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2화 〉90. 그래서 당신은......
여 엘프.
복장은 무난한 드레스였지만 프릴이 적고, 무엇보다 평상복이라 해도 위화감이 없을 푸른 드레스.
크게 모난 것 없고, 유별 난 점이 없어 보이는 외양이지만, 표정에 서린 여유와 권태, 그리고 일말의 흥밋거리를 발견한 듯한 짓궂은 눈초리가 유독 매섭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연유인지.
별실에 마련된 좌석에 눌러앉아 양팔을 늘어뜨린 자태는 무척이나 방만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
패왕녀가 대놓고 경계의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그건 단순히 무례한 태도, 불순한 몸짓에 불쾌감을 느꼈다 하여 보일 태세가 아니었다.
애초에, 에드릭과 패왕녀 그리고 그녀 외에 이곳에 남은 인원이라곤… 그녀를 제외하면 없다시피 한 것도 특이한 일.
별실이라곤 하나 별실 밖, 단순 복도조차 인적이 이리도 확 증발하듯 뜸해진 건 실로 기이한 경우가 아닐 수 없었다.
“여전히 신출귀몰하시네요.”
에드릭이 가벼운 투로 말을 걸자.
“멋대로 불러제낀 녀석이 그런 불성실한 소리를 해대냐? 볼기짝을 때려주고 싶어지네.”
어쨌든.
“그래서, 이번이 다섯 번째 중 세 번째인데, 고작 이딴 걸로 되겠어?”
“그러게요.”
“그러게요는 무슨.”
묘하게 얌전한 패왕녀 전하.
적당히 앉아 다리를 꼰 채 시건방진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저 여성 엘프가, 실상은 겉과 달리 속이 완전히 차원을 달리하는 괴물이라는 걸, 낌새로 느끼고 있는 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개가 늦었네요. 이쪽은… 평탄하게 활동하실 땐 코넬이란 이름을 대고 계시죠. 이런저런 사정이 있는 분입니다.”
그러자 패왕녀도 짐작 가는 바가 있는지, 흥미 반 의혹 반의 태도를 띄며 물어왔다.
“경이 백화점을 이끌 당시, 비서 일을 했다고는 들었다.”
“알고 계시면 편하죠.”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닌가 보군.”
“예, 그게 본론은 아니지만… 의미가 있다 보시면 됩니다.”
이건 굳이 말하자면, 패왕녀를 협박하거나 몰아붙이려는, 압박하려는 용도가 아니다.
“그래, 그녀를 소개하는 게 본 목적이 아니라하면, 이번에 하고자 하는 말, 어쩌면 제안이 될 수도 있겠군. 그 내용에 경의 목적이 있다, 그렇게 이해하면 되겠군?”
“물론입니다. 복잡할 거 없는 문제거든요.”
그리고는 에드릭은 코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가 말하는 걸 듣고 공증하고, 증인으로 계셔주면 됩니다. 지금 하는 말은, 추후 뒤집을 일 없다는 점도요.”
“그걸 확인하는 정도로 소원 하나 허비한다 치면 값싼 내용이지만… 이유가 있을 테니 수락하겠다. 아쉬운 건 네 쪽이지, 나로선 아쉬울 게 없으니까.”
“예, 뭐 그 건에 대해선 조금 뒤 언급 드리기로 하고, 일단은… 축하드린다는 말부터 드려야 할까요?”
중도에 고개를 돌려 패왕녀를 향해 이야기하자, 그녀가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무얼 말이더냐?”
“설마하니 후보 하나가 아니라 다수를 모두 수용하실 거라곤 예측 못 했는데, 이거 감당 가능하시겠어요?”
“…….”
패왕녀의 눈매가 좁아진다.
그것은 극히 찰나라, 보통 사람이면 눈을 똑바로 크게 뜨고 보았음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하지만….
“무슨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게냐?”
“국왕 폐하께 들었습니다.”
“…….”
퇴로를 차단한다.
이러면 이제 나올 대답은 극히 한정될 수밖에.
그리고 패왕녀는.
“재미있는 소리를 지껄이는군. 그게 본론은 아닐 테고, 지금 본인에게 유도심문을 거는 건가?”
“…….”
