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5화 〉94. 급전개도 이런 급전개가 있을까.(3)
워커 홀릭인 건 그렇다 쳐도 비효율적으로 일일이 혼자서 다 처리하고 관리하려 들면 과로사하기 딱 좋다.
일은 많이 하되 요령껏, 효율적인 게 중요했다.
사람을 딱히 믿고 자시고를 떠나, 입장과 이익 구조, 필요충분조건에 상응하는 관계를 형성해서 그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게 밸런스를 잡는 쪽이 아무래도 좋긴 하다만….
‘사람 새끼는 언제든지 선을 넘을 수 있지.’
그게 제일 문제다.
특히 윗사람의 실각을 비롯해 문제가 발생한 건 그들에게 위기이자 기회가 아니던가.
…그러기에 충성심이며 지속적 관계에 대한 고민이 생겨날 시, 일부러라도 이런 사태를 조성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만.
‘…괜한 손 덜었다고 생각하지.’
돌아가서 깽판 치거나 멋대로 판을 망쳐뒀다면, 그때 가서 수습하고 단죄하는 것도 문제는 안 되니.
…그저 그 짓을 직접 해야 한다는 게 번거로울 뿐.
방구석 틀어박힘의 프로인 에우리에와 타고난 인싸 기질을 지녔지만 낮잠, 늦잠이 취미이자 생활인 루넨브리스 덕에 지루함 따위는 없었다.
에우리에의 경우는 마법을 통해 이동이 자유로운 점을 활용해 외부에 잠시간 오고 가는 점엔 불편함이 없었으며, 인간 사회에 완전히 녹아든 루넨브리스는 에드릭이 요구하는 심부름 등을 무난히 해낼 수 있게 된 덕에, 에드릭 입장엔 말 그대로 휴가 아닌 휴가를 만끽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특히….
“우웅….”
매번 허무하고 혼자서 침대를 차지하던 에드릭이었지만, 지금은 독수공방할 필요가 완전히 사라졌다.
에우리에는 본래 이런 쪽으로 잘 밝히던 차라 당연 거부감은커녕 즐기지 못해 안달이 난 상황.
그러다 보니 밤만 되면, 아니 시간만 나면 우린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서로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한창 바쁜 걸 제외하고서도 사정상 그녀를 만났음에도 좀처럼 시간을 낼 수 없었던 에드릭으로선 이보다 더할 힐링이 없었다.
외모, 비주얼 차원에서도 그녀는 에드릭이 만나온 여성들 가운데서도 단연 수위급에 해당.
특히 백색에 가까운 피부에 자주색으로 반짝이는 두 눈은 해가 지고 밤이 되어 달빛에 투영되면 더더욱 몽환적인 색채로 물드는지라… 볼 때마다 감탄하고야 만다.
특히 남자라면 대부분이 가슴성애자인 만큼, 이쪽도 단언컨대 만족도로서는 최상급.
매끄러운 피부에 향긋하게 뻗어 나오는 체취에 무심한 듯하나 자신을 향해선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거부감 없이 맞아주는 그 모성애를 넘나드는 애정의 표현은, 에드릭의 여러 취향을 중첩하여 해소해주곤 했다.
거기다 일단 그녀는 피부며 몸의 반응들이 대체로 민감한 편.
무심한 여성이 자신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그 부조리함이 또 그녀의 최대 꼴림 요소, 매력 포인트가 아닐까 하고 에드릭은 생각했다.
그런데 굳이 알몸이 아니어도 그녀는 옷차림 자체가 야하고, 그러다 보니 옷을 입은 채 즐길 때의 재미와 벗겨가면서 자아내는 실감, 체감도 더욱 색다를 수밖에.
때때로 자극이 과하고 이런 관계를 자주 누리다 보면, 어느 시점에 평범하면서도 뭔지 모를 끌림에 잠시 꽂힐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알리샤 누님의 경우는 평범함과 비범함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듯 넘나드는 통에 취향의 여지 없이 매력적인 존재셨지만, 에우리에는 그런 의미에서 취향으로 치자면 확고한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었다.
