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화 〉87. 위로받고 싶은 날이란….(2)
어쨌든 시간은 흐른다.
프리지아 녀석 떠나기 전에 마지막 회포 푼다 치고, 그때 다른 이들도 초대해서 대강 서운하지 않게 축포라도 터트려주면 좋으려나.
‘아니면….’
그냥 에드릭 자신이 질펀하게, 혼자 다음 날까지 계속 상대해준다던가?
어느 쪽이든 녀석은 좋아할 터다.
…아마도.
----------
“이상하네요.”
간만에 마주한 데이시아가 에드릭의 제안에 의구심을 표했다.
“데이엔 가문에 고용되는 건데, 어째서 에드릭 님이 제 청을 들어주시겠다고 하시는지…요?”
“시아는 어쨌든 먹고 살 길을 마련할 겸, 안정적인 기반을 다지고자, 실력도 살필 겸 여기에 왔다고 했었지?”
“예. 저번에 말씀드린 바대로….”
“데이엔 가문도 자체적인 호위 사병이 있지만, 핵심적인 실력자는 아무래도 적거든. 특히 시아 같은 정령술의 달인은, 쉽사리 구하기 쉽지 않겠지.”
“…….”
고민하는 기색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 제안은 프리지아 님이 결정하실 사안이 아닌가 싶어서.”
“물론 리지한테도 이야기할 거야.”
어차피 품을 수 없다면, 다른 방향으로라도 선회해야지.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나름 출세 및 기회를 잡고자 이곳에 당도했음을 기억한 에드릭은, 생각 난 김에 곧장 만나 데이엔 가문의 전속 호위로서 그녀가 고용되어주었으면 하는 의중을 밝혔다.
그러다 가신단에라도 속하면, 더할 나위 없기도 할 테고.
“…의외네요.”
데이시아의 의문 어린 태도에 에드릭이 곧장 물었다.
“어떤 점이?”
“…저는 에드릭 님 산하로 들거나, 그도 아니면 나중을 기약해야 할 줄로만 알았는데.”
“…….”
그건 그것대로 과대평가?
그녀를 호위로 삼는 건 당연 상정 범위 내에 있는 일이었다.
그보다 에드릭이 손 쓰기 전에 다른 쪽에서 줄기차게 손을 써왔을 거고.
외모며 성격, 취향적으로도 알맞아 어쨌든 관계를 맺었지만, 나름 몸을 섞는 것을 통해 호의를 넘는 관계를 맺어, 엮어두려는 계산이 아예 없진 않았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괜스레 자신의 타산적인 성향에 자괴감이 샘솟지만, 그런 내색을 안 비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또한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 아니겠나.
애초에 호의가 있는 것도 맞고, 순수한 의미로 관계를 맺은 것 또한 맞다.
그러는 김에 이것저것….
“그도 그렇지만, 아마 나하고 붙어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험한 일을 당할 테고, 무엇보다….”
나중에 전쟁에 원치 않게 휩쓸리거나 참여하게 되면 그건 그것대로….
그녀가 전의에 불타거나, 출세욕이 과해 전쟁에서 제 몫을 충분히 해내고도 남을 인재였다면, 에드릭은 마찬가지로 자기 휘하에 둘 생각도 다분했었다.
그러나 관계 뒤 고분고분, 한편으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본 결과….
그녀의 성향으로는, 안정적이되 파란이 적은 직장 환경을 구해주는 쪽이 타당하단 결론이 나왔다.
그렇다고 무작정 익숙지 않은 일을 시키긴 그러하니… 배우면서 익숙해지고, 동시에 처음부터 일정 대우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좋겠구나 싶어 결정한 게 이것.
…또한 바로 어제, 데이엔 가문에 호위를 조금 튼실하게 해야겠단 생각도 들었기에, 이런 판단을 신속하게 내릴 수 있었던 거였는데.
거기다 에드릭 자신이 혹여 문제가 터지거나, 이쪽 세상에서 영영 사라진다 쳐도, 데이엔 가에 뿌리를 내려놓았다 치면, 그녀에게 선택지가 하나라도 늘어나는 셈이니….
진심 되게 관계를 맺은 존재인 만큼, 에드릭은 가급적 하나라도 더 배려해주고 챙겨주고픈 심경이었다.
…그리고 기왕 그럴 거, 다른 방향으로도 시너지가 생겨나게 하는 게 효율적이기도 하고, 좋지 아니한가.
“저는….”
“프리지아도, 테티아나 가주님도 좋은 분들이시고, 배울 점도 많을 테니 네가 성장하면서, 또한 네가 무시 받고 괄시받을 일 없이, 하고자 하는 일을 아직 모른다 하더라도, 그동안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라 보거든. 호위 일을 하다가도, 하고 싶은 일이 있으려면 뭐가 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 혹여 비상금? 자금이 있다 해도 세상 물정을 모르면 그런 거 바가지 쓰고 날로 먹히기 십상인데… 그 정도는 잘 알 테고. 맞지?”
“…….”
“그리고 일전에도 말했지만 말 놓아도 된다니까.”
