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5화 〉91. ‘사기’라는 건 개나 소나 다 칠 수 있단 말씀.
한편으론 이해가 아예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시대가 어쨌든 고대나 근현대나 잘난 놈들, 그것들의 자기주장이 강한 놈들이 뭐가 됐든 위쪽으로 올라서는 법이니.
그러나 앞뒤 분간이 없는 건지, 성향들이 그렇게 만들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잘난 놈들 특유의 근자감 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적응이 안 됐다.
특히 용의주도라 쓰고 신중함이라 변명하며, 소심하게 세상과 마주하는 그로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어쨌든 겸손이 미덕으로 취급되는 시대니까.’
카톨릭 문화권에선 겸손이 미덕이며, 이는 유교 불교 도교도 예외가 없는 법.
종교들이 입을 모아 겸손을 주장하는 건 괜한 이유가 아닐 거다.
자제하지 않으며, 날뛰고 이성을 송두리째 내던진 채 감정적으로 깽판 부리면, 그거야말론 혼란에 연속 아니겠나.
그럼에도, 남에게 피해를 주건 말건 그만큼 큰소리를 쳐야 배포를 인정받으며, 또 그래야 기회가 생기고, 실력을 보여 실적을 증명할 수 있지 않나.
총을 쏴대는 시대보다야 영웅의 존재감이 훨씬 강력하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시대이기도 한만큼….
아니, 총이며 대포, 심지어 미사일을 쏴대는 시대조차도 인간들은 영웅들을 꿈꾸곤 한다.
…왜 그러는지는 영 모르겠지만.
에드릭은 생각했다.
자신도 그러한 영웅들, 위인들을 선망하던 시기가 있었던 것도 같은데….
어쨌거나 에드릭은 나대는 걸 좋아하지 않는 형편이다.
알고서 고의로 그럴 때도 있지만, 에드릭이 그럴 땐 대부분 연기에 가깝고, 장사며 거래할 때 상대에게 주도권 안 넘기고 갑 입장에서 동등하거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일종에 허세를 부리는 것.
그리고 에드릭은 대부분 그런 경우, 속으론 집에 가고 싶다, 침대에 퐁당! 하는 상상으로 내심 긴장감을 완화하곤 했다.
…사실 지금도 그랬지만.
그러나 카일론에선 그러한 겸손, 사양 등이 무작정 미덕이라 할 순 없었다.
여긴 전쟁의 나라인 고구려 마냥, 상무 정신에 입각해 전투며 전쟁을 주력 콘텐츠로 나라를 굴리는 국가다. 당연 미칠 듯이 날뛰는 쪽이 아무래도 인기가 좋겠지.
그렇기에, 패왕녀가 부군을 여럿 둔다는 걸 대놓고 국왕이 발표한 직후에도, 신하며 귀족들이 박수를 치거나 환호를 했으면 했지, 거기에 반발하며 난리를 치지 않은 걸테고.
무엇보다 저 부군들은 자국 기준으로 전부 외인.
즉, 누군가와 아주 밀접하고, 긴밀한 관계로 엮인 이들도 아니기에, 팍팍 밀어주는 것도 수지타산에 안 맞을 거고 그럴 시엔 다른 의미로 의혹을 사서 왕이 이를 추궁하면 또 할 말이 없어지니, 명분적으로도 거리를 두는 수밖에.
생각해보니 이거, 굉장히 골치 아픈 상황 아닌가 모르겠다.
부군 후보들을 카일론 내에서 적극 지원받기 어려운 처지.
그리고 귀족들 기준에서는… 굳이 밀어주고 어쩌고 해서 얻어낼 이점이랄게 그다지….
부군이 단신으로서, 그 존재감이 과했다면야 시도는 해볼 여지가 있겠지만, 그조차도 아니니 밑져야 본전조차 못 되고 왕에게 괜한 의혹만 줄 수 있을 테니.
거기다….
‘이걸 일종에 왕의 배포이자 그릇으로 치부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테고.’
이러한 내용이 백성들에게까지 전파되면, 다른 의미로 패왕녀의 입지며 명성, 영향력이 더욱 굳건해질지도.
여자의 몸이나 그 잘난 사내놈 모두를 품으려 한다.