신비적이고, 몽환적이면서도, 어딘가 이상적인 존재.
무언가에 초탈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환상에서나 있을 법한….
판타지 세계에 눌러앉은 만큼 그러한 환상성이 많이 죽긴 했지만, 그 이유 중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근거는, 아마 에우리에 누님 때문이 아닐까.
인간 아닌 존재며 인간과 유사한 종족들 포함해 온갖 이들과 살을 맞댄 에드릭이었지만, 동일한 인간이면서도 인외적 존재와 유사한 분위기를 풍김에도, 어딘가 엉뚱하고 천연적인 에우리에의 매력은 내외 전부가 신선하면서도, 색다르기 이를 데 없었다.
‘질리기가 어려워.’
남자든 여자든 솔직히 서로에게 질린다는 표현은 어느 의미로 꽤 흔한 흐름이기도 하다.
아닌 이들도 있으나 사람마다 이게 워낙 달라야지.
에드릭도 사람인 이상 그런 게 아예 없진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만남을 가질 때도 주기를 상당히 신경 쓰곤 해왔는데….
‘어떠려나.’
결혼을 생각할 정도의 인연들은 의외로, 그런 쪽으로 별달리 신경을 쓴 거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에우리에는 한때 알리샤 누님과 더불어 같이 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왔던 존재.
…사실 그녀하고 같이 살면 그녀가 앞가림 다 해주고 오냐오냐 해줄 거 같아서, 인생은 풍요롭더라도 못돼먹은 인간 되기는 딱 좋을 것도 같았다.
‘본사 아니었으면 어땠으려나.’
막장 아닌 막장을 살았을지도.
만약 태민 자신이 흔한 소설적 전개로 이세계로 와서 알리샤와 에우리에 곁에 머물며 내내 살아갔다면 어땠을까.
…문제는 그랬다 쳤을 때, 과연 지금과 같은 입지를 이룰 수 있었느냐 라고 하면, 그건 아니겠지.
현재의 에드릭의 잘난 요소들은 대부분 본사의 인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알리샤며 에우리에가 천사라 하지만, 태민처럼 근본없는 존재에게까지 무조건적인 느낌으로 자신에게 애정을 표출해줬을까 하면, 그건 어떠려나.
‘일단 에드릭의 외모라면… 가능성은 있겠지.’
안태민이란 인간 그 자체로 이세계로 왔다 치면, 그냥 지내기 편한 아저씨 정도 포지션 잡는데 만도 한참이 걸렸을지도.
…이렇게 생각하면 또 부정적이지만, 어느 의미로 판타지 세계의 전원생활에 치여 적응하는 데만 한참 걸렸을지도.
그러면서 이세계에 통할 법한 지식이며 지혜 등을 추려보려 노력을 해보겠지만….
‘별로 써먹지도 못했겠지.’
쓴웃음이 입가에 머문다.
사람이 잘 나서 잘 된다고 생각하는데, 잘 난 이들은 찾아보면 이외로 많다.
그러나 정작 기회를 못 잡고, 시기를 놓쳐 능력을 썩히는 이들이 오죽 많았을까.
항우 아래에 있다 유방 측으로 갔다가 거기서도 괄시받자 떠나려면 한신도 소하 덕에 빛을 봤다.
구찌라는 초 유명 브랜드도 한창 내외 우환이 겹쳐 위기에 직면.
당시 구찌 가문 내에 이러한 문제가 중첩돼 파산 위기까지 겹쳤으며 CEO가 아내의 의뢰에 암살되는 등, 분쟁이며 여타 문제가 해결 안 돼 정식적으로 CEO에 앉힐 이가 구찌 가문 내에 없게 되자, 구찌 가문 쪽에서 일전에 구찌 아메리카로 스카웃까지 한 도메니코 드 솔레에게 당시 구찌 지분을 가지고 있던 인베스트콥의 제안으로 구찌 CEO 자리의 기회가 주어진다.