“아니에요. 이게 편해서요.”
그러곤 배시시 눈웃음치는데, 이렇게 예쁠 수가 없다.
한편으로는, 가슴이 싸해지는 감이 있었지만.
이제, 확실하게 그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언제라도 리타이어, 즉, 세계로부터 방출될 수 있단 걸 자각하니, 훨씬 더 이런 인연 관계에 대한 실감이….
“아, 그리고 혹시라도.”
둘 뿐인 공간이긴 했지만, 에드릭은 과장되게 주변을 슬금슬금 살피는 척, 주위를 둘러보더니.
맞은편에 앉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은은한 목소리를 흘려 넣었다.
“혹시라도, 임신해서 내 아이를 품었다고 치면… 안정된 곳에서….”
“?!?!”
음, 이런 말을 건넬 줄은 예상 못 한 건가?
에드릭은 데이시아의 그 산뜻하며서도, 급 당황해 얼굴을 당근처럼 붉힌 채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아와와 거리는 그녀를 보곤, 소리 죽여 웃어 보였다.
…뭐, 해놓고 애 생긴 뒤 나 몰라요 할 정도로, 무책임하게 떠넘길 생각은 애당초 없었으니까.
세상 참 피곤하게 사네 뭐네 한다 쳐도, 에드릭은 이쪽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결혼은 하지 않더라도 혼외 관계로 자식이 생겨 결혼하기도, 아님 홀로 키우기도 하는 게 이곳 세계에선 꽤 적나라하기도 하고.
교단이 자리 잡아 일부일처가 흔하다곤 하나, 그조차도 결혼 전엔 잘 터치 안 하기도 하니.
일부 종파에서는 극단적이리만치 남녀 모두에게 순결을 강조하나… 에드릭은 그 결과가 어떠한지 이미 본래 세계의 역사로 잘 이해하고 있는 터라, 그런 쪽으론 대단히 프리한 편이었다.
‘나중에 이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건 본사가 하지 말라며 막은 것도 아니니, 에드릭으로선 더더욱 거리낄 이유가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곳 세계의 최대 낙이 다양한 여성들과 떡을 치는 거기도 했으니까.
-------
프리지아가 에드릭의 제안에 귀 기울이다 별 다른 반발 없이 긍정, 수락의 태도를 내비쳤다.
“그래, 그 이야기는… 그렇다 치고. 우리로서도 반겼으면 반겼지, 마다하고 할 이유는 없겠지.”
실상, 데이엔 가엔 프리지아의 애인으로 눌러앉은 드래곤이 있지만, 아직 그 드래곤의 위세며 능력을 기대하기엔 아쉬운 감이 있는 만큼, 이런저런 전력을 쌓아둬서 나쁠 건 없겠지.
“아무튼 용건은 그걸로 끝?”
“왜 그렇게 까칠한데?”
“까칠은 무슨. 이게 평소잖아?”
…그건 맞지.
“여유가 없으니 뭐든 속 좁게 받아들이는 거지.”
“…끙.”
부인하면 그건 그것대로 속 좁은 짓이니, 뭐라 변명하기도 그렇고.
“평소처럼 속 좁으면 어때서? 하고 받아치지도 못하는 거 보면, 되게 심각한가 봐?”
“그 정도는 아니고.”
“아니긴 뭘.”
혀까지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녀석 눈에도 그렇게 상태가 안 좋아 보이나 싶어 에드릭은 의아해졌다.
“그도 그럴게 이상하잖아.”
“뭐가?”
“언제부터 우리들 위해줬다며 그런 걸 배려해주고 그러셨데? 보나 마나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확실한데, 말 못 하는 거 보면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거 같은데.”
“…오빠는 네가 영민해져서 참으로 뿌듯하기 그지없구나.”
“오빠는 무슨. 차라리 아비라 그러지?”
“…생각보다 훨씬 뻔뻔해졌네?”
“이쪽 일 하려면 얼굴에 철판 깔라는 게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허허.”
아주 많이 컸구나, 욘석아.
그놈의 몸도… 마음도.
프리지아가 거듭 말했다.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만, 착오 안 생기게 똑바로 해. 홀몸인 것처럼 보여도 너, 엮여있는 게 한둘이 아니잖아?”
“위로를 하려는 건지, 질타를 하려는 건지.”
“둘 다거든?”
뾰족한 음성으로 들이밀 듯 주절대고는 있지만, 저건 녀석이 솔직하지 못한 탓도 일부 포함돼 있을 터다.
낯부끄럽게, 직구로 위로며 격려라는 걸 못하는 녀석이니까.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까, 하자.”
“뭘?”
“뭐긴 뭐겠어?”
에드릭이 의자에 앉은 채 주변을 기웃거리는 녀석을 향해 분주히 손짓했다.
“…아직 할 일 남았는데?”
“그건 내일 하거나 부하들에게 맡기고.”
“맡길 걸 맡겨야지.”
“그래서, 안 할 거야?”
“……하아.”
한숨을 크게, 푸욱 내쉬지만… 결국 녀석은 주춤거리다 에드릭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고는.
풀썩.
