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3화 〉94. 급전개도 이런 급전개가 있을까.
나온 김에 휴가라는데 무려 2주.
…그 사이 에드릭의 아바타가 활동하는 세계에 뭔 일이 벌어질지, 태민으로선 예측되는 시나리오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접속해보면 알겠지만.’
적어도 휴가가 다 끝난 다음 이야기겠지.
부모님을 만나 숨 돌리기를 일주일.
그 사이 밀린 것들을 하나하나 챙기려 드니, 시간이 남아도는 듯 느껴졌던 게 졸지에 부족하게만 여겨졌다.
결국 정치 및 전쟁 관련 영화, 드라마 등을 챙겨보고, 구매한 책을 탐독하는 식으로 공부하는 쪽으로 초점을 잡았다.
그리고 2주가 지난 뒤 다시 복귀해 에드릭으로 돌아온 직후.
“…….”
처음 보는 천장이다, 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에 직면했다.
큼지막한 침대에 파묻히듯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 자세로 한참을 있었던 모양인지, 삭신이 다 쑤셨다.
‘그러니까….’
간단 점검.
몸 상태는 멀쩡.
주변은 고요했다.
“…….”
신변에 이상 없음.
깨어난 곳이 감방이라거나, 감금이 됐다거나 하는 거 없이 좋은 곳에 몸 성히 누워 있다는 거 자체로 플러스 요소랄까.
‘연금 상태는 아닐 테고.’
그건 아무래도 확인을 해봐야 될 문제일 테니… 일단 그러려니 하고.
눈을 감고 자연스레 대기서부터 주변에 파다한 수기의 흐름을 읽어 들인다.
문 앞에 보초가 서 있는 걸로 보아선 나름 방비를 잘하고 있는 모양인데….
‘감시라기보다는… 그거네.’
지키고 서 있는 쪽.
감옥에 간수들이 죄인들 감시하는 것과는 대우가 다른 전개라 봐도 무방하겠지.
예컨대 에드릭은 피해자 포지션.
그리고 피해자이기에 아마 용의 선상, 용의자 위치에선 제외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과연 어떠려나.’
몸을 천천히 일으킨다.
정령체이긴 하나 근본은 인간의 몸이기에, 아직 인간의 경지를 완벽히 초월한 상태가 아니기에 인간이 겪는 부조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었다.
적당히 스트레칭을 해주니 늦지 않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섰다.
“어머?!”
시녀 한 사람이 내부로 들어섰다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깨, 깨어나셨군요!”
어쨌든 에드릭 자신이 눈을 뜬 소식이 주변으로 퍼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만큼은 명확했다.
본래라면 은밀히 일어나 주변 상황을 살펴볼까도 싶었지만, 되려 오해를 사거나 문제가 커질 수 있기에 여기선 적당적당 흘러가는 추세에 떠넘기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에드릭이었다.
깨어난 뒤 가벼이 요기 거리로 배를 채우고 있자, 몇몇 이들이 방문했다.
얼굴 본 적 없는 이들서부터 왕실의 중요 인사들도 대거 포함돼 있었는데 물어볼 것들이 상당히 많은지 금방 깨어난 사람을 대하는 것치고는 조금 거친 방식으로 취조하듯 이것저것 따져 물었는데, 에드릭으로선 솔직담백하게 의문을 표할 수밖에.
무엇보다 그들로 하여금 이런저런 소식, 사태의 전말을 대략적으로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어이가 없네.’
에드릭이 무려 카일론 왕실 관계자이자 구 제국 후예라는 게 밝혀졌다.
…뜬금없이?
결과적으로 그를 암살하기 위한 공작 및 모략, 암약 등이 이루어져 에드릭이 함정에 빠져 위험에 처해 목숨을 잃기 직전에 이르렀는데, 거기엔 패왕녀의 부군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사실상 이 일로 부군이었을 것들 대다수가 엮이게 됐고, 덕분에 나라의 경사에 해당하는 혼약식, 결혼식은 단번에 흐지부지 돼 버렸다.
…이거 나 때문인가?
무엇보다 에드릭이 카일론 왕실 관계자라는 게 어찌어찌 들통난 시점에 패왕녀의 부군이 되기엔 상황이 사뭇 복잡해졌으나, 여기서 카일론의 국왕, 철왕께옵선 대놓고 별거 아니라는 투로 상황을 밀어 붙이기에 이르렀다.
[왕실 관계자이긴 하나 그는 먼 후예다. 고로 둘이 이어지는 것엔 전혀 거리낄 구석이 없노라!]