그리고 거기서, 드 솔레는 가장 먼저 수석 디자이너를 톰 포드라는 사람을 택하는데, 이게 당시엔 대단히 파격적인 인사 단행에 해당했다.
당시엔 그가 누군 줄도 몰랐고, 당연 주위에선 유명 디자이너를 스카웃 해야지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네 밑에 있었다고 낙하산 태워주냐? 라는 비난도 잇따랐다.
심지어 그는 건축학과 전공에 미국인. 당시 나이도 33세로 서른 초반. 업무조차 시작은 패션업 홍보 말단직으로 커리어를 쌓은 인물이라는 게 재조명되기까지 했다.
당연히 안이든 밖이든 구찌 망했다, 노망 들었다 소리가 외부에서 자주 언급되기 시작했고, 구찌 가문에서도 톰 포드를 내쫓으려 했지만, 이걸 적극적으로 막으며 그를 비호한 게 당시 CEO인 드 솔레.
그리고 톰 포드는 1995년 봄 시즌 쇼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발휘하며, 구찌는 중년용이다, 라고 인식 박힌 그 이미지를 깨며 당대 유명 샐럽이며 패피들이 광고며 협찬하지 않아도 알아서 사 입게 만들게 함으로써, CEO인 드 솔레와 수석 디자이너인 톰 포드로 인해 구찌는 망해가던 히사에서 1년 만에 부활했다는 극찬을 받기에 이른다.
덕분에 구찌 때문에 망하겠구나, 했던 인베스트콥조차 초기 4억 달러 투자금이 2년 뒤에 무려 20억 달러로 불어났을 정도라 하니, 얼마나 가치가 뛴 건지는 말할 여지도 없을 거다.
그리고 웃긴 건, 구찌는 14년도 말 새로 취임한 CEO 마르코 비자리에 의해 앞서 언급한 것과 비슷한 인사 단행을 벌여 구찌 내에서 12년을 근무한, 그러나 세간에선 무명이었던 알레산드로 미켈레를 최고 디자인 책임자에 올려놓고, 다시금 가치 상승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기회가 오지도 않으며, 왔다 쳐도 이를 붙잡을 수단이 없다.
그러나 능력을 갖추고, 대비해두지 않으면, 올 것조차 피해간다.
“하라는 일만 하면 삼류라 했던가.”
누가 그랬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출세든 안정이든 다 자기 하기 나름이지.”
어쨌든 또 언제 상황이 급하게 돌아갈지 모른다.
그러기에 준비를 해둬야한다.
그래야… 이번처럼 급작스러운 사태가 생겨나도, 대비를 하건 대처를 하건 어쩌고 할 테니.
이번 걸 불가항력이었다 뭐다 할 수 없는 게, 결국 에드릭 자신의 선택과 결정이 이러한 사태를 불러 일으킨 거라 봐도 무방했기에, 그는 여기에 일말의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는 건 또 아니었다.”
결국, 뭘 하고자 했고, 어디에 목적을 두었고, 집중했느냐의 차이겠지.
본사의 의중은 사실 폭넓고 장대하다면, 카일론의 국왕 폐하께선 너무나도 목적성이 비좁고 뚜렷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패왕녀와 에드릭 자신은….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어쨌든 자신의 목적은 명확했다.
별탈 없이 잘 머무르는 것과….
“…이게 제일 문제네.”
사실상 팀장님에 대한 속내가 완전히 들통? 밝혀진 시점이라 더 이상 감추고 자시고 하는 것도… 애매해진 마당.
“그냥 대놓고 질러야 하려나?”
이미 폭주하는 열차에 탑승한 격이 돼버렸다.
…그럼 뭐, 모 아니면 도로 가야지.
중간에 좌초돼서 침몰하는 배가 될지언정, 하기로 한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