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6화 〉98.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2)
파라메라 대륙에도 타 대륙에서 발호한 종교의 물결이 쇄도했으며, 무엇보다 신수에 대한 강렬한 인상 등은, 여러 신진 문물과 지식, 정보 등을 토대로 그 신비로움이 일부 격하되고, 폄하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당최 자리 잡고 있는 영향이 확고하니 흔들림은 없지만… 그 안에서도 새로이 생존과 적응을 도모한 몇몇 부족, 종족들을 토대로 알그리타 쪽 인사들과의 적극 협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이들의 지식과 문명 기술을 습득한 덕에, 생각 이상으로 그들의 영향력이 더욱 거세게 변하기 시작했다.
“하아.”
그리고 그녀의 옆에 서있던 사내는 철과 마수의 가죽, 비늘 등이 포함된 특수한 경갑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알그리타 대륙엔 없는 구조의 갑주다 보니 다시금 시선이 밀려드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등에 날붙이가 녹색 빛으로 물든 2개의 도끼가 매달려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또한 무척 인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파라메라 내에서도 전사라 부르짖는 이들의 신분과 대우, 입지도 새로운 격변을 맞이했다.
신진 문물에 적응해 그쪽 도구에 익숙해짐은 물론, 그럼에도 기존의 전사들 이상의 역량을 보유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전사 계급의 정예화를 불러왔으며, 그게 안 되는 이들은 결국 그 전사 아래에 속하는 식으로, 전사장의 수가 대폭 늘기 시작했는데, 그 비중의 대다수가 노련한 전사 못지않게 적응이 빠르고 진취적인 젊은 전사들의 입지를 강화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와중에 중년층, 노년층 전사들이 전사장의 위치를 굳건하게 할 수 있다는 건, 그들의 실력과 사고의 유연성, 적응 능력이 격을 달리한다는 의미일지니.
애초에 그 험하고 난폭한 세상에서 피부에 주름이 늘고 근육이 퇴화되는 그 순간까지 전사랍시고 싸워대며 생존해왔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고인물 그 자체라는 걸 의미하는 바.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또 새로운 물결에 적응한 이들은, 실질적인 전사들의 수장 격인 자리에 올라섰으며, 그들은 예전처럼 여타 부족들과 이권, 영역 다툼을 위해 쓸데없는 드잡이질을 하지 않은 채, 단련과 개척, 그리고 현지 발전에 기여하는 등, 사실상 발전을 이룩할 여건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그 덕에 그들의 성장은 압도적인 수준.
전투 기술, 방식, 특유의 전술전략 등이 제대로 말과 몸짓이 아니라 정리돼 제도화돼서 전수되기 시작하니, 이전처럼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이들 외엔 낙오되기 십상이고, 안 죽어도 될 걸 문화이자 전통이랍시고 죄다 죽여버리듯, 절벽에 내던지던 비효율적인 교육 방식도 일부 개선됨으로써 그들의 질과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됐다.
그리고 이러한 걸 적용 않고 전통이다, 자신들의 그게 맞다며 박박 우겨댄 이들은, 공교롭게도 이들의 노예가 돼 그들의 부와 편리를 위해 종사하는 충실한 일꾼이자 고기 방패로 전락해버리고야 말았다.
여기까지가 그럭저럭 에드릭이 떠난 직후까지라면, 그가 떠난 뒤 사실상 식민지까진 아니어도 총독 비슷한 자리에서 본사의 대행자 역을 맡은 이들은, 에드릭이 남긴 여타 제안, 교섭 내용 등을 토대로 상황 유지에 힘써오고 있었다.
에드릭이 떠나기 전 이 점을 확실하게 걸고넘어져 굳혀놓았기에, 그걸 어기면 원주민들, 현지인들이 즉각적으로 들고 일어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뒀기에, 그들로서도 방도가 없었다.
특히 그들이 제아무리 잘났더라도, 알헤디나 측에 대행자 소리 듣던 에드릭과 바헬루스의 휘하, 사실상 반에 해당하는 추종 무리들과 중립까지 가세할 여건을 무시할 정도로, 그들은 그렇게 유능한 편이 못 됐다.
애초에 에드릭이 각 부족장과 그 후계자들을 잘 가르치고, 인도한 점도 있고.
“이곳저곳 돌다 가는 김에 녀석 얼굴도 좀 보고….”
“서국 회사 측과 연계된 나라들의 주인들, 그 외에도….”
“아, 그건 나한테 말하지 말고 자네가 알아서 하라니깐?”
“하지만 바헬루스 님께서 대표 아니십니까?”
“그거야 명목상이지. 너희들의 땅이고, 나라고, 세계인데 그걸 나한테 부탁하려 하는 거냐? 염치가 있어야지 이것들이….”
“크흠!”
“저것들이 우릴 무시하면 그때는 내가 나서주겠지만, 너희들의 어리석음과 무력함으로 무시 받고 괄시당하고, 속고 뒤통수 맞는 것까지 내가 어떻게 해줄 거란 기대는 일찌감치 접어두는 게 좋을 거다.”
