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7화 〉102. 순탄할 때가 위기라 누가 그랬더라?
“사람들이 꽤 늘었군.”
그럭저럭 방치며 노후화된 것들이 재차 보수되어가는 성채는 초기에 비해선 제법 사람 사는 냄새가 풀풀 풍겨대고 있었다.
성채 한쪽에 마련된 망루 쪽에서 이를 내려다보는 이는 바헬루스와 알리샤.
해자가 따로 없기에 전시에 막연히 성문을 막는다 해서 방비가 완고한 건 아니지만, 어차피 그런 목적이 반이라면 실질적인 목적이라 해봤자 영주의 위상과 위엄, 권위를 알리는 면모가 강한 목적으로 축성된 부류다 보니, 성문으로부터 20미터도 채 안 되는 부근에 떡하니 다른 시설이나 주거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진 현황이었다.
케사린이라 이름 지어진 이 폐성이 자리한 영지는 에드릭과 그의 주변인들, 그 외에 이권 및 목적을 안고 투자하며 찾아든 이들도 몇 개월도 채 안 가서 북적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곳 영지는 도시 겸 성채의 주인인 성주가 자리한 형태로 성주는 도시의 수호 및 방위를 담당하며, 이후 대표로 뽑힐 시장은 내치 및 외교를 담당.
따로 상공업의 도시라 표방은 안 했으나 무역로를 열고 이를 주변국들과 연계하는 등, 에드릭의 이름값과 그가 속해 있었던 상회들까지 속속들이 합류해 지부를 마련하다 보니, 규모가 불어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거기다 단순히 외부 요인에만 힘써 외부에 문제가 발생하면 덩달아 파탄 나는 걸 방지하고자 에드릭은 자체적인 상공업 시설의 설립과 이에 대한 지원은 따로 손을 쓰지 않았으나, 이에 관한 세율을 향후 10년 정도 대폭 낮추는 등의 파격적 조건을 내세움으로써 그들의 구미를 당기게 이끌었다.
그리하여 임시 시장직을 맡은 이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지만, 에드릭의 대리인으로서 알리샤가 그 역을 맡곤 있었지만, 사실상 얼굴마담에 가까웠다.
그리고 성주로서의 역을 맡을 이 또한 아직 배정된 예가 없는데, 그 자리는 현재 바헬루스가 임시로 눌러앉아 소란을 피우는 것들을 처리함으로써 치안을 비롯한 기초 질서를 차근차근 다져가고 있었다.
“세금 비율이 압도적으로 낮고 땅도 기여도에 따라 배급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기회라 여기는 이들이 많겠죠.”
집은 알아서 지어라.
땅은 주겠다.
세율은 당장 없고, 가진 돈이 없다면 일터 정도는 제공해주겠다.
기여 하는 바에 따른 적절한 보상이 주어질 것.
근본 없는 평민서부터 기회를 꿈꾸며 등용, 출세를 목적으로 찾아오는 이들까지.
그 가운데는 귀족 출신도 적지 않았는데, 몰락 귀족서부터 물려받을 뭔가가 없는 장남 차남 이후의 귀족 자제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일반 백성들이 할 수 없는, 여타 업무에 관한 나름의 경력자들이다.
혹시라도 일을 해본 적은 없어도 보고 들어온 바가 시민들과는 격차가 확연하니.
어지간히 무능한 게 아니라면.
상공업 시설, 이를 바탕으로 관련 길드나 조합 등이 몰려드는 것도 그렇지만, 일부 마탑들이 이곳에 지부를 설립하고자 하여 관련자들도 속속들이 들어서는 시점이었다.
이러다 보니 일손이 남아나질 않았는데, 용케 인력이 아슬아슬 확충되고 있었으나 이조차 기적에 가까웠다.
“용병 가운데 정착하고자 하는 이들도 슬슬 자리 잡으려는 움직임들을 보이고 있고요.”
나이 든 노련한 용병들의 경우는 치안대를 맡아 임시로 치안유지에 이바지하고 있었다.
추후 정식으로 상비군 개념으로 발전한다 치면, 전쟁 수행 목적의 군은 아닐지라도 그와 유사한 형태로 전시에 방위 차원의 군으로서의 역할은 톡톡히 해내리라 봤다.
고대 그리스 마냥 전시에 시민들이 알아서 중무장을 갖추고 착출되는 형태보다 조금 완화된 형식을 에드릭을 주장했는데, 에드릭이 시민들에게 땅을 무상을 내주는 명목도 여기에 있었다.
‘너희들 땅이니 문제 생기면 너희가 지켜라.’
시민 의식, 주인 의식을 키우는데 이만한 명분도 없을 거다.
이게 심화되면 추후 그런 시민 계층이 권력을 비롯해 자신들의 이권을 더욱 강하게 주장할 텐데, 그건 달리 말하면 그들이 그만한 역할과 성과를 수행해냈을 때의 이야기.
