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0화 〉92. 누가 이랬더라. 최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3)
------
일전까진 깨알이라도 눈치를 봤다면, 현재는 그런 구색조차 사라졌다.
그러다 보니 철왕의 허물없는 태도는 여러 의미로 부담으로 직결.
다만….
“녀석이 어떤 허튼수작을 부렸는지는 알 바가 아니나, 신경은 쓰이는군. 또한 기대에 어긋난 전개엔 짐도 여러모로 골치가 아파져 오는데, 이 또한 순수하게 네 수작이렷다?”
“…의도한 바는 아니고, 이러한 방식치 최선이 아닐까 싶었던 심증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결국 녀석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거군. 무슨 생각인지….”
혀를 차며 못마땅한 표정을 내보인 철왕.
“허나 결과적으로 썩 나쁘지 않은 수작이었다.”
“…….”
“네 입지만 곤란해졌을 뿐이니, 어느 의미론 가상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로구나. 크큭!”
단신이자 유일한 부군이어야 할 자신이, 졸지에 어처구니없는 경쟁자 여럿, 그것도 당장 에드릭 자신보다 뒷배가 빵빵한 녀석들이 버젓이 자리잡게 생겼으니, 이건 이것대로 문제다.
여기서 저들이 부지불식간에 유명을 달리하거나, 의혹이 있을 법한 죽음을 맞이하면, 그 책임은 다른 의미로 카일론이 짊어져야 할 판국.
차라리 부군 제안을 박차고 꺼져줬으면 좋았을 법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레오란을 제외한 모두는 이조차도 경합, 경선에 일부로 판단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사실상 이제 공식적으로 패왕녀에게 찝쩍댈 수 있는 명분과 자격을 얻은 셈이니, 보란 듯이 왕녀를 자신의 밑에 깔아뭉갤 속셈을 지닌 이들이 있을 텐데,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며 행동에 옮긴다면 이건 이것대로 대단한 족속들이 아닐까 싶었다.
‘오히려 그런 걸 왕녀 쪽이 즐기면 또 모르겠지만.’
왕녀가 처녀라거나 순결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오히려 방만하게 부군 후보들이 이곳저곳에서 아랫도리를 놀려대는 걸 핑계 삼아, 역으로 자신도 이곳저곳에서 사치스럽게 즐겼을지 어찌 알랴.
밤일이라는 건 애초에 공개적으로, 대외적으로 치러지는 게 아니다 보니, 막판에 직접 확인하지 않은 한 알 도리가 없는 바.
…그조차도 마법이며 신성술을 바탕으로 처녀막 등을 재생시키면 또 어찌 알리.
애초에 부군 후보 여럿인 시점에 역 하렘인 건 기정사실화된 게 아닌가.
여기선 그녀가 부정을 하든 말든 간에,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비칠 수밖에 없을 거다.
정치적으로야 어떻든, 세간엔 이미… 그런 식으로 내비칠 테니.
“녀석만 흥겹겠구나.”
“…그건 그것대로 다행 아닙니까.”
“자기 여자조차 챙기지 못하는 버러지가.”
“…반대 아닙니까? 제가 그녀의 소유물쯤으로 인식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거야 네놈 하기 나름 아니겠느냐?”
닥치고 왕녀에게 고개도 들지 말고 수그려라, 하는 식으로 철저하게 몰아붙인 주제, 정작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이건 또 다른 시험인가, 아님 단순히 장인 됐답시고 슈퍼 갑질을 빙자한 괴롭힘인가.
“네 녀석이 의욕이 없는 것 정도는 진작 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장인 어른은 무척이나 위험천만한 소리를 친히 언급했다.
“팔려온 거면 팔려온 자각을 하여 본 취지에 적극 부응해야지, 엄한 걸 생각하며 이도 저도 아니라면… 네 녀석의 미래가 썩 불투명해질 것이다. 자기 입지는 스스로 다져야지. 왕가에 합류한 게 거저 이루어졌으리라 생각할 정도로 아둔한 녀석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흐음.”
“대답은?”
“명심하겠습니다.”
“다른 놈들이 선수 치기 전에 네 녀석의 핏줄이 장남이자 2세가 될 수 있도록 분발하도록. 안 그러면 네 녀석의 쓸모성이 반은 줄어들 터인데, 내 눈 감기 전에 그 꼴이 발생할 시엔… 네 녀석 어깨 위에 있는 게 무사할 거라 단정 짓지 말지어다.”