…그렇게 해서, 현재 정식적으로 부군으로 인정받게 된 건 에드릭이 고작.
이거 설마 계획된 건가?
애초에 철왕은 부군 후보라는 것들을 에드릭에게 살려두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가 있었는데, 이것도 그 일환?
그리고 이로 인해 정당한 명분으로 부군 후보들을 갈아버리면, 반발이며 문제가 불거지겠지만 그러기에 카일론은 다른 의미로 전쟁을 벌일 명분을 손에 쥐게 될 거다.
선빵을 치든 후속 조치를 취하든.
흔히 외교며 정치 모략을 활용함에 있어, 상대가 거절할 걸 알면서도 억지로 무리한 부탁을 밀어붙이는 예가 있다.
거절할 줄 알면서도 밀어 넣는 이유는, 이로 인해 명분과 실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
17세기 유럽, 신성 로마 제국 당시 종교 개혁 문제로 발발한 전쟁엔 로마 제국뿐 아니라 주변국에 여러 명분을 내세워 전쟁에 참전했는데, 사실상 유럽 전역이 이에 영향을 받기에 이르렀다.
페르디난트 2세의 뻘짓 덕에 결국 일단락되던 사태는 다시 악화되었고, 이걸 커버 치고자 그가 죽고 그의 자리를 이은 페르디난트 3세는, 이후 종전을 위해 1640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해 종전 협상을 위한 준비 작업에 돌입한다.
그러나 30년 전쟁이라 명명된 이것은 처음엔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영주들 간의 문제였다면, 나중엔 외국마저 개입해 유럽 내로 문제가 확장됐고, 이 시점엔 신성 로마 제국의 약화를 원했던 당시 프랑스마저 선전포고까지 날리며 이전까진 앞서 전쟁을 치르던 스웨덴을 단순 금전적으로 지원하던 걸 떠나 이때다 하고 직접 공세로까지 전환.
그리고 그런 격랑의 세월 속에 로마 제국 영토가 무참히 갈려 나가는 상황을 막고자 한 게 페르디난트 3세인데, 그러다 보니 단순히 영주들뿐 아니라 외국 또한 협상에 참가하게 됐는데, 16의 유럽 국가들이 대표단을 보낼 정도였다고 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을 적대하고, 그들의 약화를 원했던 이들은 대놓고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들을 내세워 결국 협상을 파하게 해 전쟁을 지속시켜 신성 로마 제국을 갈아댔고, 이 결과 독일의 역사의 최대 흑역사로 해석되는 사태로 굳혀지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훗날 사태가 일단락된 이후로도 황제와 교황의 권위 및 힘은 추락하는 등, 현대 유럽의 기본적일 골자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는데….
만약 당시 프랑스, 스웨덴을 비롯해 독일, 신성 로마 제국의 피해가 확대되지 않도록 종전이 빠르게 이루어졌다면, 역사는 다른 의미로 큰 변화를 맞이했을지도 몰랐을 거다.
그러나 국제 정세란 본디 약점, 약세를 보이면 물어뜯기기 마련.
가뜩이나 신성 로마 제국은 유럽 내에서도 안 좋은 인상을 굳혀가는 판이었는데, 그딴 사태가 벌어졌으니 타국들 입장에선 아주 좋구나 싶었을 거다.
‘자, 그런 맥락으로 봤을 때.’
사실 카일론과 대륙 정세로 비교하자면 이런 지식 정보는 크게 대비하거나 비교할 대상은 아닌 듯도 보이지만….
‘입장만 살짝 바꿔놓으면 되는 거지.’
구 제국 복고를 비롯해 그걸 눈 뜨고 볼 필요가 없는 카일론 입장에선, 전성기이자 황금기인 지금 시점에 그들을 휘몰아쳐 주변을 평정해 안정과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는 건, 어느 의미로 틀린 선택은 아닐 거다.
그 외에도 시기적으로 꽤 알맞은 구석이 있기도 한데….
어쨌든 취조가 끝난 에드릭은 반쯤 자의로 연금 상태로 만족하고자 충실히 방구석 폐인의 마음가짐을 숙지하며 이후 전개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를 이것저것 그려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날이 저물 때쯤.
“멀쩡해 보이는구나.”
왕녀 전하께서 당도하셨다.
“그러게 말입니다.”
“공교롭게도 잔재주는 통하지 않았던 모양이더구나.”
“…….”
자학인지, 단순히 이쪽을 향한 질책인지, 살짝 분간이 가질 않았다.
