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9화 〉99. 원래 전쟁이란 건 혼자 하는 게 아니다.(2)
“하여?”
“…이는 곧, 이를 적대해 그들의 공적으로서 스스로를 공표하실 왕녀 전하의 결단에 발맞추어, 저희를 비롯한 관련 있는 무수한 이들의 관심과 호응이 뒤를 이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그 첫 단추로는 아마도….”
사자 수인의 시선이 한쪽에 앉은 엘프를 향해 돌아갔다.
“저들 종족으로부터 시작될 테지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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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냄새 죽여주네. 공기가 좋아!”
똑같은 엘프여도 다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인간들 사이에서도 인종을 따지며 차별하는데 그들이라고 다를 쏘냐.
뿌리가 같다 한들 시대가 지나고 삶이며 문화가 바뀌고 변질되고 이러면, 같은 종족의 공통 분모가 있을 뿐 사실상 전혀 다른 인종, 종족이라 하여도 유별날 일은 없을 거다.
혹여 동일한 개체, 종족이라 하여 화합할 필요 유무를 논한다 친다면… 글쎄?
천 면적이 작은 건 엘프들 특유의 차림새지만, 초원 엘프들은 대체로 털가죽이 기본에다 정령의 가호가 여타 엘프들보다 편향되고 미약한 형편이라 신체 온도에도 썩 민감한 형편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대놓고 겨울이며 황야 지대에 지낼 때 걸칠 법한 수북한 털옷을 걸친 상황.
활도 엘프들이 쓰는 나무로 된, 흔히 요정목이라 부르는 나무로 만든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무려 각궁.
사용하기가 더 번거롭지만 여타 활보다 크기가 작음에도 사거리며 파괴력은 더욱 강력한 부류인데, 단점은 습한 기후에 약하다는 게 문제.
그것도 어찌 마법적 처리를 하면 문제가 없지만, 결과적으로 쓰다 보면 활이라는 건 화살 못지않게 내구성에 한계가 있는 소모품이란 걸 인식하고야 만다.
그러기에 부러지지 않은 한 평생 하나의 활을 쓰는 여타 일반적인 숲을 고향이자 터로 삼은 엘프들과 달리, 이들은 거의 10년, 길어도 거기서 몇 년 더 흐르는 정도로 활을 바꾸는 형편이었다.
즉, 전통이냐 실리를 포함한 합리성이냐.
이 때문에 필시 뿌리는 같은 엘프라곤 하나, 둘의 시간을 대하는 자세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보다 순혈이라는 족속들은 다 눈이 풀려서 뭔가 밥맛이지 않아?”
“하아, 입 좀 닥치시지?”
에기아헤는 여러모로 얌전한 성향 탓에 이런 사절단의 머리 역을 맡는 게 좋다는 식으로 낙인이 찍혔던 모양이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이번도 사절의 머리, 대표가 됐는데, 따르는 놈들이라 해봤자 다 거기서 거기.
이전처럼 인간 문화에 녹아든 다브헤나가 같이 따르는 것도 아니다 보니, 더욱 번거롭게만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이라 치면….
“고향으로 돌아온 셈이니 기뻐할 수도 있지. 안 그러냐?”
초원 엘프치고는 연배가 상당한 측에 속하는 그는 나름 부족장이라 불릴 만한 급에 놓인 존재였다.
대족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초원 지대로 내쫓기고, 그 일대를 제패하고 무리를 꾸려 사실상 주변국들을 공포로 몰아넣을 정도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일조해온 살아있는 영웅.
호전적인 초원 엘프들 사이에선 다 늙었다, 갈 날 머지않았다며 덕담 아닌 덕담을 듣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현역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신체 능력을 지닌, 순혈 엘프들 기준으로 치면 원로에 해당하는 존재였다.
“루블레나 님, 하지만….”
“괜찮다. 우리가 누구 눈치 볼 일도 아니고. 정 못 마땅해하면 다 뒤집어엎으면 그만이지. 우린 형제자매를 보러 온 게 아니야. 같은 동족이나 쓸모 있나 없나, 그것들의 역량을 재고 약해 빠졌음 짓밟고, 자기 분수를 모르고 나대면 더욱 처참히 밟아주고… 그래도 그럭저럭 명맥을 유지하며 자기들 영역 잘 지켜나가며 앞가림을 한다 치면, 서로에게 합당한 이득을 위해 이것저것 논의하고, 뭐 그런 거 아니겠나? 겸사겸사 고향도 딛고. 추방당한 게 한참 전인데 공식적으로 올 수 있단 게 또 어디더냐?”
“…….”
“아무튼 사절단을 꾸리는 건 네 몫이고, 나는 너희들 번거롭지 않게 여기에 높으신 분들 상대하고, 각자 역할에만 충실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먼저 시비만 걸지 말고. 그것만 지키면 면전에다 가래침을 뱉어도 뭐라 안 할 테니 알아서들 해.”
“봐봐, 들었지?”
