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8화 〉99. 원래 전쟁이란 건 혼자 하는 게 아니다.
“긴장하고 실수 없도록 주의해라.”
늑대를 닮은 수인과 사자를 연상하게 하는 갈기가 무성한 수인족이 차분하게 선도하고 있는 병사를 따르는 와중이었다.
연배가 있어 보이는 사자 수인이 침착하게 주위를 살피며 젊은 늑대 수인을 향해 혹시 모를 불미스러운 사태를 대비해 그런 주의를 당부한 것.
병사들을 따라 향한 천막은 외부를 훤히 볼 수 있게끔 사방이 개방된 형태였다.
천장 부근만 가려지게끔 한 상태이기에, 고지대에 자리한 천막은 실시간으로 인근을 살피고 관찰하기엔 용이한 구조였는데, 이건 다른 의미로 병졸들조차 그녀를 관찰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권위적인 이들은 스스로의 권위 유지를 위해 격리를 바탕으로 신비주의를 돋구려 노력하곤 하는데, 흔히 고귀한 자들이라 일컫는 이들이 자주 써먹는 수법들이다.
구 제국 당시엔 황족의 얼굴을 본다는 것조차 감지덕지인 수준이며, 결코 그들 앞에서 고개를 들어선 안 되는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과 권위를 휘두르며 까마득한 곳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다져대곤 했다.
이러한 결과는 고귀한, 정말로 고귀하며 월등한 지도자에게 있어선 메리트로 작용할 테지만, 다른 의미로 그를 고독하게 하곤 하는데, 그러한 고독을 감수하든 즐길 수 있어야 그 효과가 더욱 극대화되곤 했다.
예컨대 대하기 쉽다는 인상, 가볍고 편하다는 인상이 생겨버리면… 누가 됐든 은연중 만만하게 보며 기어오르려는 습성들이 있다 보니, 이 줄타기를 아예 못할 거 같으면 차라리 시작부터 짓눌러 버리는 게 관계 주도권에서도 상당한 의미가 있는 바.
그런 의미에서 카일론의 젊은 왕녀는 그런 면에선 제법 자유로워 보였다.
이곳이 전장 한복판이었다면 이러한 건 적들에게 습격 및 기습을 바탕으로 사전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 불과할 테지만, 그렇다 하더하도 이건 상당한 자신감의 발로 아니겠나.
또한 왕녀로서의 위치는 공고히 하되, 그렇다고 너무 권위적이거나 아랫것들과 자신을 격리하지 않음으로써 그들과의 유대를 다지고 있다 봐도 무방했다.
애초에 전장에 앞장 서기만 하면 뭐가 됐든 리더는 각광 받을 수밖에 없어진다.
목숨을 걸고, 위험을 무릅쓰는 리더 앞에, 현대식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아닌 고대 중세 개념의 사고 방식으로 저러한 본은, 그들이 꿈꿔온 이상적인 군주, 주군 그 자체일 테니.
적어도 전투에 참가하는 병사이자 전사, 기사.
그들 모두 카일론의 백성들이란 공통 분모가 있기에, 이에 대해선 이의가 없을 거다.
충성이란 게 심히 생소한 현대인 기준들조차 따르고 싶다, 동행하고 싶다, 함께하고 싶다는 인간이 아예 없진 않을 거다. 없다면 그런 이를 만나거나 겪어본 예가 없다 뿐.
애초에 고대 중세에도 신명을 바쳐 충성하고자 하는 인물이란 건 좀처럼 만나보기 어려운 바.
타고나길 잘났다고 해서 의무적으로 고개를 꺾으며 목숨을 바친다? 택도 없지.
군용 천막이라기보단 이건 어느 의미로 전시용 막사에 해당했다.
큼지막하며 안으로 들어서자 사방이 훤히 뚫려 있음에도 어딘가 아늑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날이 슬슬 풀리고 무더위가 찾아오기 직전인 만큼, 어느 의미로 병력을 운용하기 가장 적절한 기후 조건이다 보니, 그늘만 가린다면 지내는 거 자체는 크게 어려움이 없는 바.
그럼에도 눈앞의 왕녀, 공주란 작자는 쇠로 된 갑옷을 벗는 일 없이 투구 마저 눌러쓴 채 자기 자리에 눌러앉아 묘한 위압감을 풍겨대고 있었다.
그들이 천막 내부로 들어와 자세를 낮추기까지, 그녀는 의자의 팔걸이, 받침대에 팔꿈치를 내려놓은 채 건틀릿이 끼워진 손등으로 투구째로 얼굴을 바치고 있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시커먼 갑주와 그 주변에도 비슷한 무리가 여럿 있다 보니, 필시 대낮에 휑한 공간에 들어섰음에도, 주변 온도가 몇 도는 낮아진 듯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겨대고 있었다.
“세간에 명성이 드높은 카일론의 왕태녀 전하를 봬옵니다.”