애초에 바헬루스는 오랜 기간 한 곳에 처박혀 있을 정도로 인내심이 투철한 신수였다.
비록 세상에 나와 이것저것 보며 새로운 물결을 맞이한 여흥을 즐기고는 있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
자식이랍시고 일일이 뒤를 봐주고 어쩌고 하면, 버르장머리가 없어지며, 자립심을 잃은 벌레며 짐승할 거 없이, 그런 성체는 대체로 얼마 가지 못해 도태되거나 죽고, 잡아 먹히는 게 대부분이다.
예컨대 도와주는 게 되려 그것들의 미래를 망치는 격이 되는데, 그걸 알면서 무작정 도움을 준다? 바헬루스로선 용납이 안 될 일이었다.
“일단, 일전에 에드릭이 먼저 접선해둘 필요가 있다는 곳이 어디였더라?”
“아들놈 말로는 하이엘프, 고위 요족(妖族)과 접선해 선을 이어두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알아서 접선하든 만나든 해보고. 현지에 도움 줄 애들 있다며, 걔들하고 먼저 접선하는 게 우선 아니겠어?”
“그렇기야 한데… 저쪽에서 먼저 접근할 거란 이야기만 들었는지라….”
“그럼 올 때까지 기다리게? 언제 올 줄 알고? 그보다 그 뭐냐. 에드릭하고 친한 그 말 잘하는 아가씨 있잖아. 신이 어쨌다 저쨌다 하는 여자.”
“시스터 카멜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거 맞나? 아무튼 그 여자도 봐야 할 거 아냐?”
“그에 간해선….”
그렇게 어처구니가 없어 하는 바헬루스 앞에, 돌연 새하얀 피부를 지닌 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귀하신 분께 예고도 없이 접근한 점에 앞서 사과의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
바헬루스가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양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알그리타에 상륙한 파라메라의 사절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곳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의 문명 도시를 접하곤, 새로운 다짐을 일깨워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일부는….
‘아, 그 새끼 언제 보나.’
하며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 외에도.
“흐음! 바람에서 전쟁의 냄새가 나.”
말 위에 오른 채 한껏 분위기를 잡은 한 엘프 여성을 향해.
“미친년이 돌았나. 네년 몸에서 나는 암내 비린내겠지. 어딜 헛소리를!”
“아, 왜?!”
“그보다 좀 씻어! 씻는 게 그렇게 어려워?! 이곳 주변 강이 얼어붙은 것도 아니고 한 번 씻어두면 수일은 멀쩡한데 왜 그걸 안 해?!”
“냄새는 어차피 바람에 씻겨 나가잖아.”
“그러니까 사내며 노예들이 오줌 비린내 난다고 치를 떨지. 나처럼 비누로 잘 씻어봐라. 밤에도 알아서 그것들이 안겨 오고 물고 빨아주지.”
“…안 빨아대면 채찍을 들면 되잖아? 내 몸은 깨끗해. 내 몸에서 나는 건 전부 다 건강에 좋은 거라니까? 내가 이래 보여도 순혈 엘프였잖아.”
“…존나 야만적인 새끼. 누가 너보고 엘프라 하면 순혈이라 헛소리 말고 그냥 사생아며 하프, 잡종이라 해라. 수백 년 전에 숲에서 풀내음 꽃내음 풍겨대던 시절은 대체 어디다 가져다 던져버렸는지.”
흩어진 초원 엘프들이 날이 풀림에 앞서 상당수 유목 부족들이 재차 카일론 경계 일대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전처럼 서로 눈치 보는 일 없이, 아주 작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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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간, 에드릭은 왕실 사정이 어찌 돌아가며, 자신의 전속 시종부터 시작해 시녀들을 위시한 호위 인물들을 비롯, 여러 이들을 소개받았다.
“당장은 의미가 있나 싶은데.”
막바지로 마작 패를 다듬고 새겨진 무늬에 색을 입히는 등.
막상 해보니 머리 비우고 무언가에 몰입하기 좋아 이젠 아무 생각 없이 작업에 열중할 수 있게 됐다.
익숙함이란 이토록 무서운 법.
단순하게 생각한 거치고는 해야 할 일들이 꽤 많았지만, 몸 성한 모습을 노출할 필요성은 없었기에 그가 두문불출하는 거 자체만으로 세간에선 그의 건강이 썩 좋지 않다는 식의 오해가 거듭 늘어갈 따름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다 식은 차 내용물을 싹 다 비운 에드릭은 마지막 마작 패를 툭 하고 던져 낙하 시 들리는 특유의 딱 하고 부딪히는 소리를 음미하며, 대강 만족스러운 듯 입가를 느슨하게 했다.
“이게 이런 맛이 있네. 제조업도 나름의 보람이 있다 이건가.”
