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취직하니 떡을 침. 이세계에서 (351)화 (351/454)



〈 351화 〉103. 왕가의 일상이라면 일상.(2)

십자군 전쟁 당시 사자왕 리차드에게 연전연패한 살라딘의 예만 봐도 그렇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러한 예는 무수히 많다. 이순신 장군님의 이름만으로 사기가 곤두박질치는 임진왜란 시절 침략 왜군이라던가, 조선 창건 시점에 우리에게 있어 이순신 장군님과 비슷한 네임벨류로 조선조에조차 명장으로 이름이 드높았던 왕씨 고려의 건국 공신 유금필 장군이라던가.

카일론에도 그런 종류의 명장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조차도 패왕녀의 위업들에 다들 밀려나는 추세였다.

이유를 들자면, 아마 철왕 시절에 그럴싸한 전쟁, 대전쟁, 대회전 등이 일어난 적이 없기 때문.

크고 작은 국지전서부터 분쟁, 소규모 접전 및 전투가 없었던  아니지만 그게 국가 전쟁 범위로 확대된 예는 없었다. 크게 발생했다 쳐도 영지, 영주전 차원에서 벌어진 건데 그조차도 타국 영주들과의 분쟁 및 개입이 대다수.


철왕은 자국의 전력을 훼손하려 드는 모자란 것들을 결코 방관하지 않았다.


왕이 힘이 없다면 영주들이 자기 잘난 맛에 땅따먹기를 시작하며, 왕은 명분을 통한 심판, 중재자 역을 맡게 될 테지만 카일론의 철왕은 이 시기에도 중앙군을 꾸려 이를 훈련 시킨 부류였다. 작정하고 명분을 등에 업고 봉신이건 권신이고 나발이고 후려친다 치면, 영지전을 펼치는 영주들이 연합을 하더라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으며, 실제로도 철왕이 직접 군을 이끌고 영주들을 후려쳐 아예 몇몇 가문을 손수 몰락의 길을 걷게 만든 전례가 있었기에, 그런 피해가 줄어들었다 볼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잠잠해지면 위기며 공포도 무뎌지는 법인지라, 또 뭔가가 일어나려 할 때쯤,  시점엔 철왕을 대신해 나라 안팎을 좌지우지한 게 무려 10살배기도 안 된 패왕녀.

‘…오히려 좋아했다고 했던가.’



관련 것들 경험해볼 기회가 많아져서?
그녀에 관한 일화는 카일론에서도 제법 유명했다.


…나름 작심하고 퍼뜨린 선전, 일종에 프로파간다겠지만 그녀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거다.


아무쪼록 이런 대단한 인물의 부군 되는 처지가  거다. 미묘하다면 미묘하고, 흥미롭다면 흥미롭지만….




“생각이 딴 곳에 가 있구나.”
“날이 춥다 보니….”




에드릭은 대놓고 능청을 부렸다.




“이게 완공됐을 때 부국이 얻을 수 있는 기대 효과는 어떠한 것들이 있다 했지?”
“음, 저번에 다 설명해드린 걸로 압니다만?”
“다시 간략하게.”
“공사 시점엔 인력 유입을 통한 인구수 확대  확보. 임금이 주변에 퍼짐으로 인한 경제 순환 효과. 대공사 진행으로 인한 국가 저력 확대 표방 가능. 그들의 정착 장려를 바탕으로 근미래 인구 및 인력 확보 또한 보장 되며, 범국가적 명성을 비롯한 대외 영향, 홍보, 인지도 획득 가능. 이로 인한 상공업 발전에 기여.
공사 완공  이러한 것들을 잘 다독일  있다면, 위에 말한 거 이상의 효과가 확보될 것이며, 그로 인한 다른 사업 확대 가능성을 위시한 전문 인력, 상·공업인의 유입 유도 가능, 이로 인한 국가 산업 경쟁력 상승은 물론, 전반적인 국력 상승, 또한 목욕의 대중화를 바탕으로 국가적 전염병 방지로 인한 또 다른 경쟁 우위 선점 가능, 많은 다국가 연합, 회합 등의 주최 선점권을 획득 가능한 또 다른 대외적 경쟁성 우위 확보, 그 모든 것들 가운데 반절만 이루어져도 전체적인 백성들의 삶의 질이 개선되고, 이로 인한 만족도, 행복지수 또한 상승함으로써… 통치를 비롯한 국민들의 긍정적인, 확고부동한 지지를 획득, 굳건해지는 것도 덩달아 가능해질 테지요. 별다른 수를 쓰지 않더라도.”
“…그렇단 말이지.”




