 그 악에 대항했기 때문이지. 그러나 이게 가능한 것은 결국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화는 절대 입과 손짓, 발짓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펜을 아무리 잘 놀린들, 외교로 제아무리 무언가를 양보하고 완화시킨다 한들, 힘이 없다면 빼앗길 것이고, 빼앗기기 싫다면 침탈당할 것이고, 그조차도 저항하려 들면,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게 패악질을 저지르는 무리들, 도적 떼들의 공통적 행사들 아닌가?
왕이며 왕족, 그 휘하에 놓인 귀족은 그러한 폭거로부터 백성을 수호하는 것으로 그들의 호응과 존경, 충성을 맹세 받는다. 그 때문에 세금을 걷는 것이지, 착취의 대상으로서 걷고, 탈취한다면 이게 도적 무리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왕은 도적인가? 귀족들은 수적, 해적 무리들인가?
지켜낼 힘이 없이 탈취만 하고 착취만 한다면 과연 그것은 정당한 수거인가? 마법사들도 마찬가지다. 능력을 증명했고 힘을 갖췄으며, 그 학식이 실질적인 효용, 효율을 보였기에 누구보다 이름이 드높아짐은 물론, 존경 받아 마땅한 것.
그러나 존경만 받을 뿐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도적이며 강도 무리에게 마법사의 존귀함 따위가 중요하겠나? 금화는커녕 은화 하나만도 못할 터.
그러기에 그들에게 말로 이래라 저래라 해봤자 돌아오는 건 칼이고 주먹이고 몽둥이질, 도끼질이겠지.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 감히 그러지 못하게 만드는 건 무엇인가?
오랜 기간 마법사들의 위세, 그 위력, 존재감이 널리 떨쳤기에 그들이 감히 기휘를 넘보지 않음이지, 그게 아니라면 그들이 두려움을, 공포를 품을 이유가 있는가? 약자를 핍박하고 탈취하는 걸 직업 삼아 행패를 부리는 작자들이?
그러므로 다시 묻지. 힘을 갖추고, 더더욱 큰 힘을 갖추고 무장하고, 이루어가는 것이 글러 먹은 짓인가? 침탈을 위해, 단지 병정놀이 삼아, 땅 따먹을 용도로만 병력을 부리고 이러는 것 외엔 정녕 의미가 없다, 그대는 그렇게 생각하는가?”
……단순히 반발하는 선이 아니라 아예 온갖 명분 싸잡아 끌어와서 웅변을 토해버리네.
거기다 말하는 투, 일종에 기세가 워낙 막강하다 보니, 이론적으로도 오류나 억지가 포함돼 있음에도, 주변에선 크게 머라 반박하려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애초에 에드릭을 포함해 부군 후보들한테나 저들의 익명성이 보장된 거지, 과연 국왕이며 패왕녀한테도 그게 적용될지 아닐지는 솔직히….
아마 그 점을 저들도 대강 의구심을 가지고는 있을 거다.
어쩌면 저렇게 따진 거 자체가, 일종에 바람잡이… 일부러 저런 소리를 토해내 저러한 답변을 하기 위한, 공작? 설계일지도.
……이쯤 되니 맞는 거 같기도?
아무튼 이후로도 간간이 패왕녀에 대한 질문, 질의도 오고 갔는데, 당연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부군 후보들에 대한 의구심, 이를 바탕으로 한 의문점을 찔러 드는 것에서 비롯됐다.
…그러면서 겸사겸사 패왕녀의 재지며 대응력을 어필하려는 수작이 아닐까, 이조차도 결국 정치적 쇼가 아닐까 하고, 에드릭은 생각했다.
원래 정치라는 건 얼마나 잘 준비하고, 잘 설계해서, 그럴싸하게 보이느냐니까.
이윽고 한참 진행된 내용이 대략 3시간에 걸쳐 시간 제한으로 마무리되고.
“내일도 이어서 오늘 풀지 못한 의문에 대해 해소하도록 할 테니, 다들 머릿속에 담아두었다가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후보들은 오늘 미흡했던 것들을 다시금 다독이고, 보완하길 추천 드리도록 하겠다. 이상.”
웅변을 토할 땐 말 놓더니 다시금 말을 가다듬는 패왕녀.
그런데도 부군 후보들한텐 또 은연 중 말을 놓는 게, 벌써부터 내가 갑이여, 하는 모습이 아주 기세등등했다.
…틀린 말은 아니니 별로 어쩌고 할 거도 없었지만.
마탑을 나설 때쯤 되니, 오전 중에 들어선 걸로 기억하는데,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우리 세계, 현대에선 노을이 진 이후, 하늘이 어두워진 직후가 사실상 퇴근길이고 오밤중인데… 확실히 이곳 세계는 대부분 해가 떨어지기 직전 공무를 끝내는 거 보면… 한편으론 이런 쪽으로 여유가 더 넘치는 걸지도.
…그리고 그 남은 시간, 즐길 거리가 한정됐으니, 술 퍼마시거나 남자 여자 끼고 하고 노는 걸 테고.
“어땠어?”
그리고 마탑 입구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에우리에 누님이 자리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곱디고운 자수정과도 같은 눈을, 무심한 와중에 그윽이 빛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