완성될 거란 확신과, 완성된 이후의 충족감, 만족감 등.
…불확실한 무언가에 신명을 다 바치는 투기며 도박에 비하면야, 이보다 성실하고 유의미한 것들이 또 있을까.
그러기에 대부분은 형체를 찾고, 대박이며 꿈이며 이상을 쫓는 이들은 세상에 없는 걸 추구하느라 오만가지 낭비며 뻘짓들을 감행하는 거고.
그리고 그 가운데 극히 일부가, 이를 실현해 세상을 바꿔나가는 거니, 어느 의미로 그러한 시도며 도전을 위해, 형체를 꾸려나가는 이들이 그들의 버팀목이자 디딤돌이 돼 희생당하거나, 보조하는… 그런 역할을 자기도 모르게 강요당하고 있는 건지도.
그러나 인류사, 문명사로 보면 결국 그 성과는 하나로 직결되니, 이 모든 건 결국 모두의 성과지, 특정 누군가의 성과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거 참.”
또 괜한 상념에 사로잡혀 엄한 생각만 하고 자빠졌네.
“해는 저물고 있고, 세상은 끝을 고하고….”
하루의 종식은 결국 세계의 또 다른 멸망이자, 내일의 시작을 예고하는….
“음, 역시 시적 재능은 없군.”
이곳 세계도 그렇지만 노래며 시는 어디든 각광 받기 마련.
시대를 막론하고 현대식 즐길 거리는 곧 고대 중세에도 유사한 즐길 거리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없으니까, 여건이 안 되니까 즐기지 못한다 뿐.
에드릭이 만약 음악적 재능이 탁월함은 물론, 그쪽 재주마저 뛰어났다면 지금처럼 마작 패를 깎아대는 게 아니라 악보를 작성하거나 악상을 떠올리며 악기를 연습하고 있거나, 각종 악기 등을 개발하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림이라면 또….”
그림도 어마어마한 역사의 깊이가 있지. 시대상 유행도 그렇고.
그렇다고 이 시대에 웹툰 같은 게 안 통하느냐 하면 그건 아닐 거다.
…아마 없어서 못 팔지 않을까?
“후우!”
시도하고 싶은 건 많지만, 그러기에 자제심을 키워야 한다.
거기다 못하는 걸 하려고 할 때는 더더욱.
현대에서도 문득 이걸 하고 싶단 생각이 든다 쳐도 현실은 잔혹해서, 어중간히 해본들 의미 없으며 이미 아마추어며 프로조차 그쪽 업계에 십수 년은 족히 활동한 이들이 태반인데, 그 격차는 어찌 메꾸려고?
그러기에 결국 선택과 집중을 강요받게 된다.
인구수가 많다는 건 그만큼 재주가 뛰어난 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거고, 그러기에 어중간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레드 오션이 늘 우릴 맞아주는, 그런 치열한 환경 밖에는 발 딛을 곳이 없어지다 보니, 모두가 체념하고 절망하고… 하여간 온갖 부조리가 발생하는 건데… 이건 고대 중세에도 큰 차이가 없었다.
정도의 차이? 그렇게 해석할 여지도 있겠지.
“…이름 높은 인물들은 대체로 감금이나 틀어박힌 시점에 자기 사상을 정리하고, 책을 쓰고 그랬는데… 나도 한 번 그래 봐?”
그건 다른 의미로 이 생활이 감금 생활이라는 걸 스스로 인지하고 있단 말씀?
“그게 아니잖아.”
감금이 아니라 반쯤은 자진한 흐름이다.
철저하게 정치에 참여하고 어쩌고 하는 게 완전 불가능한 현실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이렇게 조용히 입 다물고 얌전 떠는 건, 온전히 에드릭 자신의 선택.
단지….
“무기력함은 사람을 좀 먹는다. 그렇다고 과중한 책임, 선망이 항상 올바른 건 아니지.”
어깨에 힘 들어가고, 그걸 누리는 선은 누구나 좋아할 테지만, 그걸 책임지고 지탱하고 감당하는 역은 전혀 별개다.
그래서 잘 나가던 왕의 후계가 개판 쳐서 나라를 말아먹거나, 2, 3인자의 농간에 휘둘려 허수아비가 되는 예가 허다한 거고.
“당장은 그러려니 해야지.”
어쩌겠나. 그게 현실인데.
누구들처럼 깽판 치고, 내 의견을 억지로 강요해대는 걸 정당화할 정도로, 나이를 헛먹은 건 아니니.
모두가 각자의 정의가 있다.
또한 각자의 지옥이 있고.
거기서 옳고 그름의 비중은 어느 기준으로 판단해야 옳은가 하면, 그건 하늘의 도리에 따르는 걸 테지만… 그걸 중립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할 놈들이 몇이나 될까.
힘이 있는 놈들은 결국 정당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한다.
되면 정당해지는 것이고, 아님 마는 거지.
“현실적인 흐름으로 가야 하는 건가.”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면 그에 맞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