사실상 이런저런 걸 묻고 따지려다가, 되려 협박성 질책만 듣고 축객령을 받은 에드릭.
완전히 남남이면 막 나갈 법도 싶었지만, 여러 제약이 뒤따른 터라 여기선 에드릭도 퇴짜며 강짜를 부릴 수가 없었다.
“짊어진 게 있다는 건 여러모로 피곤하구나.”
거기다 본사 쪽에서도 경고가 날아왔는데, 여기서 또 문제를 일으키면 어떤 식으로 문제가 번져갈지 모르기에, 에드릭은 자숙하는 심경으로 꾸역꾸역 철왕이 하는 말을 차분히 받아들이기만 했다.
사실 이런다고 딱히 불쾌하거나 화가 나고, 억울하단 생각은 눈곱만치도 안 들었지만.
상대는 상대로서 당연하게,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만사가 굴러가길 희망한다.
그리고 왕씩이나 된 인간이라면, 그러한 욕구며 욕망이 평범한 이들과 비교를 불허할 터인데, 저 정도 압박은 뭐… 충분히 그럴 수 있겠거니 싶기도 했고.
원래 윗선, 윗자리… 어쨌든 똑똑하고 잘난 부류들은 자기 의지, 의도, 계획대로 세상이 굴러가길 원한다. 그러기에 거기서 뭔가가 어긋난다? 용납을 좀처럼 못하는 거고.
그런 맥락으로 보자면, 방금 전 질책은 되려 배려에 가깝다고 봐야 할지도.
성격상 친절하게, 상냥하게 조언이자 첨언을 해주는 성향이 아니다. 저 철왕이란 작자는.
그랬다면 자신의 후계자하고 왜 원수처럼 서로 죽일 듯이 대화를 주고받겠는가.
이게 저들의 평소 스타일인 거다.
그러니 거기에 상처 입고, 영향 받아 멘탈이 갈리면… 그건 오로지 에드릭 개인의 잘못.
…뭔가 심하게 어긋난 거 같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세상을 내 중심이 아닌, 저들의 중심으로 둬야 만사가 편해진다.
내 중심으로 두려는 걸, 저들은 용납지 않을 테니.
그게 또 권력자들의 본질이고.
주도권은 항상 나에게.
앞장서는 모든 영광됨은 내가 최우선적으로.
…지극히 이기적인 부류들이다.
그리고 그런 이기주의에 실효성 기회주의가 첨가된 실력주의가 더해지면, 그거야말로 권력 쟁탈의 최우선 우승 후보자의 재능을, 자격을 부여 받았다 해도 좋을 거고.
그 다음부턴 뭐, 인과며 운빨이며 우연, 요행 등이 중요할까.
인간이 제아무리 날뛴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하니까.
“그나저나.”
결국 패왕녀를 꼬셔서 가장 먼저 그녀를 임신시키라는 소리를 노골적으로 들은 셈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 모르겠다.
------
결혼식 전서부터 사실상 패왕녀의 부군이 된 양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에드릭처럼 적당히 선을 긋고 분위기 파악에 전념하는 이가 있다거나, 세상 물정 몰라 부군 후보 당시 때 마냥 여유를 부려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마치 연예인이 프로그램이며 무대에 올라 방송이며 각종 쇼 프로그램의 리허설을 해보듯 사전에 뭘 어떻게 진행할 거며, 어떤 식으로 치러지는지를 설명받은 부군들은 하나하나 집사장의 주도 하에 그 모든 걸 몸소 실천해보기까지 했다.
이게 또 어마어마하게 피곤한 작업이었는데….
“자세가 삐뚤어졌잖습니까.”
“걸음은 일정 간격으로.”
“어깨 흔들지 마십시오.”
“시선은 곧게 정면을. 너무 치켜세우지도 낮추지도 마십시오.”
“입술은 벌려지는 틈새가 없도록 붙이되 자연스럽게. 너무 힘주면 얼굴 표정이 무너지잖습니까.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미소를 그리시고….”
“눈에 띄는 변칙적인 행동은 삼가시길.”