사실상 이번 일로 부군들이 모조리 갈려 나갈 위기에 처한 상태인데, 아직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다지만 이건 패왕녀 자신의 권위에도 상당한 마이너스가 생겨날 대형 사고였다.
그리고 이 오류, 실책 아닌 실책, 문제를 덮고자 한다면 열도의 전국 시대를 일단락 맺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외치며 배를 띄워 조선을 침략한 예처럼,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비겁한 행위가 가장 적절할 법도 했지만….
“고집이 있으시단 말이지. 아바마마께서는.”
“그런 듯 싶군요.”
“억지라는 걸 알아. 우리들은. 그러나 억지여도 통하게 하는 게 힘이며 권력인 셈이지. 동시에 이 문제로 내부 정리를 할 수도 있겠다, 아주 작정을 하신 모양이더구나.”
“…카일론은 봉건주의 국가관인 만큼, 영주들이 병사를 내놓지 않으면 중앙군 하나로 전쟁을 감당하기란 요원하니까요.”
상비군이며 직업 군인, 그 외에 중앙군….
예컨대 봉건 시대의 영주의 사병의 영향이 약화 되는 시기는 어쨌든 화기 및 경제가 파탄나야 가능한 문제다. 백성 및 시민이 깨어나, 계몽돼서 그렇다 뭐 다 생각하는 건 완전히 잘못된 해석이다.
지방관까지 파견해 나름 봉토에서 돌아가는 업무를 돕는 거 외에도, 반쯤 감시 감찰하는 목적도 겸하는 시스템이 정착된 게 사실 대단하다면 대단한 거지.
종교가 정착한 나라들엔 주교 및 대주교가 각 영주의 오른팔 혹은 왼팔로 자리해 나름의 종교 등빨과 백성들 지지를 밑천 삼아 권세를 떨쳐대지만, 카일론은 얄짤 없다.
“그러기에 각각의 저력들이 뛰어난 게지. 기사며 전사를 키운다는 건 천문학적인 자금, 시간, 기여를 필요로 한다. 정규군, 중앙군을 키우고자 한다면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들 것이고, 그러다간 산업이나 경제의 영향이 대폭 축소될 수 있을 테고, 그랬다간 왕실과 왕국의 번영과 위엄에도 큰 손상으로 이어질 테지. 단순히 힘만 강하다고 통치자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라의 규모가 커진다는 건, 그만큼 손 쓰기 어려운 구석이 늘어난다는 거지. 그걸 요령껏 잘 해결해야만 하는 거고.”
“그렇군요.”
말 안 해도 머리로는 에드릭도 뻔히 아는 이야기였지만, 단순 머리로만 아는 것과 실제로 반란 일으켰던 놈들 때려잡으러 다니며 위엄을 떨쳐댄 패왕녀가 하는 말은, 그 무게 자체가 달랐다.
어쨌든.
“그래서, 이후 어찌 돌아간답니까?”
“상황을 명명백백 따져 그들의 죄를 묻겠지.”
“…명명백백 말이죠.”
날조와 기만, 왜곡이 뒤따르겠지만 알 게 뭔가.
루터의 종교 개혁이 가능했던 건 인쇄기가 있었기 때문이란 설이 지배적이다.
루터 이전에도 종교의 병폐에 대해 논한 이들은 수두룩했으며 심지어 루터가 지적한 것과 유사한 문제로 당시 교황의 심기를 어지럽힌 이들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허나, 그럼에도 개혁으로까지 번지진 않았다.
당대에 문필가, 연설가, 학술가, 빼어난 사상가가 과연 없어서 그랬을까?
“선과 정의와는 전혀 동떨어진 방식이군요.”
“아바마마가 심심하면 하는 말이 있으셨지. 악을 지향해 선의 씨를 뿌려 후세에 그 뜻과 성과를 널리 퍼트려라. 당대에 악으로서 군림하는데 망설이지 말란 이야기다.”
“…….”
“전사는 피를 두려워해선 아니 되며, 현자며 선지자는 앞날과 까마득한 미래를 두려워해선 아니 되지.”
“갑갑한 숙명이로군요.”
“받아들이기 나름 아닌가?”
패왕녀를 어깨를 으쓱였다.
에드릭은 마른 침을 삼켰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지.”
“말씀하시지요.”
“전우이길 원하나, 부군이길 원하나?”
“…….”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의외로, 에드릭은 그 두루뭉술한 제안의 본질을 곧장 파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