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5화 〉98.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에드릭이 카일론의 왕도로 복귀해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된 시점엔, 정말로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소식을 개인 정보통을 통해 대략 접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와서 접하니 이게 또 색다른 면이 있었다.
나라는 반쯤 계엄령 상태였으며 나라 밖, 외부로 파견 나가려던 이들은 대기하는 방향으로, 외부에 있던 이들에게도 복귀령, 총집합 명령 등이 떨어져 각자의 소재지로 복귀해 대기하라는 국명이 떨어졌기에, 사실상 멀쩡한 경제 체계에 대변화가 생겨난 건 어쩔 도리가 없을지도.
카일론 왕가는 어쨌든 전쟁 대비를 오래 전서부터 해왔기에 그로 인해 소모되는 군자금이며 비용 등에 대한 걸 굳이 세금 비율을 올린다던가, 약탈하듯 강제로 징수하지 않아도 이를 수용하는데는 당장엔 큰 어려움은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전쟁은 생산은 없이 오로지 미칠 듯한 소비만을 이어가는 터라 제아무리 자금이 많든 전쟁이 오래 지속될수록 재정이 파탄다는 건 기정사실.
그러기에 손자병법에선 안 하는 게 제일 좋지만 하려면 속전속결, 즉 빠르게 끝내야 함을 거듭 강조한 거다.
이건 실제로 관련 경영 및 국가 운영을 비롯한 여타 시뮬레이션 게임 등을 해보면 대략 실감이 가는 게, 돈은 많아도 많아도 부족하고, 많다고 방심해서 전쟁 시작했다간 재정 바닥 나서 단숨에 경제 상태가 메롱, 와해 되는 건 일도 아니라는 점.
그리고 재정이 마이너스여서 아 큰일 났네, 하고 게임을 주도하는 유저 입장에서 느끼는 위기감과, 현실로서 그걸 감당하는 이가 느끼는 위기감은 차원을 달리할 거다.
군이라는 건 먹여줘야 싸우던 말던 하는데 이게 없다?
그래 잘 먹여준다 쳐도 보답이 없다? 그럼 약탈이라도 허용해야 하는데 그조차도 안 돼? 이러면 군법이란 거 자체가 단숨에 와해 되고 파탄이 나는 수가 있다.
또 용병이라면?
주어진 계약금을 바탕으로 약조를 잘 지키는 이들이면 모르겠지만, 자기가 속한 군이며 국가, 집단 등이 약세를 보이면 승냥이처럼 딜을 넣어 더 안 내놓으면 계약 끊어버린다며, 강짜를 부리기도 하는데, 차라리 그냥 빠지거나 사라져 주는 쪽이 귀엽기라도 하지, 역으로 적에게 딜을 넣어 적군에 합류해 정보를 죄다 누설하며 적군과 함께 아군을 무너뜨리는데 일조하는 일조차, 이쪽 업계에선 꽤 흔하다면 흔한 전개다.
“허.”
하지만 어찌 보면 이것들 모두가 전부 남일.
에드릭은 철저하게 왕성 부지 내에 자리 잡은 채, 예정대로 은둔형 외톨이 마냥 짱 박힐 공간을 배정받은 채, 다른 의미로 감금 아닌 감금 상태를 구가하며 지내야만 하는 사태와 직면하게 됐다.
명분상으로는 안전을 위해서, 몸조리 및 요양 차원이라지만….
‘한동안은 이러고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거겠지.’
명분 자체가 에드릭 자신에게 벌어진 사태를 확대 해석, 왜곡을 바탕으로 상황을 구성한 거기에, 에드릭은 멀쩡하되 멀쩡한 척하기가 참 애매해진 상태였다.
그래도 너무 급작스럽게 벌어진 탓에, 의혹들도 여럿 맴돌고 있었는데, 무투대회에 우승까지 했던 이가 어떻게 이런 문제가 터졌는가? 어쩌면 이건 카일론 쪽의 자작극이 아니냐? 하는 의문도 외부에선 그럭저럭 타당성을 얻고 있는 현황이었다.
무엇보다 부군‘이었던’ 이들의 소재가 제일 문제가 됐는데, 이들을 처리한 건지 가둬만 둔 건지는, 에드릭조차 알지 못했다.
‘엄한 피해 입어서 목숨 날아가는 건, 억울하겠지.’
가급적 그런 쪽으로 안 흘러갔으면 했지만, 만약 그들이 튀어나와 판을 조진다 치면?
“…….”
카일론 입장에선 역시 처리하는 게 정답.
그렇다면 에드릭 자신은 어느 측이라 해야 할까?
국가라는 괴물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선 소수 혹은 일부는 아무렇지 않게 파묻고, 사라지고, 방치되는 건… 어느 시대라도 예외가 없었을 거다.
문제는 그게 당사자냐 아니냐 라는 건데.