에드릭의 무릎 위에 그대로 자리 잡는데….
에드릭은 그 상태로 그녀를 끌어안은 채 그녀의 머리맡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곳 세계에서도 이색적인 머리 색도 그렇지만, 그곳에서 풍겨나오는 상큼하면서도 야릇한 향기는, 어느 의미로 독보적이지.
필시 비누며 샴푸로 쓰는 건 이러한 향과는 조금 거리감이 있는데, 그녀가 사용하고 나면 이런 식으로 향기가 화학 변화를 일으키기라도 하는 건가, 괜스레 궁금해진다.
…테티아나도 그랬었는데, 역시 모녀는 닮기 마련인가.
“이렇게 보면 얘 같은데.”
“난 원래 애였거든.”
“귀에 대고 주절대지 마. 간지러워.”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역시나 간지러운지 한두 차례 몸을 떠는 프리지아.
여기서 옷감 안쪽에 자리한 육신을 상상하며 몸을 매만지는 것도 물론 좋지만, 그러다간 곧장 본론으로 들어갈 여지가 있기에, 지금은 힐링을 하고픈 심경이라 잠시간 이러고 있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애초에 에드릭은 굳이 떡을 안 치더라도, 이러고 있는 거 자체를 좋아했다.
…이 상태로 자면 리얼 꿀잠 확정이지.
그래도 내일 배웅 겸 송별회 차원에서 여러 사람들, 관계자들과 함께 파티를 벌인다 치면… 이런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는 건 아무래도 애매해질 테니….
“…그렇게 좋으면 진작 좀 오던가.”
“떨어져 있을 때야 비로소 소중한 법이니까.”
“……하여간 이상한 쪽으로 고집을 부려서는.”
답답하다는 듯 콧방귀를 뀐 그녀였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에드릭의 어리광에 별다른 저항을 취해오진 않았다.
도리어 마음껏 만끽하라는 양, 몸에 힘마저 뺀 채 등을 기대오기까지 했으니, 에드릭으로선 더할 나위 없다고 할까.
사실 침대에서 이러고 있는 게 훨씬 좋았지만, 그러다간 본 게임으로 욕구의 저울추가 기울 여지가 있기에, 이쪽 의자 위에서 이러는 쪽이 아무래도 알맞기도 했고.
“…….”
그래도 역시 사람이란 게 앉으면 눕고 싶듯, 거위 배를 가른다는 기분으로 뭔가, 지금의 안정감과 포근함, 안락함으로부터 탈피해 더욱 강렬한 체험을, 조금 피곤하고 귀찮고 번거롭다는, 일말의 기분을 충동적으로 느꼈음에도, 에드릭은 마치 불씨에 붙은 도화선 불이 화약을 향해 타들어 가는 양 자신의 욕구가 그쪽 방향으로 기울어져 감을 대강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려면 몸부터 씻고 하던가.”
“내 앞에서 그 소리를 하는 거야?”
옷만 벗으면 1분 내로 전신 세탁… 아니 세척…도 이상하고, 아무튼 목욕은 일도 아닌데 뭐.
“그런 거 말고, 조금 물에 몸 담그면서 느긋하게 좀 보내자 이거지. 사람이 왜 그렇게 정이 없어?”
“…….”
너한테 그런 소릴 들을 정도면, 정말로 나도 갈 데까지 갔나 보구나.
에드릭은 조금, 자괴감 비슷한 심정이 들어 침울해졌다.
“…처음이야 신기하고 좋고 어쩐다 하지만, 그거… 뜨거운 물에 몸 담그면서 쉬는 그런 거하곤 아무래도 다르잖아? 너 여기 와서 가장 처음 크게 일 벌인 일도 욕탕 무작정 지었다는 일화라고 들었는데… 그래, 그때 잘 즐겼나 몰라?”
“잘 즐겼지. 호의가 있는 이들만 따로 추려서.”
“…그걸 자랑이랍시고 지금 날 껴안은 상태로 하고 자빠진 거야?”
“안 돼?”
“……하여간.”
뻔뻔함이라는 건 죄악이 아닌 한도 내에선 전혀 거리낄 게 없는 법.
일부일처가 확고부동한 세계관, 흐름, 문화였다면야 에드릭도 알아서 자제했을지도.
하지만….
“알았으니까… 물 담을 대야는 있으니까 물만 네가 해결하면 되겠네. 지금 준비하라 하면 기다리는데만 한나절일 테니.”
“때마침 물을 끓여놨으면?”
“…그런 요행에 우연을 기대할 필요가 있긴 하고?”
어쨌든 간만에… 생각해보니 왜 이걸 떠올리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비록 물과 친화적이고 물을 소환해 간편 세척이 가능하다곤 했지만….
첨벙!
“후우!”
역시… 이 느낌은… 으음, 세속적? 인간적? 아무튼 그런 실감을 더욱 절절하게 떠올리게끔 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더군다나….
“후!”
일전에 흑성 기사단 멤버들 다수와 알몸으로 목욕을 즐겼을 때와는 또 다른 실감, 기대감, 초조함 같은 게 있다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