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9화 〉89. 맹자가 당긴다.(2)
“그러기에 우린 그들을 아버지라 부르며, 어머니라 부르곤 합니다. 국가 또한 그러하죠. 아버지의 나라, 어머니의 나라. 그리고 아버지는 마땅히 자식을 잘 양육하고, 길러 그가 마땅히 자신의 뒤를 잇고, 훌륭하게 자라도록 인도할 의무가 있습니다. 자식은 그러한 아버지의 가르침과 인도에 따라, 훌륭히 자랄 의무가 있고요. 이에 대해선 모두 틀리지 않다 여길 걸로 짐작됩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였으니까요.”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다.
예로부터 많은 사상가, 현자, 지자(知者)들은 왜 백성들에게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이야기했는가.
답은, 무지몽매하기 때문이다.
배운 바가 없으니 천박하고, 가진 게 없으니 비굴하며, 지난 바 능력이 없으니 비참하다고.
…그런데, 이걸 욕하고 지탄하고 자시고 하는 게 문제일까?
그러기에 통치자들은 자신이 잘 다스리면 족하다, 그게 알맞다, 그게 곧 진리다, 하늘이 그러기에 내게 의무를, 힘을, 책무를 부여하셨다… 라고 자기 멋대로 해석을 해대거나, 특정 누군가에게 선택받았다는 식, 점지받았다는 식의 도참 사상에 심취해 개소리로 무장하기도 하는데, 여긴 명군, 폭군, 망군도 예외가 없다.
도참에 대표주자 중 하나가 먼치킨 황제로 이름 높은 후한 광무제였으니까.
어쨌건 이를 명분 삼아 깽판을 치기도 하고, 그러다 침몰하고 몰락하고, 그 와중에 제일 잘 난 놈이 승리해 역사를 장식하고.
애초에 동등하게 기회를 제공한다,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건 정당한가?
민주 사회에서야 지극히 당연하다 생각하는 부분임에도, 여전히 제대로 지켜지질 않는다.
사회주의 공산주의도 당연 예외가 없다.
그러면 민주주의, 공산주의 이전 시절은?
“어느 사람이 친구에게 부인과 자식을 맡긴 채 먼 곳으로 놀러 갔다고 칩시다. 그런데 돌아오고 보니, 부인과 자식이 추위에 떨고 굶어 죽게 생겼다면, 여러분들은 그 친구를 어찌 대하시겠습니까?
그는 의무를 다 하지 못 했군요.
아버지로서 자식을 제대로 키우지 아니했고, 남편으로서 부인에게 소홀히 한 채 자신의 사욕을 챙겼습니다. 그는 정당한 일을 했습니까? 올바른 일을? 그런 자가 당신의 친구라면? 그럼에도 여러분들은 그와 친분을 이어갈 것인지요?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살인죄를 지은 이를 법의 이름으로 단죄 않고, 자기 멋대로 용서해주었다면?
그가 다시 풀려나 또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런데도 또 용서하고, 이번엔 그가 어느 한 가정의 아이를 죽이고, 부인을 겁탈하며 남편 되는 자를 불구로 만들었다면?
이럼에도 그를 용서하는 이가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걸 마땅히 지켜만 봐야 한다 생각합니까?”
여기쯤 가니 분위기가 묘해졌다.
사실 못 알아먹는 이들이 태반일지도.
오히려 알아먹는 녀석들도 의아한 눈치였는데….
“마지막입니다. 아버지가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못 해내 아내와 자식을 모두 죽이려 든다면? 얌전히 죽으시겠습니까? 마을 촌장의 자식이 패악질을 저지르고, 온갖 악행을 다함에도, 촌장의 자식이란 이유로 용서받으며, 그의 자식이며 혈육 아닌 이들은, 아주 사소한 잘못 만으로 큰 대가를 치른다면?”
자, 여기서 말 한마디만 더 하면 분위기 개판 나는 건 순식간이겠지.
그러나, 과연 그게 맞긴 한가?
아니, 아니지.
그건 자기만족조차 안 된다.
신념도, 대의도 뭣도 아니다.
그러기에.
“그러기에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자식은 자식으로서, 부인은 부인으로서, 형제며 친구는 형제이자 친구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된다 생각합니다.
이렇다면, 우리가 대비해야 할 건 결국 외부의 도적들뿐.
그러나 아버지이되 아버지의 역을 다하지 못하는 이가 있다면, 그가 그런 잘못을 저지름을 지적해 이를 고치게 하는 게 마땅히 자식이며, 부인이며, 또한 형제이자 동료, 친구의 역할이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한들 그가 바뀌지 않는다면, 조상신께 여쭙고, 촌장께, 현자며 현인에게, 영주님에게, 그러고도 안 된다면, 왕에게 와서 아버지로서 도움을 청하십시오.
그리한다면, 우리가 주의해야 할 건 결국 외부의 도적들뿐입니다.
오로지 그것들뿐입니다.
마물들, 도적들, 그리고… 틈틈이 카일론을 노려오는 적대국, 적성 국가들뿐일 겁니다.
그들이 여러분에게 호의를 베풀 거라 기대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앞서, 우리가 호의와 배려를 줄 수 있도록, 그러려면 그들이 설혹 도적으로서 칼을 들고 우리를 위협하더라도, 그것들을 마땅히 제압할 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압할 힘이 생겼다 하여, 여러분들이 도적으로서 그들의 목숨을, 권리를 농락하지 마십시오. 이는 명예롭지도, 하늘에서 지켜볼 조상의 이름, 영광됨을 더럽히는 행위일 겁니다.
과연 그런 이가, 죽어서 하늘길을 오를 수 있겠습니까? 강대한 영주가 힘에 취해 세금은 막대하게 거두며, 온갖 노역을 시킨다고 생각해봅시다. 과연 이것이 정의롭고, 의로운 일이겠는지요?”