당사자 아닌 이가 유의미한 희생이라며 거짓 눈물을 짜내며 애통함을 토로하는 가식 행위는 너무도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반면, 그조차도 아닌 주제 당연한 과정이라며 특권주의적 개소리를 나불대면….
“뭐가 됐든 막장이네.”
정보통에 의하면 초원 쪽 엘프들도 카일론 쪽에 합류의 조짐을 보이고 있으며, 심지어 몇몇 국가들도 이에 호응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들이 속속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상인들은 이런 움직임에 민감하다. 돈이 걸린 문제기에.
애초에 에드릭의 본래 세계 마냥 달러만 들고 있으면 오르락 내리락은 해도 크게 위태롭지 않은, 예컨대 기축 통화를 쥔 채 확실한 보장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시대며 세상이 아직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화폐를 찍어낸 나라가 망하기라도 한다? 단숨에 지니고 있는 동, 은, 금화며 화폐 등이 쓰레기가 되는데, 미쳤다고 나 몰라라 할 텐가.
그 외에도 그 나라에 터를 둔 대형 상단, 상인들의 소재며 신변에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게, 전쟁은 결국 돈으로 하는 거기에 돈 많은 이들은 가장 먼저 타겟이 돼서 붙들리기 마련.
여기서 상인이 그 위험으로부터 살아남으려면, 빠르게 눈치채고 몸뿐만 아니라 자본 등을 들고 튀어야지, 남겨두고 튀면 그 자체로 기반 자체가 단숨에 파탄 나는 수가 있었다.
그러기에 여타 중립국, 무역도시, 중립으로 표명된 여타 도시 등이 상인들의 파라다이스 대접을 받는 거다.
바로 아르세이유처럼.
“반대로 위기는 기회라 잘 찌르면 그 이상의 대가를 얻을 수도 있긴 하지만.”
예컨대 승전국, 승전 부대, 그쪽 지휘관들에게 얼마나 잘 투자하며 후원, 지원 여부에 따라 한 자리를 얻거나 이권을 얻을 여지도 있고, 시대가 시대인 만큼 아직 시장 경제 체계가 본격적으로 성립된 시대가 아니다 보니, 그러한 독점을 위시한 이권 쟁탈전에 압도적 우위를 점할 기회도 사실 이럴 때 생기는 거기도 했다.
광산을 채굴한다 했을 때, 국가에서 이를 진행하려면 번거로운 게 여간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민간에 맡겨 수수료를 뗀다던가 하는 게 좋은 게, 따로 지원 안 해줘도 민간 측면에서 알아서 채굴 명목으로 그 주변을 개발하는 것은 물론, 그로 인한 무수한 부수적 이익이 있기에, 넓게 보면 이게 꽤 매력적일 수는 있었다.
단점은, 그로 인해 얻는 실질적 이익 요소가 무척이나 안쓰럽게 축소된다는 건데, 국가가 거기까지 손을 뻗을 만한 여력이 없다면… 방치하는 것보다는 나으니 어쩌겠나. 그렇게라도 해야지.
“벌써부터 군침 삼켜대는 인간들도 있고.”
상인들도 일종에 줄을 어디 서느냐에 따라 인생이 펴고 말아먹기도 하는데, 이거야말로 본격 있는 자들에게만 참가가 허용되는 빌어먹을 투기라 볼 수 있었다.
또 몰려들면 그만큼 배당이 떨어지는 걸 보면, 이것도 토토 비슷한 면이 있달까.
그리고 국가는 사실, 이 부분을 얼마나 지혜롭게 잘 어필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전비 마련이 꽤 수월해지기도 하는데, 이건 에드릭의 원래 세계에서 마치 기업을 상장 시켜 지분을 판매하는 것과 약간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승리한 국가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부인할 여지가 없다는 점이지만.
“여기서 판을 깨려면, 상대측에 돈을 때려 박아 저쪽 전력을 상승시켜주는 것도 방편이지.”
할 일도 애매해서 마작 패를 만드는 일에 열중하며 에드릭은 여러모로 머리를 굴려 가고 있었다.
와서 얻어낸 정보며 접할 수 있는 것들이 여럿 있었기에, 생각이 퍽 많아졌다.
그럼에도 손을 쉬지 않을 수 있는 건, 그만큼 익숙해진 탓이려나.
상아, 대나무, 그 외에 하얀 돌을 구한 김에 재차 깎는 등.
가내수공업 개념이라 사실상 에드릭이 부지런히 깎고 만들지 않은 한, 마작이란 게 퍼지기란 요원할 수밖에 없었고, 업체를 선정해 제작법을 알려줘 생산하게 만들기 전까진, 에드릭 자신이 찍어내듯 만들어야지 어쩌겠나.
‘이것도 퍽 나쁘진 않은데.’
뭔가 조용히, 얌전히 뭔가를 만들며 시간을 보내는 이 과정.
그러면서 질릴 때쯤 되면 먹거리 좀 챙기고, 쉬고, 누리다가 다시 뚝딱뚝딱, 서걱서걱.
