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6화 〉95. 예비 하렘 전원 생활 체험 중입니다.
“마력에게 따돌림받는 체질이라곤 해도 이러한 변화는 이례적인 경우야. 보편적인 흐름 상 이러한 변화는 있을 수 없거든.”
에우리에가 무심, 무표정, 무감정적인 태도로부터 탈출하게 되는 몇 안 되는 계기는 마도 관련 연구를 비롯해, 속된 말로 자기 분야에 심취할 때다.
외부에서 보면 덕질이 따로 없지만 그 분야가 전문 분야로서 각광 받으며 그걸로 먹고 사는 게 무난히 해결된다 치면, 또 그게 남들은 쉽게 손댈 수 없는 영역이라면 희소가치가 폭등하게 절로 상대적 가치가 상승한다 봐도 무방.
그런 의미에서 그녀 자신 또한 특이 체질에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수재이자 천재 취급을 받는 만큼, 또 스스로 그쪽 분야에 꽂혀 반쯤 서번트 증후군에 시달리는 이들과 유사한 형태의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탓인지, 그녀는 이쪽 분야에선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인 양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에드릭이 아르세이유 초창기 진입 당시, 체질을 파악하며 일러준 내용을 재차 읊어대고 있었는데, 그 시절 마법이며 마도의 길로 들어서는 건 헛고생이라 잠정 결론 내린 것과 달리, 에드릭은 다른 분야를 개척해 나름의 일가를 이룬 상황에 이르러 있었다.
그것도 단기간에.
…모든 건 본사의 인도 및 주도 하에.
애초에 에드릭이 엘프들에게 정령술을 배웠다 쳐도 지금처럼 가능했을지는… 의문. 아니, 불가능했겠지.
그러나 신대륙이랍시고 파라메라 대륙으로 딸려 가서 신수 알헤디나의 육수(…)가 짙게 밴 호숫물에 몸을 담그고 이후 특별한 의식까지 거치며 이렇게 된 거긴 한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런 식의 전개가 흔할 수가 없었다.
“정령 관련 능력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미지수야.”
“마도학하고 연관되거나 엮이는 일은 좀처럼 없는 건가요?”
“정령술의 주는 정령사가 아니야. 정령이지. 반면 마도의 주는 시전자에게 있어. 그 시전자도 결국 대자연과 흐름에 일부에 불과하지만, 조건만 맞으면 문제가 안 되지. 문이라는 도구가 있다 쳤을 때, 문을 여는 주체는 문을 여는 대상자의 몫이지, 문이 자기 멋대로 열리고 그러진 않잖아? 열린다 쳐도 폭풍이 몰아치고, 외부적 충격이 몰아쳤을 때 열리더라도, 그건 열린다기보다는 부서지는 거고.”
“음… 대강 이해했어요.”
문이라는 도구는 인간이 필요로 만든 것.
그 문 자체가 주체이자 주도권을 쥘 순 없다 이 말인 거 같은데.
반면 정령술은 아니다. 정령이 흔한 말로 갑.
그 갑이 자비로워 말을 들어주는 거지, 갑이 수틀리면 을인 정령사는 단숨에 민간인으로 전락한다 이 말씀.
“그래서 자유자재로 정령술을 다룰 수 있는 네 체질이 정령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거야. 정령을 소환하는 게 아닌, 너 자신이 주체가 돼서 능력을 시전하기에 즉각적으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걸 테고.”
“음, 데이시아라는 대지의 정령을 부리는 친구가 있는데요, 그 친구도 엄청 빠르고 자연스럽게 사용하던데….”
“친화력이 과하며 정령과 생각, 의지, 감정을 공유할 정도로 능숙하면 조건 반사 비슷하게 다룰 수 있다고 들었어. 일종에 손발은 아니지만 손에 쥔 요리사의 식칼과 사냥꾼의 활 같은 용도로.”
“…….”
예전에도 그렇지만, 에우리에 누님의 설명은 귀에 쏙쏙 박혀 드는 구석이 있었다.
“설명 잘하시네요. 어려운 거 하나 없이.”
“…그래?”
표정은 무심하나 부끄러워하고 있다.
…엄청 귀엽네.
의외로 눈치가 빠른지라 진심 어린 칭찬과 아닌 걸 잘 구별하기에, 방금 전 에드릭이 한 말이 극찬이란 사실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캐치한 듯 느껴졌다.
아닌가? 그 뛰어난 두뇌로 그렇게 해석한 건가?
어느 쪽이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 아니겠나.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게 된 건 정말 우연이기도 했다.
살짝 여유로워진 에드릭이 손수 요리를 시도하는 와중에 약간의 텀이 난 시점에 이야기가 오고 갔고, 그러다가 연결된 흐름?
괜히 요리사의 식칼 소리가 나온 게 아니다.
의외로 숲 주변에서 식용으로 먹기 용이한 고기 부류는 루넨브리스가 놀이 차원에서 사냥해 온 터라 요릿감을 구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조미료를 포함해 향신료 등은 확보해뒀으니 남은 건 잘 만들면 그만.