“딱딱한 표현은 됐네. 왕성 밖에선 가급적 그런 구질구질한 건 넘어가도록 하지.”
사자 수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성향을 파악해 줄인다고 줄인 거였는데도 이러기인가?
손을 느지막하게 휘저으며 편하게 이야기하라는 양 고개짓까지 추가해 만류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인 패왕녀였지만, 정작 그러한 배려를 받은 둘은 더욱 긴장을 끈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들 눈에 패왕녀가 앉은 좌석에서 조금 떨어진 부근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자신의 활을 손보는 한 엘프를 목격한 그들의 눈이 다른 의미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카일론이 작정하고 군사력을 동원해 주변을 압박한 것까진 좋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들이 침략 행위를 했냐 하면, 그건 ‘아직’ 아니었다.
명분 싸움에서 사실 앞뒤가 안 맞긴 했지만 선전한 건 의외로 카일론.
억지라 하여도 맞아 떨어지게 만드는 것도 실력.
그런 의미에서 카일론은 철저하게 분노하고 격노한 듯한 분위기를 국가적 흐름으로 조성해버렸다.
가장 축복스러운 날에 가장 불미스러운 침탈로 극렬한 사태에 놓인 것에 대해, 왕실서부터 귀족들 전부가 철저하게 이에 대한 분기를 토해냈는데, 이쯤 되면 백성들에게 영향이 가지 않는 게 이상할 터.
특히 에드릭은 그런 의미에서 패왕녀의 가장 알맞은 부군으로 각광 받던 추세였다.
에드릭 자신이 알든 모르든 그는 여러모로 인상적으로 카일론에 자신의 위명을 떨쳤는데, 애초에 자신의 소원을 빌라는 무투 대회 우승자로서의 소원이라며 바란 게 왕도 백성들의 배를 불려준 것서부터, 매우 특이하다면 특이할 수밖에.
그러나 그 특이함은 어쨌든 즉각적인 호의로 돌변할 수밖에 없었다.
강하기도 엄청 강한데 심지어 자신들을 위해주네?
애초에 윗선이 그런 식으로 아량을 베푸는 정도야 뭐 있을 순 있지만, 그 규모 자체가 차원을 달리한 바.
단순히 술 한 잔 건네는 것조차 국민 단위로 접어들면 그 수가 만만치 않고, 그 비용은 실로 천문학적일 수밖에.
개인에게 있어선 고작 한잔이지만 절대다수를 계산해보면 혀를 내두를 수준을 가벼이 압도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일단 그걸 해냈다.
그리고 이러한 호의는 당연 관심으로 이어졌으며, 카일론 입성 이전의 그에 관한 명성을 떨치고, 부풀리는데 큰 도움이 됐다.
돈도 많이 버는 상인 정도는 사실 카일론에선 그렇게 존경 받을 만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러나 전사인데 돈도 많이 버는 건 이야기가 틀리다.
하물며 인성이며 품격마저 있다면?
무엇보다 본인이 강하다면? 그리고 무수한 전사들을 이끌고 전투며 전쟁마저 이끌어 수차례 영광을 떨쳤다는 전적까지 포함됐다 치면?
당연히 그런 이가 우리들을 이끄는 존재가 됐으면 하는 게 자연스러운 바람일 거다.
영웅이 자신들을 지키고 이끄느냐, 일개 머저리가 지도자랍시고 나대느냐?
이런 쪽도 어쩔 수 없이 검증받은 유능한 경력자를 우대하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니.
…그리고 그게 정해지려는 시점에 초를 치다 못해 비수를 찔러 넣었으니, 내용을 그럴싸하게만 전달해 퍼트리면 분노를 안 하는 게 이상할 터.
어쨌든 왕실이란 건 그 나라의 대표이자 전부며, 사실상 그들의 자부심이자 자긍심인 존재들인데, 그런 이를 시작서부터 암살하려 든다?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
그러기에 카일론이 열 뻗쳐서 해명하라, 규명하자, 어쩌자하며 쇼를 하며 막무가내로 갱판을 쳐대도, 상대국들로선 할 말이 없는 거다.
애초에 상대국 기준에선 자신들이 타겟인 것조차 헷갈리는 판이고.
의외로 냉정하게 제대로 조사단을 꾸리자, 관계된 국가며 관계자와 연류된 쪽들 모두 포함해서 냉정하게 시시비비를 가려내자, 하는 식의 정당한 대처도 잇따르긴 했지만, 카일론은 이에 대해 무례라며 다분 정치적 대응으로 그들의 이성적 대응을 경우에 없는 짓으로 매도하고 격하해 그러한 진행 자체를 지연시키며 명분을 흐트러 놓는 작업에까지 열중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공을 들인 건 적진에 심어둔 이들로 하여금 정치적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것.