그리고 이는 곧 도시에 정당한 교육 시설과 관련 문화를 싹 틔울 명분으로도 적절할 거고, 그러한 영향은 필시 주변으로 퍼져가 여러모로 경계를 사게 만들 터.
그리고 도시는 더욱 굳건해질 터이다.
…이 모든 건 당연한 소리지만, 정치가 그럭저럭 평균 이상으로 잘 굴러갔을 때 기대해도 좋을 기대 효과들이었지만.
에드릭은 구태여 살기 좋은 지상 낙원과도 같은 영지를 만들고픈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만든다는 거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건 이미 무수한 역사와 인간의 악의, 욕망, 탐욕 등이 집요하게 증명해 온 바.
시장 경제를 적극 주장한, 국부론의 보이지 않는 손이란 표현으로 유명한 애덤 스미스는, 시장 경제가 활성화돼 합리적으로 효율적이면서도, 많은 이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공공의 이익으로서의 시장 경제를 꿈꿨지만, 현실은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개념으로 변질됐다.
공산주의, 사회주의로 유명한 그쪽 혁명가들이 추구한 이상은, 인간의 욕망과 아집, 탐욕 등에 의해 변질돼 부패의 극단적 온상으로 탈바꿈됐다.
이론이 제아무리 좋아도 인간이 개입된 시점에 이상은 추락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떠안는다.
에드릭은 그런 걸 충분히 인지하고, 나는 다를 거다 라는 사고방식 자체를 일찍이 벗어 던져 놓은 상태였다.
아니, 나는 가능하다 쳐도 내 사후는?
그러니 합리적인 여지만 남겨두고 망하든 흥하든 그건 그들이 알아서 하라지.
절벽에 떨어지려는 아이를 보며 아이를 그 주변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울타리는 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그 울타리마저 올라가 절벽 위로 몸을 던지겠다는 걸, 굳이 에드릭은 막을 생각이 없었다.
그조차도 개인의 선택 아닌가.
개인의 주권, 권리, 자유 의지를 막아서지 않는다 치면, 알아서 뒤지겠다고 바둥대는 걸 굳이….
그저 그 개인적 민폐를 타인에게 떠넘기고, 떠맡기려는 것만 잘 처리하면 될 뿐.
…그리고 그 정도만 돼도, 이 시대엔 더할 나위 없는 합리적 사회 집단이 탄생할 건 자명했다.
이조차도 저 도시라는 게 못해도 한 세기 이상은 유지된 뒤의 이야기겠지만.
“잡다한 것들도 덩달아 기웃거리겠군.”
“농사를 짓다 보면 병충해가 덩달아 따라오기 마련이죠. 그 피해를 수습하거나 방지하기 위한 조치는 필수적인 거고요. 여타 소재며 재료들도 각자 보관 및 관리를 위해선 이것저것 조치를 해둬야 하는데, 내버려 두면 썩기도 하고, 물러지고 곰팡이에다… 하여간 신경 쓸게 한 두 가지가 아니거든요.”
“…….”
“그런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걸 해결하는 걸 생각해야지, 그게 들끓고 생겨나는 것에 집중하면, 괜한 울화만 생긴다고 에드릭이 그랬거든요.”
“그도 그렇구나.”
먹으면 볼일을 봐야한다.
볼일 보는 게 제아무리 추잡하고 번거롭다 하더라도, 이건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경국지색의 절세 미녀, 세계를 주름 잡는 불세출의 영웅이라 한들 소변 대변을 따로 안 보는 일은 없는 바.
…생각해보면 살아간다는 건 무척 번잡하고 번거로운 것들 투성이었다.
인간의 몸체로 생활하며 그러한 불편함, 불가피함을 더욱 면밀히 실감한 바헬루스로서는, 그것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것들이 존재하기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들이 있단 것도 다시금 되새길 수 있었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명목이라면 요리가 크게 필요하진 않지. 편리를 추구하기 위해 잠자리 위해 부드러운 풀이나 털가죽을 깔게 된 것도 그렇고… 옷을 걸칠 필요가 없는 종족들은 모르나, 옷이 없인 살아가기 힘든 연약한 피부를 가진 생명체들이 비늘과 가죽을 대체하여 그와 유사한 것들을 창출해내고, 이를 발전 시켜나가듯….’
본래부터 날 수 있는 새는 굳이 새로이 날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새끼 시절 나는 연습을 하는 게 고작.
그러기에 그것들이 하늘을 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순리.
그러나 날지 못하는 부류가 하늘을 날게 되면, 그것을 일컬어 기적, 이적이라 하곤 한다.
인간을 비롯해 문명을 개설하는 이성 생명체들은, 그걸 가능케 한다.
태어날 적부터 압도적인 신체와 그에 합당한 권능을 지닌 바헬루스로선, 애초에 그런 게 존재하지 않던 것들이, 그것도 생이 지극히 짧은 것들이 그런 걸 하나하나 이뤄가는 게 무척 신기하기까지 했다.