대공사는 고대적부터 나라를 망가뜨리기도, 한편으론 부흥시키기도 하는 등, 사용 여부에 따라 극과 극의 결실을 창출해내곤 한다.

뭐… 수나라처럼 나라 말아먹고, 되려 당나라 대에 가서 개꿀을 빠는 황당한 사태가 도래하는  또 별개라지만, 어쨌든 그 결실은 의외로 당대보단 후대에 훨씬  혜택받는 바가 크다는 건데, 억울하기 싫으면 무리수를 안 둬야 하는 것도 그런 맥락.


왕권 강화며  영향력을 굳건히 다지고자 경복궁을 창건한 흥선대원군은, 역으로 그 무리수 덕에 여태 얻어놨던 개혁자로서의 양민 양반  거 없이 콘크리트와도 같았던 지지 세력들에게마저 인망, 신망을 전부 잃고, 심지어 나라 경제마저 파탄 냈다.

그러나 그러한 무리수 덕에 후세가  문화 유산을 계승하게 되니, 참으로 얄궂은 일이지.

그 뒤로도 자질구레한 설명을 이어갔는데, 제법 흥미가 깊었는지 이것저것 질문을 해온다.


…일개 무부(武夫)며 무관이라 치면, 이런 자기 분야에서 벗어난 것들에 관해선 알아서 하시게나! 하는 식으로 대처하거나 얼추 떠넘길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이런 쪽 이해도도 뛰어난 덕에 설명을 하는 에드릭도 그럭저럭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런 식으로 날이 저물기 전까지 시찰  순방을 끝마친 둘은 올 때와 달리 갈 때는 곧장 왕성 쪽으로 향했다.

거기서 하루일과가 끝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왕권이 강하다는 건 여러모로 왕이 처리하는 일들이 많다는 건데, 철왕은 왕성에 체류 시 패왕녀에게 이를 죄다 맡기는 편에 속했다.


덕분에 돌아와 씻고 식사한 다음, 잠시 숨 돌린 직후 곧장 집무에 돌입했는데 그 수량이 상당했다.

기다리던 대신하고도 서류에 도장을 찍어대며 이야기를 틈틈이 나누고 명을 하달하는 등, 그녀가 왜 박식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는데 아주  도움이 됐다.


또한 그걸 감당하는 건 지배자의 의무이자 책임, 권리였기에 한손 거든다거나 돕는다는  경우에 없는 짓 아니겠나..


고로 에드릭은 아무렇지 않게 발을 빼려 했으나….




“판단이 쓸만하니 간단하게나마 처리해보는 건 어떤가?”
“어허… 제가 그런 쪽으론 문외한이라….”
“아르세이유에 있던 당시엔 이런 쪽 일이 특기라는 소문이 돌았던 걸로 기억하네만?”
“어허, 뜬구름 잡는 소리입니다. 세간에선 뭔가 열심히 일하는 걸 보고 그렇게 오해를 일삼곤 하죠. 속인들의 이야기에 너무 귀 기울이시다가 정작 진면목을  보고 판단을 그르칠까 염려됩니다.”
“닥치고 하라고.”
“…….”


결과적으로 그녀가 침대에 든 건 땅거미가 지는 양 아침 해가 떠오른 직후였는데, 정령체인 에드릭과 달리 그녀는 멀쩡한 인간의 몸임에도 일을 다 끝내고, 침상에 2시간 정도  붙인 뒤 다시 일어나 대강 샌드위치 등으로 배를 채우며 재차 서류 작업에 돌입했다.

당연하지만 에드릭도 덩달아 부록처럼 딸려가게 됐는데….


‘이건 아니잖아.’




아니 부군이라 해도 이건 엄연히 왕의 역할이고, 이런 건 권력 분배며 권위 상실에 이바지하는 미친 짓인데 이걸 허용한다고? 미래의 왕으로서 염치도 없는 건가?