아마 소문도 적절히 각색돼서 퍼져나가겠지. 부군 후보들이 매달렸다거나, 이를 보며 어쩌고저쩌고해서 결국 모두 취하는 배포를 선보였다던가….
원래 이런 쪽 소문은 편집돼는 게 일반적이니.
그리고 또 설화며 입소문, 이야기꾼이며 시인들을 통해 퍼져갈 테고… 나중엔 이 이야기가 수백 수천 년 뒤엔 전설로까지 남겠지. 대단히 드물고 이색적인 이벤트니까.
여왕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부군을 여럿 두는 건 별개의 문제.
첩실 다루듯 다루는 거야 별문제는 아니겠지만 이게 공식이라면….
“선택은 그대들 몫이다. 여태 보여온 노력, 노고를 짐이 잊을 리가 없지 않더냐?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이 나라를 위해서다. 한 딸아이의 아비로서는 어떨지 모르나, 한 나라의 왕으로서는… 결국 선택하는 방식이 한정될 수밖에 없는 노릇. 그대들은 어찌들 생각하는가?”
부군 후보들뿐 아니라 신하들에게도 시선을 눈치를 주는 국왕.
봉건 시대인 만큼, 사실 부군 후보 뽑는 이벤트 덕에 일부 권신이며 봉신이 몰려 들었다지만, 사실 그들로선 왕의 앞마당에 얼쩡대는 게 마냥 편하지만은 않을 거다.
에드릭 세계의 중세 봉건 사회의 영주들은 그런 의미에서 항상 영토 밖에 안 나오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해왔던가. 왕이 불러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어지간히 강력한 명분 아니면 일부 체면을 구기는 한이 있더라도 거절하고 삼가는 게 일상에 가까웠으니까.
…괜히 불려갔다가 신변을 포박당하던가, 살해당하면 그건 누구 손해인가?
그래서 일부 판타지 소설에서 남발되고 단골로 등장하는 사교회며 연회 등이 고증에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비판 삼아 하는 이들도 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셈.
…봉건 시대라곤 해도 국가며 문화, 시대에 따라 이게 또 마냥 다른 거고, 주요 도시에 머무느냐, 외곽이나 특정 영지에 자리 잡느냐에 따라 이게 또 달라지는 거니….
“당장 정하라는 것은 아니다. 기일을 주지. 3일. 그 정도면 그대들 본국, 후원자, 지지자들과 그럭저럭 의견을 수렴하고 어떻게든 되지 않겠나?”
그리고 철왕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물어볼 사람들한테 다 묻고, 최적의 선택을 하라며 강요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은, 이러한 전개 자체가 더할 나위없는 강요 아니겠나.
결국 그들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게 바로, 갑질의 무서운 점이지.
힘이며 권한, 권리며 권력을 지닌 이가 갑질을 하면, 약자는 결국 수용할 수밖에 없어진다.
만약 힘 있는 권력자가 사람을 죽였는데, 이를 누군가가 목격했다고 치자.
그 권력자는 필시 목격자를 처리할 수도 있으나, 황당하게도 돈을 주며 방금 본 걸 눈감으라 하거나, 묻어가라는 제안을 할 수도 있을 거다.
여기까지도 결국 그 살인자의 변덕이 작용해서 그런 거지, 그는 언제든 사실 눈앞의 목격자를 처지 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도 제안을 했다. 당황했는지, 그냥 하는 헛소리인지, 일말의 양심의 가책이 덜미를 붙잡았는지는 알 도리가 없겠지만, 어쨌든… 그걸 거절하면 돌아오는 건 예외 없이 총이며 칼이며 폭력이며… 더 강력한 강압들일 거다.
그러나, 하지만 이걸 수용하면 이득이 생긴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힘 있는 자들에 의해 타락해가고, 퇴락해간다.
극단적 예지만, 아주 작은 일부터 평범한 이들까지, 그런 식으로 많이들 범죄에 동참하고, 합류하며, 묻어가곤 하는 바.
그리고 그게 쌓이고 무뎌지고 당연하게 여겨버리면, 어느날 이렇게 생각하게 될 거다.
‘저놈도 하는데 나라고 못 할 게 뭐가 있어?’