우선은 간단하게 집밖에 자그마한 공터를 만들어 불을 피울 때 혹시 모를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주변을 정리한 뒤, 언제 먹어도 호불호가 잘 안 갈리는 바비큐를 일단 시도해보고자 했다.
캠핑에 대한 로망은 파라메라 대륙에서 노숙이며 원정이랍시고 나댈 때 질리도록 경험했기에 별다른 로망은 없지만, 집앞 공터에서 이러는 건 또 느낌이 색달랐다.
특히 주변이 녹음으로 완전히 뒤덮여 어렴풋이 햇살이 스며드는 이 분위기는, 달리 말하면 어두울 땐 빛이 확 차단돼 불을 피울 때의 극적 느낌을 더욱 배가시키는 기분을 안겨줬다.
에우리에가 따로 주변에 인식 장애 마법을 추가로 설치했다고 들었기에 냄새를 마음껏 풍기다고 이쪽으로 오지는 못 할 거란다.
야생동물이며 관련 마수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처리한 거니 어련히 알아서 잘 하셨을까.
놀랍게도 이곳 숲은 카일론 왕도 부근에서 상당히 떨어진 구역인데, 어쨌든 용병을 여럿이 팀 맺고 작정하고 사냥해야 하는 마수들이 싸돌아다니는 영역이란다.
…그걸 알았을 때 루넨브리스가 나돌아다니는 게 내심 불안했지만, 그녀가 거의 곰보다 훨씬 거대한 크기의 늑대로 변신하는 모습을 접한 에드릭은, 어련히 알아서 하겠거니 싶었다.
생각해보니 루넨브리스도 예사 존재는 아니었는데, 주변에서 자꾸 뭉멍거리니까 무심코 까먹고 있었다.
…부자연스러운 인간형일 때도 카일론 최상위 기사단들과 몇 날 며칠 훈련하는 걸 즐겨댈 정도인데, 원모습으로 돌아가면 오죽 대단할까.
땅거미가 질 때쯤 자연스레 사방은 급속도로 어두워진다.
덕분에 활짝 피워둔 불 덕에 주변은 대낮처럼 밝았는데, 이쯤 되니 불을 너무 크게 피웠나 하는 노파심마저 생겨날 지경.
루넨브리스가 잡아 온 사냥감도 양이 꽤 돼서 정리하는데도 한참 걸렸다.
그나마 강이며 샘을 찾는다고 어디로 나가지 않게 된 게 어디냐만.
돼지처럼 생긴 소의 뱃솔을 갈라 내장을 훑어내고, 피비린내를 씻어냄과 동시에 일부는 훈제 목적으로 마련해둔 공간에 가죽을 벗기고 뼈를 죄다 수거한 뒤 잘 처리해 널어둔 거 외에 당장 먹을 건 물로 잘 씻어내 핏기를 뽑아내고 씻겨낸 다음, 향신료로 떡칠을 한 뒤 능력을 통해 임시 냉장고를 만들어 보관까지.
…단순히 물만 쓰는 게 아니라 눈이며 얼음도 생성 가능하기에 시도할 수 있는 방식.
일단 반나절 정도밖에 안 된 건 그냥 먹는다 쳐도, 장기간 머무는 걸 고려해 드라이에이징 느낌을 살리고자 남은 고기들로도 이것저것 시도를 해봤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능력을 다룰 수 있기에 가능한 것.
수분은 내보내되 들어오는 건 막아대는 특수한 얼음 막을 포장처럼 형성한 뒤… 압축까지 형성.
본래라면 한 달 이상은 건조 숙성을 시켜야 했지만, 그 과정을 능력을 통해 대폭 단축해보는 건 어떨까 싶어 시도해봤다.
…돼지며 소하고는 고기 재질이 달라 맛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또 모르지.
그래도 최소 한두 주는 걸릴 테니 이건 내버려 둔다 치고.
드라이에이징 고기는 요번에 휴가 때 어머니가 해준 걸 처음 먹어봤는데, 완전 반해 버렸다.
아무튼 그것들은 나중 일이라 치고.
당장은 활활 태운 장작에 기름이 자글자글 흐르는… 돼지 통구이 비주얼을 뽐내는 녀석이었는데, 에드릭은 능숙하게 식칼이자 수렵 겸용이 가능한 큼지막한 칼로 특정 부위들을 능숙하게 잘라댔다.
만지면 손이 뜨거우니 냉각시켜 만지기 용이하게 만들어 작업의 실용성을 추가했다.
“천천히 드세요. 아직 많으니까요.”
이곳에서 마수들이 범람하고 날뛰어도 이것들이 외부로 좀처럼 뛰쳐나가지 않는데는 이 녀석의 역할이 크단다.
멧돼지보단 크되 소보단 작은 체구인데 풀이며 잡초 등만 먹는 채식주의자인 주제 온순하기까지 하다.
덕분에 사실상 이곳 숲 내에서 모든 맹수들과 마수, 마물들의 주 식량원이라는데… 한편으론 이것들에게 꽤 부조리한 구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없으면….’