겉은 태연하게, 그러나 속으로는 짙게 탄식을 토해낸 에드릭이었다.
와아, 어떻게 한 치의 의구심도 없이 바로 꿰뚫어 보는 거지?
아, 아닌가? 그냥 찔러본 건가?
“유도심문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걱정이 되고, 한편으론 감당 가능하신지, 그 점이 궁금했기에….”
“그걸 논하는 시점에 경은 패착을 두었다. 그건 묻는 게 아니지. 접근법을 달리했어야 했다. 그런 식으로는 본인을 속여 원하는 결과를 쟁취하긴 어려울 것이다. 안이한 발상으로 이 몸을 우롱하려 든다면, 그에 알맞은 각오를 품어라. 말장난과 단순 장난질로 원하는 바를 수월히 얻으려는 안일함을 버려라. 아둔한 녀석 같으니.”
“…….”
이건 확신인가, 아니면 이조차도 뻔뻔함의 일환인가.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이 이상 에드릭 자신이 뻔뻔하게, 되려 그녀를 향해 어이없다는 반응, 이해 못하겠단 반응을 보이는 건, 여러 가지 의미로… 타산이 맞지 않는다.
그러기에 에드릭은, 살짝 헛웃음을 삼키곤 순순히 패배를 시인했다.
“예, 맞는 말씀이십니다. 죄송합니다. 시험을 해봤습니다.”
“무슨 각오로 그런 짓을 행한 거지? 사려 깊은 경이 이런 무모한 짓을 행해 손해 볼 짓을 범할 만큼 안이한 이는 아니라 여겼거늘. 이 몸이 잘못 보았단 말이더냐?”
“…….”
에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아, 저도 무리수 던진 거 맞으니 너무 책망하진 마시기를. 이래 보여도 꽤 고심하고 있는 문제거든요.”
“고심한다, 라.”
느릿느릿 말하는 투가, 실로 세련됐다.
“본인이 선택 받았는지의 여부가 경에겐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닌가 보군.”
“음?”
왜 그런 식으로 전개가 되는 거지?
“자기 확신이 부족해 술수를 부린다 치면, 본인에게 올 게 아니었다. 허나 그럼에도 왔다 치면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인데, 근거가 있어서 온 것은 아니니, 다른 용건이라 짐작되는구나. 그렇다면 그건, 아마도 경선 문제와는 다른 주제일 것인데, 틀렸나?”
“반 정도는 맞추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모호한 표현, 절반, 반쪽짜리.
어중간히 부인하기도 좋고, 그럭저럭 떠넘기고, 넘겨짚고, 흘려버리기도 좋은 명분이다.
…거기다 중요한 건, 여기에 진실과 거짓에 대한 여부는, 일정 부분만 걸쳐 놓아도, 이것 자체가 강력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점.
거기다 절반의 개념이란 건 어차피 객관적일 수가 없기도 하니.
“그래서, 뭘 말하고자 하느냐? 시간 끄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본론을 이야기하도록.”
“…….”
이윽고 에드릭이 슬쩍 코넬 쪽으로 시선을 줬다.
“지금부터 하는 말들을 공증하시면 됩니다.”
“그러지.”
수긍하듯 눈을 반개한 코넬을 확인한 에드릭이 이윽고, 패왕녀 쪽으로 시선을 두며 이리 말했다.
“저는 권력도 명예도 직위도 무엇 하나 관심이 없습니다.”
“흐음.”
“무엇보다, 왕녀님 부군 자리조차도,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처음은 그러려니 했어도, 2번째로 이야기한 내용엔 관심이 생겼나 보다.
“그 말은, 스스로 그 자리를 포기하겠다 이 말인가?”
“그건 제 소관이 아니죠. 제가 포기한다고 놓아주고, 내버려 두실 것도 아니잖습니까? 저야 그래도 상관은 없는데… 엮인 게 저도 그렇지만 왕녀님 측도 있는 만큼 이건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라 봅니다.”
“…하면?”
“원래는 결정된 다음에 하는 게 예의일 테지만, 한편으론 그것도 아닌 듯하여 앞서 말씀드리는 게 예의라 생각해서 말씀드리고자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경은, 원치 않은 자리에 와서 이러한 기회를 얻었고, 여기까지 왔으나 이는 본의가 아니다, 그러기에 결정된다 하여 거기에 호락호락 휘둘리지 않겠다, 그런 이야기인가?”