의기양양 해하는 동료 자매를 보며 에기아헤는 짜증이 솟구치려는 걸 애써 자제했다.
그런 식으로 은연중 기척을 드러내 눈치를 주는 엘프들을 깡그리 무시한 채, 큼지막한 말을 탄 채로 대놓고 숲 안쪽으로 향한 그녀들.
뿌지직!
말이 거하게 똥을 싸지르자 잘했다며 말의 옆구리를 발로 툭툭 건드리며 머리를 쓰다듬는 동료 자매를 본 에기아헤는, 은근히 느껴지는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나만 중심을 잡으면 된다. 나머지가 지랄 발광을 해도….’
그런데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이란 말인가? 조상신이시여….
어쨌든 회담장은 나름 하이 엘프들이 자리한 공간이었는데, 약간 느지막하게 도착한 그녀들과 달리 미리 도착해 자신들의 성세를 뽐내는 이들은, 아예 대놓고 큼지막한 마차에다 말만 여덟 기가 매달린 걸 한껏 과시하며 마차 인근에 대놓고 테이블을 펼쳐놓고 다과를 즐기는가 하면, 누구들은 채식주의를 비웃듯 훈제된 고기와 빵을 덥석 깨물며 게걸스럽게 배를 채워대고 있었다.
“어허!”
에기아헤는 뭔가 반갑다는 듯 반색하는 루블레나를 보며 조금 긴장했다.
웃는 얼굴로 상대 면전에다 화살을 박아대는 게 그들의 풍습이기도 했기에.
아니, 정확하겐 그냥 눈에 띄면 쏘고 본달까.
실제로도 그랬다.
쏜살같이 화살을 툭 날려 막 집어 먹으려던 고기가 한 여엘프의 손을 떠나자, 그녀 입에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아아악! 내 고기이이!”
가까이서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엘프인게 맞나 싶을 정도로 살이 뒤룩뒤룩 찐 엘프가 터질 듯한 노란 드레스가 무색하게 팔을 휘저으며 분노를 표출했다.
“누구야! 어떤 새…끼! 야! 너?!”
“노예로 팔려나갔더니 죽지 않고 잘도 살아있구나? 그 꼬락서니를 보니 주인을 잘 만났나 보구나?”
“야만적인 게 어따 대고 친한 척이야?!”
그런데 말하는 투와 달리 둘은 꽤 반가운 듯한 표정들이다.
실제로 말에서 내린 루블레나가 그녀에게 다가가 인간식대로 악수를 건네자 상대도 흔쾌이 이를 받아주었다.
“뭐야 저 돼… 곰?”
“돼지라 마저 하지?”
“그럴까?”
“하아….”
쑥덕대는 건 에기아헤 일행만 그런 게 아니었다.
거기다 루블레나는 대놓고 다과를 즐기는 엘프 쪽으로 다가가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치며 말했다.
“너는 또 괴상한 걸 배웠구나.”
“인간의 고풍스러운 문화 양식을 즐길 줄 모르는 네가 할 말은 아닐 테지.”
어째 인간 귀족 나부랭이 가운데 천덕꾸러기 같은 놈들 마냥, 상대는 찻잔을 든 채 턱까지 일정 각도로 유지해가며 동요하는 일 없이 기계적으로 컵을 입가로 기울여대고 있었다.
“저분들이 그건가? 인간이 제국 끌어가던 당시 그거 뭐냐, 잡혀갔다던 분들?”
“…아마도.”
제국이 몰락한 이후로도 각자의 혈통, 가문들은 그 성세를 이어갔는데, 엘프를 노예로 삼은 이들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아예 그 엘프가 가주 혹은 가주의 어미가 돼 가문 자체를 집어 삼킨 예가 결코 적지 않았다.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비슷한 공감대가 있는 각 노예 출신 엘프들 간의 화합으로 이루어졌고, 이 문제는 벌써 한참 동안 이로 인한 여파며 사태가 이어져 온 터라, 지금에 와서 그녀들에게 근본이 없다 어쩐다 하는 것도 사실상 의미가 없는 바.
그들은 철저하게 서로 간의 유대를 다졌고, 이는 엘프가 여전히 노예가 돼서 대대손손 물려받는 육노예 취급을 받는 이들의 해방까지 이룩하게 만들었는데, 어쨌든 이들은 인간을 증오하는 만큼 그 이상으로 인간들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니들처럼 인간이다 여타 것들 사냥하며 즐기고 이런 것도 나쁘진 않았을 거 같네.”
“살이나 빼고 그 소릴 지껄이시지?”
“너도 나처럼 어디 처박혀서 먹기만 해봐라. 자연스럽게 이리된다? 정령의 가호도 떠나갔고, 할 수 있는 것도 거기서 거기고.”
“애는 잘 낳았나 봐?”
“그게 유일 장점이었지?”
…거기다 민감 사항을 아주 대놓고, 보란 듯이 이야기하는데, 에기아헤는 이것이 순혈 엘프들을 대놓고 비꼬고, 욕 먹이는 일이라는 걸 대략 눈치로 깨달았다.