마수들이 뛰쳐나갈 테고, 그거 막아대느라 인근이 초토화될 건 너무나도 자명했다.
영역 다툼이며 경쟁에 밀린 것들이 일부 유출되듯 뛰쳐나오는 것만으로 주변 마을이며 경계소 부근에 소란이 일어날 정도라는데, 때문에 주기적으로 가지를 치듯 개체가 늘어날 법한 마수 마물들을 훈련 차원에서 토벌한다고 한다.
…조선이 여진족 예방 전쟁한답시고 갈아버리는 느낌?
훈련이라 쳐도 그 수가 천명 단위를 넘어서는 시점에, 사실상 전쟁 예비 훈련이라 해도 전혀 위화감은 없을 터.
그래서 카일론의 정규군이며 중앙군, 또 영주군 직할 사병들이 일반 용병으로 전업하는 이들보다 강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란다.
애초에 집채만 한 괴물들을 토벌해대는 군대와, 자기와 유사한 크기의 인간과 싸우는 것. 어느 쪽이 난이도 측면에서 말이 안 되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인 셈.
인간을 상대할 때와 마수며 마물 상대할 때는 방식이 다르다 어쩐다 하지만, 한 대라도 허용하고 실수가 죽음으로 직결되는 터무니없는 불합리 속에서 단련된 병사며 기사, 전사들은, 인간과의 전쟁이 사실상 여흥으로 여겨지기 마련.
물론 인간을 작정하고 도륙하며 도맡아 처리하는 병력 특유의 운용법, 방식의 효율과는 조금 다를 테지만, 군이라는 하나의 군체를 상대한다는 개념만 놓고 보면, 다양한 적들과 마주해온 정예군 기준에선, 그조차도 다 수용 범위, 수비 범위에 속할 거다.
“맛있다뭉멍!”
흑성 기사단원들과 훈련하며 그곳의 급식… 아니 배식에 익숙해진 루넨브리스임에도, 에드릭이 구워준 바비큐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에우리에 또한 입 다물고 꾸역꾸역, 다소곳하게 계속 흡입하듯 씹어 먹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나쁘지 않을지도.
이윽고 충분한 양을 그녀들에게 배분해준 에드릭이 그제야 자기 몫으로 할당된, 속칭 삼결살 부근을 큼지막하게 한입 베어 물자….
“흐음.”
나쁘지 않네.
비린내가 조금 남아는 있지만 향신료가 강해서 대충 잡아주고, 식감도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수준이긴 한데….
‘비린내 조금만 잡으면 딱이겠네.’
간은 조금 더 짜게 해도 좋을 거 같고.
소금을 아주 인정사정없이 팍팍 쳐야겠다.
이런 쪽 경험이 풍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파라메라 대륙에서 이런 캠핑 작업에 워낙 이골이 나서 그런지,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어쨌든 배를 채운 다음, 친히 나무를 깎아 만든 이쑤시개를 제공해 입안을 대강 청소한 에드릭은, 그녀들에게도 이를 건넨 뒤 이후 물을 소환해 약간의 민트향을 곁들어 그녀들의 입안까지 꼼꼼히 세척하기까지.
제아무리 설탕, 당이 덜해 충치가 덜 생긴다 해도, 입안을 개판 내서 좋은 건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딥 키스하다가 입 냄새가 풍기거나, 이빨이며 혀를 훑다 음식물 건더기가 느껴지면… 크흠, 이게 참 난감하단 말이지.
‘왕창 흥분하면 그것도 대강 넘어는 가지는데.’
그러다 흥이 팍 식는 수가 있다.
“냠냠냠.”
“…많이도 먹는다.”
보통 양치질 뒤엔 뭘 먹으면 안 되지만, 사람인 이상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다고 괜히 또 끌리지 않나?
고기로 배를 채운 루넨브리스가 간식이랍시고 또 뭔가를 먹는 걸 보며, 에드릭은 그러려니 싶었다.
여기서 못 말리는 딸을 둔 아비 포지션을 굳이 자초할 필요는 없을 테니.
주변을 간단히 정리한 에드릭은 집안으로 복귀해 하루를 끝마칠 준비에 돌입했다.
그리고….
사실 하루가 끝난다 쳐도 에드릭을 비롯해 할 거라고 해봤자 다들 거기서 거기.
루넨브리스가 아직 에드릭의 하렘(?)에 합류하지 않은 건, 단순히 그녀를 어찌 하는 게 왠지 몸만 큰 애를 멋대로 다루는 듯 느껴진 탓에 에드릭이 손수 자제하기 때문이긴 한데….
“알리샤가 여기 와보고 싶대.”
“저야 환영이죠.”
“다른 얘들도.”
“…….”
그 다른 애들이 누구인지, 수는 얼마나 되는지 급 궁금해집니다만?
이런 식으로 뭔가 큰일을 대수롭지 않게 건너뛰는 버릇이 있기에 에드릭은 다시금 걱정이 치밀었다.
‘아닌가? 그럴 필요 없는 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적어도 지금의 에드릭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