“그 정도로 복잡한 건 아닙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일전에 왕녀님, 왕녀 전하의 충실한 기사였던 멜크리우스, 아시는지요?”
“알다마다. 하면?”
거기서 표정이 일변하는 패왕녀.
“어쩌면 본의 아니게 제 문제로 그녀가 원치 않은 혼인을 이어가게 됐을 가능성이 있기에, 우선 그걸 막고자 합니다.”
“경으로 인해 원치 않은 혼인을 맺게 됐다는 근거는?”
“국왕 폐하께서 그녀를 내모신 것과, 그녀 스스로 고향 사정을 언급한 거, 두 가지가 우연치고는 절묘하지 않습니까?”
“…아바마마야 그렇다 쳐도, 하면 그녀의 사정도 경으로 인해 비롯됐을 가능성이 있다?”
“틀림없을 겁니다.”
애초에 팀장님이 국왕으로 인하 내몰린 것 자체를 본사의 입김이라 생각했는데, 일전에 만난 국왕, 철왕은 본사와 연결고리가 에드릭 자신이 예상한 것과는 다른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일종에… 엮여는 있지만 깊지는 않다?
애초에 엮여있다면 굳이 에드릭을 여기에 꽂으려 하는 이유가 없지 않나?
거기다 에드릭 자신이 유일한 해결책, 방안이라 그는 생각지 않았다.
본사는 수단을 하나만 동원할 정도로, 도박수를 즐기는 부류가 아닐 거다.
다만 최선이나, 최상이냐, 차선이냐의 문제.
“…그건 그렇고 멜크리우스를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 의리… 아니지, 그게 단순 의리는 아닐 거 같고. 개인적으로 구면인 걸 떠나, 그 이상이었나 보군?”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그녀 스스로는 그렇게 여기지 않더라도 제 기준에선 목숨을 구제해줬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호감을 넘어 그 이상의 감정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그 말인가? 그걸 여태 확신 못 했기에 잠자코 있었고? 경을 이끌고 내모는 그들의 명령? 제안을 반박하고 맞설 각오를 이제야 끝마쳤다, 그거로군?”
“…….”
뭔 설명을 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다 파악하고 난리람? 어이없기를 떠나 이쯤 되면 무서워지는데?
에드릭은 괜스레 입안이 마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한데 공증이라, 그게 왜 필요한가… 한데, 이건 짐작하기 어렵군.”
“…….”
아바타의 개념을 모른다면야, 그럴 만도 하지.
에드릭을 다루는 게 비단 태민 자신 한정이라면야, 에드릭의 모든 걸 인질 삼으면 족하지만….
‘대안을 세울 수 있다면….’
에드릭이 자신의 고유한 거란 유니크함, 즉 특권이란 게 의미가 없어지는 거 아닌가.
즉, 태민이 어쨌든 그냥 그 자신만 갈아치우고, 또 다른 누군가가 아무렇지 않게 에드릭을 계승, 이어간다 치면….
“그래, 마치 자신이 뒤바뀌거나, 변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하고, 본인과 그녀에게 이 사실을 공표, 공증하게 함으로써, 이에 위배 되거나 어떤 행각, 주장을 펼칠 때, 우리 측에서 이를 반박하거나 눈치채길 기대하고 있는 거로군?”
“…….”
미쳤다 진짜.
이걸 설명 안 해도 그냥 파악한다고? 얼마 안 되는 정보 가지고?
사람 새끼인가? 감이 단순히 좋고 나쁘고를 떠나 이건 소름 끼칠 정도인데?
“…설명하지 않아도 파악하셨다면, 저로선 편하죠.”
그러자 패왕녀 왈.
“그게 되려 본인에게 득이 된다면, 본인도 크게 개의치 않을 수도 있을 터인데, 의미가 있는가?”
“예, 있습니다.”
이윽고 에드릭은.
“코넬, 다섯 번째 중 네 번째가 그겁니다. 제가 여기서 한 말을 토대로 행동 않고, 헛짓을 하거나 제가 원래 행실이 아닌, 전혀 개연성에 맞지 않은 행각을 펼칠 시, 절 죽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