예컨대 그어진 선이, 보이지 않게 되는 거다.
틈만 나면 눈앞에 누군가가, 계속 선을 넘어대는데도 별다른 손해며 불이익을 안 당하는데, 왜 나만 이를 준수하고 지켜가며 ‘피해’며 ‘손해’를 감수한단 말인가?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더군다나 백화점이 가장 잘 나가는 시기에, 신대륙을 밟아 그곳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인간이라 칭송받아댄 시점에, 에드릭은 권력의 본질이란 걸 제대로 맛볼 수 있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신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건, 마약이며 섹스, 알콜 중독 따위로는 비교도 안 되는 쾌락이 있었다.
…그래서, 두려웠던 거다.
‘잃어버릴 거에 집착한다.’
그게 에드릭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얻는 것보다 잃는 걸 신경 쓴다.
그러기에 이러한 부류는 손해 보는 장사를 안 하기에 지키는 건 잘하지만, 과감하게 모험을 행하진 않는다.
에드릭이 모험을 한 예는 대부분 본사 지침, 명령 때문이었지, 그는 애초에 시킨다고 모험을 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하지만 모험을 하면서도 결국 명령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고, 그 개성이며 성향이 잘 맞아 떨어져 여기까지 오게 됐다.
후배며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에드릭은 본사의 그런 ‘사람’ 다루는 법에 크나큰 경계심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그걸 혜택이 아니라 경계하게 됐다는 거 자체가, 머리가 커졌다는 의미겠지.
예전엔 단순히 꿀 빠는 거라 여겼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그때, 옆에서 욕지기를 입에 담는 후보들 덕에 에드릭의 상념도 그쯤에서 그쳤다.
왕이 태연히 일방적인 통보를 끝마치곤 왕좌를 떠나자 알현실 주변은 시끌벅적하게 변해갔다.
그 와중에.
“자네는 별다른 불만이 없는 모양이군.”
“그렇게 보입니까?”
레오란이 큼지막한 체구로 성큼성큼 다가와 묻자, 에드릭은 담담하게 말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군.”
“설마요.”
“자네가 그렇게 말하면 그런 거겠지.”
믿어주는 건지 구색만 갖추는 건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레오란.
“그래도 나로선 좋은 경험이었네. 그러나 더는 인연이 아닌 듯하군.”
“가실 참입니까?”
“어제 이야기하지 않았나?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보다는, 더 넓은 세상을 보러 가는 쪽이 내게도, 이 나라에게도 좋을성 싶더군.”
“그 말씀은?”
“권력의 본질은 힘 아니겠나. 그들은 결국 나나 자네를 무릎 꿇리려 할 테고, 자네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순순히 강압에 무릎을 꿇고 그럴 심산이 못 되거든.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
“기회가 된다면 또 보았으면 싶군. 아, 이곳에 머문다면… 나중에 내가 한 번 찾아오도록 하겠네. 그때 설마 서운하게 모르는 척하진 않을 테지?”
“남아 있다면, 반가이 맞이하겠습니다. 경비들에게 막혀서 우물쭈물 말고, 그땐 당당하게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아, 제가 있다면 괜찮겠지만, 없는데 무작정 쳐들어와서 난리 치다 잡혀들어가지 마시고요.”
“하하하! 그거 참…!”
의외로 디테일한 설명이 웃겼을까. 그가 흔쾌히 웃어넘긴다.
…난 진심으로 한 말인데.
참으로 신기한 건, 에드릭이 항상 진지하게 말해도 일부 사람들은 그걸 농으로 듣는다는 거다.
…알아서들 하라지.
그나저나….
‘과연 정말로, 순순히 보내줄지도 의문인데.’
철왕은 필시, 부군 후보에 제외된 것들 싸그리 쳐낸다고 에드릭을 향해 엄포를 놓은 적이 있다.
…이것도 설마 단순 협박, 허장성세였을까?
“이야기 좀 하세나.”
그리고, 설마 이쪽을 향해 다가오나 싶었던 숲의 현자…로 짐작되는 로브를 쓴 이가 결국 에드릭 인근까지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예, 얼마든지.”
그렇지 않아도 궁금한 참이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