결과적으로 이것도 아부라면 아부다.
그러나 누군가는 의구심을 품었을지도.
조금만 방향을 틀었다면 이건 반대로…….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겁니다. 해야 할 일을 한다. 그 자리, 그 위치에서.
우리가 우리로서, 우리 역할에 충실하면 된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러지 않는 이가 있다면….”
죽여야지. 없애야지. 배제해야지.
라고 내뱉고 싶었지만, 애써 순화했다.
“……그들이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것이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당당하고, 정당하며, 의로운 역할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들에게, 그러한 본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군요.”
거기까지 말한 뒤, 에드릭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시선을 낮추었다.
자그마한 차이지만, 시선의 각도가 조금만 바뀌는 것만으로 보이는 세상은 이리도 달라진다.
가진 자의 발언, 행동거지, 태도가 중요한 것도 그런 이유일 테지.
행하는 모든 것에 아랫사람들, 백성들, 선망하는 이, 적대자들까지.
모두에게 영향을 가져다줄 수밖에 없기에, 그들은 도무지, 자유라는 게 없는 족속들이다.
…그러기에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은 한, 그 굴레는 너무나도, 불행한 게 아닐지.
반대로 노예로 살아가길 자처한다면, 적어도 노예라 한들 세상 전부를 가진 듯 느껴질 테니, 지상 아래 그 누구도 비할 바 없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을지도.
“여기까지입니다. 가벼운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조금 의도와는 달라졌군요.”
에드릭이 한 이야기는 사실 백성들보단 귀족들 측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내용들이었다.
개중에는 자기를 비꼬고 비방하려는 목적이 아니냐며 분개해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며, 일부는 그 의도의 불순함을 살피고자 머리를 분주히 굴려대는 듯한 눈치들.
백성들은 어찌 받아들였을까.
솔직히 말을 조금 더 쉽게 했어야 했는데, 하다 보니 의도보다 더 어려운 용어들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개중에 머리가 돌아가는 이가 있다면, 학식이 풍부한 이가 있다면, 조금은 영향을 주었을지도.
‘…라고 자기만족에 빠져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의도하고는 완전히 어긋났다.
그리고 이곳에서 가장 잘나신 분들은, 이번 연설 내용이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을지도.
방향을 틀어 아부성 흐름으로 선을 잘 유지했지만, 글쎄…다.
결국 백성은 백성답게, 귀족은 귀족답게, 왕은 왕답게 행하면 결국 우리의 적은 외부의 도적들뿐이다, 라는 거지만….
‘아비가 아비답지 않으면 조처하라, 라는 정도는 굳이 풀어서 말 안 해줘도 알아먹었겠지.’
못 알아먹어도 상관은 없다만. 그쪽이 더 감사하려나.
광장에서 의례적인 박수갈채가 우레처럼 울려 퍼진다.
그럼에도 에드릭의 이성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아만 갔다.
띄워주는 거, 비행기 태우는 거에 혹하지 말라.
그때 사람은 빈틈을 보이고, 방심하고, 그렇게 떨어져… 전부 다 잃게 되는 거니.
이후 다시, 뒤편에서 관람객으로 돌아온 에드릭.
다른 부군 후보들이 이런저런 눈빛을 교류하고 몇 마디를 공유하며 친근감을 다지는 것과 달리, 에드릭은 철저하게 떨어진 상태로 이를 방관하고, 관망하는데 열중했다.
어쨌건 가장 번거로운 게 일단락 지어졌고, 이제 남은 건 정말로 기다리면 끝.
…그렇기에,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겠지만.
후보에서 떨어질 시, 널 조지겠다고 국왕은 친히 말했다. 그게 단순 협박, 위협일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그에 맞게 대처를 하면 되겠지.’
그렇다고 자신의 무력, 능력에 너무 기대서도 곤란할 거다.
…개인으로서 에드릭은 필시 위협적일 터.
그러나 이게 국가 전력 기준으로 접어들면… 이야기가 또 틀려질 테니.
그걸 쏟아부어서도,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집단의 무서움이다.
그리고 국가는, 바로 그러한 절대다수로 형성된 집단, 그 테크 트리의 최종 단계이고.
세상은 게임이며 만화처럼, 주인공이 어중이떠중이, 일개 병사, 애송이들을 무쌍 찍듯 휩쓸며 보스하고만 어렵사리 승부를 보는, 그런 구실 좋은 세계가 아니다.
“그렇다고….”
감상에 잠길 필요도 없겠지만.
최후의 연설을 듣고서, 에드릭도 시류에 편승하듯 의례적으로 갈채를 쳤다.
어쨌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홀가분함이랄까, 마치 학교 졸업할 때 느꼈던 감개무량함이 느껴졌지만, 아릿한 그리움이라거나, 아쉬움 같은 건 일절 남아 있지 않았다.
부군 후보들 모두에겐 이제 끝이라는 자각이 생겨났겠지만, 에드릭은 정 반대였다.
이제 시작이다.
여기서부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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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전날.
왕성 내에서 개최되는 연회는 사실상 고별회에 가까운 행사였다.
또한 귀족들 기준에선 마지막으로 선을 댈, 확인할 장소이기도 할 것이고.
무엇보다 눈에 띌 수밖에 없기에, 후보를 잘못 고른 이들은 나중에 부군이 된 이로 하여금 이런저런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될 처지에 놓일 테니, 재주껏 중립을 표방할 몇 안 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터.
여태껏 비공식 느낌이라면, 이 시점은 사실상 공식적으로 누굴 지지한다는 걸 밝히는 장소였기에 눈치 싸움들이 한창이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 에드릭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