“…전원생활이 의외로 알맞을지도 모르겠네.”
아예 에드릭 자신이 마작 패 생산자가 돼서 소일거리 겸 시간을 보내는 방향으로 컨셉을 잡아보면 어떠려나?
“…하아.”
그게 허용될 리가 없겠지만.
거기다 이런 건 장기적으로 하면, 어지간히 취향이 맞지 않은 한 질려버리고야 만다.
그때쯤 되면, 단련이 되는 건데… 마작 패를 마치 대장장이 숙련공 단련, 수련, 공부하듯 열심히 해서 뭘 얻겠다고?
“그러게 말이다.”
혼잣말을 주절대지만 그럼에도 손을 멈추지 않는다.
동시에 머릿속도.
돈 벌 궁리, 전쟁 상황에 대한 이후 자신의 대처, 처세에 대해.
본사에게 미움받지 않고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한 방책.
그리고….
“꼬여도 너무 꼬였어.”
이쯤 되니 되려 무턱대고 신대륙 가라며 내몰던 그 파격적 명령이, 도리어 귀여운 수준이다.
“…아닌가?”
그냥 나 자신이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 건가?
지극히 개인주의적으로, 이기적으로 궁리한다면야… 어려운 건 아니다만.
“선하지도, 악하지도 못하는데, 정의롭지도, 불의하지도 못하는군.”
그리고 세간에선 이런 머저리를 일컬어 우유부단하다고 말하는 걸 테고.
“…여타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전쟁이면 와아아 하면서 적들을 마구 갈아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차라리 적들이 괴물, 마물, 악마들이라면 갈아버릴 명분도 설 테고.
아, 그래서 대체로 용사 마왕 등의 구도가 채용하기 좋은 거려나?
절대 악이 있다는 건 여러모로 편하다.
그렇기에, 우리들의 현실은 늘 거지 같다.
왜냐면, 그 빌어먹을 절대 악이란 게,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질 않기에.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아주 망할 녀석이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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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릭 자신이 무력함을 곱씹는 것과는 별개로, 그가 끼친 영향은 쉽사리 넘어갈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 힘과 생존, 눈앞의 자존심만 챙겨대는 우리 애들과 달리, 이들은 확고하게 자신들 문명을 키워나갔다 이 말이렷다?”
큼지막한 체구의 여성이 배 위에서 살펴본 광경은 생각 이상의 풍경들이었다.
“우리 애들이 미개하다 소리 들을 만도 하군.”
알그리타 대륙에 첫발을 들이기 무섭게, 상상 이상의 규모를 지닌 해상 도시와 맞닥뜨린 그녀는, 크기에 걸맞지 않게 촌티를 내듯 연신 감탄사를 남발했다.
“바헬루스 님. 없어 보이십니다.”
“어쩌라고?”
바헬루스라 불린 구릿빛 피부의 거구의 여성이 자신의 주홍빛 머리칼을 끈으로 동여매며 불만을 토해냈다.
옷도 상 하의가 펑퍼짐한 덕에 여성이라기보단 어딘가 전사의 그것을 연상하게 하는 측면이 있었다.
내심 옷 입는 게 껄끄럽기에 사실상 무릎에 딱 미치는 정도의 치마에 상의는 반 팔이 고작.
그 외에 걸리적거리는 건 일절 없는 차림새였는데, 그 덕에 그녀의 거구와 맞물려 무척 야성적인 인상 덕에 주변에서 그녀에게 쏠리는 관심은 여러 가지 의미를 띄고 있었다.
무엇보다 체구가 2미터를 넘어간 시점이라 어지간한 떡대며 장사들조차 그녀의 눈치를 살살 살피는 지경이었다.
키만 멀대같이 크면 말을 안 하는데, 몸체도 튼실해 얼굴이며 가슴 부근이 큼지막한 언덕을 형성하지 않았다면, 여자인지 남자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험악하다거나 험상궂은 느낌이 덜 드는 연유는, 그 굳건한 체격을 지녔음에도 여성적 느낌이 강한 얼굴 생김새 덕분이리라.
“아시다시피 저희는 현재 파라메라 대륙을 대표해서….”
“아 됐고. 그건 너희들 사정이지 내 사정이냐?”
그리고 그런 골반 부근 크기에 자리한 사내가 애써 강조하듯 말하나,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누가 나한테 뭐라 참견할 텐가. 내가 내 꼴리는 대로 살겠다는데.
일전에 자신의 거처이자 보금자리에서, 말도 안 되는 존재에게 한 차례 참교육을 당한 전적이 있는 그녀였지만, 그건 정말로 예외적인 사항.
그녀도 어쨌든 신수라 불리며 파라메라 대륙 내에서 네 손가락 내에 드는, 극강의 존재이자 신으로까지 모셔졌던 존재였다.
…지금 와선 그게 의미 있나 싶기도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