“걸음이 좌우로 크게 흔들리지 않도록 절도를 갖추시길.”
이런 식으로 조금만 틈을 보여도 갈궈대는데, 예법에 익숙한 이들도 진땀을 빼는 마당에 예법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녀석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벌써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뭡니까? 불만이 있으면 제대로 자세를 취하십시오. 이것조차 못 버텨내는데… 하!”
거기다 뭐라 따지려 하면 또 귀신같이 조소를 터트리며 기를 확 죽이고, 분기를 토하게 만드는데, 여기서 폭력을 행사하는 거 자체가 몹시 치욕적일 것만 같은 분위기를 조성해버리는 터라. 손찌검하려다가도 애써 자제하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손찌검한다 쳐도, 멍하니 맞아줄 위인도 아니고.
집사장이라 해서 저 인간이 단순 인간 나부랭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어쨌든 귀족 가운데 글러 먹은 이가 아니라면 건강 및 호신 차원에서 이것저것 배워두는 건 필수고, 몸 귀한 줄 아는 이들은 그런 쪽으로 다들 편집증 비슷한 강박 관념들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호위도 없이 귀족이자 왕국의 집사장 되시는 분이 잘도 맨몸으로 보조 삼아 자리한 하인들만 대동한 채 왔다?
제아무리 이곳이 카일론 영토이자 그들의 집 앞마당보다 안전하다는 왕성 내 부지라 한들, 내부 다툼에서 주먹은 적아를 구분하지 않는 형편이고, 그런 식으로 폭력에 노출돼 어디라도 얻어맞다간 신변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체면, 자존심에 막대한 상처를 입는다는 거다.
그런 것조차 방비 못 한다?
그 자체로 위신이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건 일도 아닐 터.
더군다나 이 나라는 전사, 기사들이 각광 받으며 용병업이 주류인 나라.
그러기에 그 정도 모욕을 허용한 것 자체가 무능력함의 표상이기에, 결투를 통해 불명예를 씻어내지 않은 한, 그 오명은 나중에 이명으로까지 번져 무덤으로까지 이어질 터다.
그러기에 이들은 좀처럼 목청을 높여도 손찌검은 하지 않는다.
손찌검이 목숨을 건 혈투로 번져 카일론 내에선 그걸 금지하는 법령까지 넘어간 역사가 있다 보니….
“어설프게 넘어갈 생각 따윈 접어두시지요. 제가 두 눈 뜨고 있는 한, 그러한 일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크윽!”
결국 통과 못한 이들은 보충 수업 차원에서 남게 되고, 동작을 완벽히 소화한 이들은 앞서 퇴근… 아니 하교… 아니 이것도 아니지.
어쨌든 해방돼서 자유 시간을 얻게 됐다.
그래도 중도에 옷을 반환해야 했기에 오고 가는 시간만도 30분은 족히 까먹었지만.
‘존나 짜증나네.’
이런 허례허식으로 귀중한 시간을….
이른 아침서부터 불려 사실상 노을이 질 때쯤 돼서야 해방된 에드릭.
“…….”
지금 이 느낌, 어디선가 겪어본 거 같은데.
‘아….’
그래, 훈련소 들어가서 첫주에 이도저도 모를 때, 마구 굴려질 때의 그 느낌과 조금 비슷했다.
내 주관, 의지, 의도와는 별개로 무작정 짜여진 판에서 강압적으로 구르고 구르고 또 구르고….
“진짜 지뢰인가?”
왕녀의 부군 돼서 희희낙락할 것만 생각하는 건 역시나 너무 판타지에 심취한, 머릿속에 꽃밭이 만연해 새삼 긍정적으로 예측한 탓이려나.
확증 편향이라고, 역시 보고픈 것만 보고 아닌 건 애써 부인하고 외면하는 건, 에드릭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조금만 생각하면 이런 번거로움따윈 전부 예측 범위 안이었는데.
그래도 큰 행사 때문이니 이것만 어찌 버텨낸다면….
그렇게 방으로 들어서며 한숨을 막 내쉬려는 찰나.
“왔는가.”
“콜록!”
사레들렸다.
왕태녀 전하께서 왜 여기 계세요?
아니, 이젠 부인이라 해야 하나?
…그렇게 찾을 땐 눈 씻고 찾아봐도 안 나타나더만.
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