‘너희가 잘난 척하고 있는 와중에 우린 이 꼬락서니였다, 그러니 지금 와서 잘난 척 따위 하려고 우릴 불렀다면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다.’
실제로 노예 출신 엘프가 인간 가문을 휘두르는 지역의 공통점은, 엘프를 무지막지하게 증오하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단 거다.
…여기에도 여러 사정이 뒤엉켜 있겠지만.
“모두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와중에 나무 사이에서 휘광과 함께 하늘에서 고고하게 지상으로 낙하하는 엘프를 보자, 이러한 등장은 예측 못 했는지 모두의 얼굴이 아주 가관으로 변했다.
쇠로 된 경갑옷을 걸친 엘프들 몇몇이 그녀의 옆과 인근에 자리해 마치 보좌 및 호위하듯 자리하고 있는 것서부터, 어느새 눈치만 주고 있던 엘프들이 대놓고 나무 위에 앉아 추이를 살피는 듯한 모습들까지.
그곳에서도 유독 부드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는 이는, 홀로 실크 천으로 된 상아색에 가까운 단면 드레스를 걸친 엘프였으니.
새하얀 피부, 에메랄드를 담은 듯한 두 눈과 금실로 땋은 머리칼.
머리 모양을 일부 꼬아져 매듭이 마치 머리를 두른 월계관처럼 자리한 게 무척 독특했다.
그럼에도 긴 머리를 어쩔 수 없었는지, 어깨 아래며 허리 아래로까지 뻗은 순금의 머리카락은, 하나하나가 금실로 뽑은 듯 바람에 너울거려 무척이나 아름답고 세련된 인상을 풍기고야 만다.
‘…장난 아니네.’
뭔 짓을 해야 저런 말도 안 되는 머리라던가, 외양을 지니게 되는 걸까.
목욕을 자주 한다거나 화장 미용품을 매일 같이 애용해도 저건….
“하여간 또 장난질하네.”
그러거나 말거나.
루블레나를 비롯해 그녀와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엘프들은, 코웃음을 치거나 대놓고 혀를 차기까지 했다.
“왔으니 용건이나 듣죠. 뭘 하고 싶은 거죠?”
“가만있어 봐. 혼자 여신 마냥 깝죽대는데, 저 멀건 면상을 헝클어뜨리면 어떨까 기대되지 않아?”
“그건 나도 구미가 당기는군.”
루블레나와 살찐 엘프가 하는 말에 에기아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러분, 지금 저희 경계 사고 있는데 그렇게 막 나가셔도 되시는 건지….
“거기다 여기서부턴 우리끼리 이야긴데 잡졸들은 좀 빼지.”
“형제자매 이딴 소리 지껄이지 말고. 우리가 이런 꼬락서니일 때 너희는 뒤에서 세계수 붙들고 가랑이나 비벼댔겠지. 어휴 소름 끼치네.”
…명백하게 적대하는 태도들 아닌가.
“그도 그렇군요.”
그러거나 말거나.
하이엘프로 짐작되는 그녀는 온갖 추잡한 매도에도 어떤 동요도 없이 태연히, 해맑게 웃으며 주변에 눈치를 줬다.
그러자 나무 위에 자리하고 있던 엘프들이 기척을 감추고, 감추다 못해 어느새 에기아헤를 비롯해 다른 엘프들의 주변 수행인들과 심지어 말마저 인도해 다른 곳으로 향하게끔 했는데….
“이 새끼들이 뭔 수작 부리려고 우릴…?”
“다 조지자! 그러고 장대에 묶어놓고 살가죽을 도려내면서 용건이 뭐고 목적이 뭐고 다 토해내게 하면 되잖아?”
“그보다는 입을 먼저 꿰맨 뒤 발가락 하나하나 태운 뒤 고개짓으로 답하게 하는 건?”
“…하아.”
에기아헤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심코 시선이 맞은 엘프는, 무심한 표정 가운데 뭔가 염려하는 듯한 눈치를 줬다.
‘애쓰십니다.’
아니 시발… 내가 왜 저 개 뭣같은 것들에게 동정을 사야하는데?
빡친 에기아헤가 잽싸게 활째로 그녀들의 대가리를 후려패기 시작했다.
“닥치고 좀 가자! 존나 쪽팔리게!”
“이 시발?! 너 지금 쳤어?! 쳤냐고?!”
“눈깔을 뽑아주랴?!”
“간만에 내장 색깔 좀 볼까?!”
“그 전에 너네들 심장 파다가 씹어 먹어주랴?!”
뒤에서 일어난 초원 엘프 일행의 소란에, 루블레나가 히죽대며 말했다.
“우리애들이 참 건강하지?”
“…….”
아니, 살벌한데?
저게 건강하단 말로 퉁 칠 급인가?
인간 문화에 익숙해지다 못해 타락하고 퇴락한 그녀들조차, 저기 초원 쪽을 휘어잡은 사나운 족속들의 대화엔 조금 모골이 송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