그리고 위기엔 항상 책임론이 불거져 서로 이것저것 떠넘기기 바쁜데, 그렇게 상황이 어지러워지는 것만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내정 및 대처, 관리 능력을 시험 받게 될 터였다.
그리고 방심하거나 헛짓하거나 빈틈이 보이면? 과연 그걸 그대로 내버려둘 텐가?
수인들의 방문도 그런 의미에서 전부 하나의 과정으로 연결된다.
“이곳 일대는 구 제국 시절 이전엔 그대들의 고향이자 영토였다. 그러나 제국 시절 이곳에서 쫓겨난 그대들은 대륙 각지를 떠돌고, 정착하지 못해 결국 흩어지고 싸우고, 이용당하고 핍박당해왔지. 본인이 들은 이야기가 이러한데, 틀림이 없는 것이더냐?”
“…맞습니다.”
사자 수인은 이를 악다물었지만, 애써 침착함을 되새겼다.
인간보다 훨씬 감정 반응이 격하며, 인내심이 부족하다 평가받기에 야만 종족으로 분류된 그들은 한때 제국에 의해 재미 삼아 살육을 당하거나 사냥당하고, 일부는 변태적 취향에 휘말려 세상을 저주하기까지 해왔다.
그리고 자신의 무력함에 절망한 세대들의 후예가 바로 그들.
그러나 젊음은 때때로 그러한 위기를 또 다른 의미로 내딛고 극복할 시련으로 삼는 이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기에, 또 절망한 세대 내에서도 일부는 영웅적 고군분투를 바탕으로 그들의 종족 정신을 일깨워 저항과 분투를 이어가는 횃불이 되어 그 자긍심을 이어가니.
적어도 그러한 성과며 결과물들이 있었기에, 이번처럼 패왕녀가 자신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단 점을 그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예컨대 앞서 죽어간 선조들의 피와 땀이, 지금의 이 기회를 이끌어 내준 것.
…애초부터 노예 근성에 젖어 있는 족속들이었다면, 저 패도적인 왕녀, 공주가 자신들에게 기회를 줬을지도 의문이다.
…준다는 척하며 화살 받이, 칼받이로나 안 쓰면 다행이지.
지금도 사실, 안 그렇다고 여길 순 없는 노릇.
그러기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감각이 발달한 수인들인 인간처럼 심리적으로 상대의 심중, 의중을 읽을 순 없지만 그들은 신체 감각에 매우 민감했다.
즉 거짓을 토하거나 헛소리를 한다 치면, 당연 그에 관한 신체 반응이 튀어나오기 마련.
적어도 그런 얕은 실책을 상대가 저지를 리 없겠지만, 인간은 이외로 권위를 떼놓고 보면 자신들보다 잘난 구석이 무엇하나 없는 족속들이다. 그러니 그들의 하는 말에 속거나 휘둘리는 거 없이, 그들의 반응을 바탕으로 진실을 추려냄이 마땅할 터.
“요는 간단하다. 그대들은 염원해왔던 그대들만의 나라를 재건하는 것이고, 우리는 이를 지원해줄 것. 그러면서 우린 동맹이자 혈맹으로서 맺어져 서로 굳건한 관계를 이어갈 것. 어찌 보면 우리 카일론이 일방적으로 퍼주는 것으로 밖에 안 보일 테지만, 그럴 리 없단 것 정도는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어본 그대들이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을 터. 의미없는 호의와 배려, 지원이 없음을 그대들은 누구보다 잘 알 것이야. 그렇지 않은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하면 왜 우리 카일론은 그대들을 지원하는가? 짐작이 가는가?”
“…….”
사자 수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 침묵하다 이리 답했다.
“저희가 시작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계속 해보거라.”
“카일론은 예로부터 다수의 종족들을 수용해왔습니다. 이전 세대서부터. 또한 구 제국에 맞선 강대 왕국 중 한 곳이었으며, 이는 제국이 멸망한 지금에 와선 사실상 대륙을 대표하는 가장 강력한 나라 중 한 곳으로 확고부동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선,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간단하게. 미사여구는 좋아하지 않아.”
…띄워주길 좋아하는 인간답지 않구나.
혹시 해서 또 시도해 봤음에도, 그녀는 철통처럼 그의 잔재주를 걷어냈다.
자만과 오만, 자신들이 신에게 선택받았다며 우쭐하는 여타 인간과 달리, 그녀는 우월감을 만끽하는 것보단 공적인 일이 늘어지는 걸 번거로워하는 실용적인 인물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구 제국의 문화와 사상, 정신들은 여전히 그 영향권에 있는 나라들로 하여금 그들의 종교, 전통, 철학 등을 통해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배척하고 괄시해온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아닌 곳들도 늘고 있으나, 구 제국 영향권의 분열된 국가들 내에서 이러한 움직임은 보기 힘들지요.”
이에 패왕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뒷말을 이어가라는 양 추임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