마냥 무시하고 외면했을 땐 그렇게 와닿지도 않았지만….
“앞으로가 기대되는군.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법도 하나, 이곳에 장기간 머무르긴 어려우니, 그 즐거움은 추후 만끽하기로 하지. 눈에 때어 놓고 있음 금세 자라나는 게 필멸자들이기도 하니.”
에드릭과 나눈 이야기도 있고 해서 일단 머물고는 있으나, 어디까지나 임시직이다.
제아무리 흥미롭다 한들, 머물 보금자리가 확고한 그녀로선 굳이 그곳을 떠나 이곳에 새로이 보금자리를 마련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여기 머무는 거 자체가 그녀로선 힘을 차츰 잃어 가는 것이기도 했고.
본신의 영토, 영지가 아니라는 건, 그녀와 같은 급에 놓인 존재들에게 있어선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이렇게 보면 필멸자들 쪽이 훨씬 자유로울지도 모르겠군.’
많은 걸 이루고, 누리고, 부릴 수 있는 이들은, 그만큼 많은 것에 영향을 받기 마련.
그러기에 가진 게 많고 아는 게 많다는 게 무작정 좋다 말하긴 어려웠다.
아는 게 많으면 시도하고 실천함에 더뎌지고, 가진 게 많으면 보폭이 좁아진다.
무거운 등짐을 진 이는, 빠르게 달릴 수도, 편히 걸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세상의 이치가 이토록 조화롭고, 균등하다.
가진 게 없기에 자유롭다.
가진 게 많기에 구속되어 간다.
그러나 많은 이는 이를 바탕으로 누릴 수 있는 반면, 빈털터리는 자유에 앞서 무엇 하나 누리기 어려운 바.
추위에 따스한 집안에서 장작을 때우며 몸을 녹일 수 있는 이는, 집과 장작을 부지런히 패둔 이일 테고, 아닌 이는 밖에서 몸서리치며 하루하루를 버티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칠 수밖에.
“그대도 여기에 계속 눌러앉을 건 아니지 않나?”
“저야… 어디든 상관은 없어요. 그냥 한 곳에 눌러앉는 게 싫은 거뿐이라….”
지금도 젊다지만 알리샤가 지방, 시골 부근에 자리 잡고 있었을 당시엔 그저 도시로 상경해 출세하며 화려한 삶을 꿈꾸고, 동경했기에 이를 목표로 삼았던 거뿐.
그리고 그곳에서 적응하는 과정도 나름 즐거웠다.
현재는?
둘 다 좋다고 본다.
예컨대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에 걸림 없이 도달할 수 있느냐 마느냐가 작금의 그녀에겐, 가장 큰 가치였다.
여기서 주변이 뭐라 하는 건, 그녀 개인에게 있어선 전혀 상관없는 부분이기도 했고.
이번 에드릭의 제안 겸 요청을 수락한 건 그녀 스스로도 재미있을 거 같아서인 점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그녀가 언제 나라며 영지를 꾸리는 영주나 성주와 같은 일을 체험해보며 관련 일을 통해 재미를 즐겨볼 텐가. 간접적으로 체험해 즐기는 목적으로서도 알맞았기에 수락은 했는데, 막상 맡아보니 보통 일들이 아니었다.
“그래도 해보니 재미는 있네요. 머리 아픈 것도 있고, 가끔 지칠 때도 있지만… 농사꾼의 심정이 이럴까 싶더라고요.”
“농사꾼이라….”
바헬루스는 알리샤가 참 특이한 종류의 인간이라 봤다.
욕망에 충실한데 그 욕망이 음습하거나 탁하고, 저급하지가 않다.
어딘가 활기차면서도 주변을 밝게 하는 그런 느낌을 주는데, 그런 예가 결코 흔하지 않다는 것도 바헬루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요즘따라 인간 남성이며 여성을 보면 씨를 품고, 불어 넣고픈 충동에 가끔 휩싸이는데, 주책인지 노망인지 가끔 애매하기까지 했다.
정작 에드릭하고는 그런 욕구보단 성적 교합이 훨씬 더 강렬한데… 후예라.
‘충동일 뿐.’
필멸자들이야 후세를 남겨야 그 핏줄과 의지, 뜻이 이어진다 쳐도, 자신 같은 존재는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지 않나.
알헤디나 같이 어딘가 자신들과 유사한 듯하나 유사하지 않은 존재는 주기적으로 후세를 남겨 매번 빈틈을 보이는 게, 바헬루스로선 좀처럼 이해가 가질 않았다.
“번거롭지 않으면 그걸로 됐다.”
이런 건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본다 치고.
며칠 후면 파라메라 대륙 쪽과 연계되는 관련 대륙 간 마법진, 이동 관문이 개설될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