그러나 태연하게 에드릭의 몇 배에 해당하는 분량을 순식간에 처리하면서, 문제가 발견되면 관련 부서며 담당자까지 불러들여 까대고 시정 및 수정을 촉구하는 등, 단순히 기계적으로 도장을 찍어대는  아니라 더 무서웠다.

심지어.



“이건 도장을 찍기  본인에게 먼저 물었어야 정상이 아닌가?”



하고 불쑥 넘겨준 서류 용지를 손으로 툭툭 가리킨다던가.


“이건 시급한 사항이니 담당을 불러 확실하게 물고 늘어져야지.”
“…그런 거 일일이 따지면 일 언제 합니까?”
“대강 넘기고 이러한  부폐의 온상이자 빌미가  공무를 저해시킨다는 걸 모르진 않을 터인데….”
“적당히 인간미가 있어야 사람들도 알아서 따르는 법이죠. 부정을 찌르는  추후 빌미로 삼아 기게 만드는 용도로 사용해주는 쪽이 아무래도….”
“의도는 이해가 가나 왕이 그런 잡배와 같은 짓을 행할 순 없지. 그런 건 다 맞은 역할들이 따로 있으니 굳이 본인이 그럴 필요는 없는 바. 그리고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해야  틈새를 노리고 수작질을 부릴 테며, 그래야 제대로 된 것들이 본색을 드러내기 마련 아니겠나. 좀도둑을 허용하면 강도며 그보다 더 큰 도둑들을 되려 키워주는 격이 되는데, 그걸 한참을 방치하다간 나라 곳간이 바닥 나고, 각 가정 형편에 지대한 영향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는 전체적 치안 문제서부터 백성들의 삶의 질을 하락 시킴은 물론….”

이런 걸 이야기하면서도  하나 마주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면서 설교를 하는 게 참 신기했다.

심지어.



“손을 왜 놀리나? 하면서 듣거라.”
“예예.”


에드릭도 어지간한 워커 홀릭이지만, 그녀는 한술 더 떴다.
다행인  에드릭이 일벌레 소리 듣던 인간이었기에 금세 적응했지,  그랬으면 역으로 금세 드러누웠을 거다.

거기다 점심 이후가 돼서 슬슬 그녀의 집무실에 각 신하며 부서 관계자들이 들이닥쳐 결제가 필요한 서류를 재차 전달해왔는데, 아무래도 현대식 종이가 아니다 보니 무게가 상당한 나머지 자그마한 수레에 이를 담아오는  보곤 내심 혀를 내두르고야 마았다.

거기서도 일부 중요한 건 양피지에 적혀 있는 등, 나름의 등급들이 쫙쫙 나누어져 있는 걸 보면 나름 합리적으로 업무 개선을 하고자 노력하는 기색들이 역력했는데….

“이거 일일이 손수  하려면 정말 답도 없을  같습니다만?”
“어쩌겠나. 할 때 해야지. 그렇다고 아랫것들에게 맡긴 뒤 책임을 지우게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게 아니면 권한을 분배해야 하는데, 그 자체가 권력을 이양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나.”
“…후딱 왕좌 앉으셔서 자리를 공고히 다지셔야겠군요.”
“말이 통하니 좋군.”




예컨대 현재는 일머리를 익히고, 실무를 파악하는 과정.
동시에 이러한 다재다능함,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는 걸 몸소 증명함으로써 대소신료의 호응을 이끄는 과정의 일환이라 보면, 이조차도 업무인 동시에 권력 다지기의 초석이라  수 있었다.

왕이 자기들 업무며 사정을 알고서 명을 내리는 것과, 뭣도 모르는 주제 아이디어만 던지고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왜 이걸 못 하냐? 하고 닦달하는 것. 어느 쪽이 진정으로 왕 대접을 받을지는 안 봐도 훤하지.

…또 그래야 속여 먹거나 잔 대가리 굴리는 걸 가급적 자제할 테고.
부정부패도 일종에 나름의 프로젝트다.


윗선을 속여 먹고 아랫 것들도 속여먹으면서 얼마나 몸 성히, 들키지 않고 횡령을 하든 후리든 등을 처먹는가.


걸리면 속된 말로 좆되는 거지만, 권력자에겐 그러한 틈새가 여럿 보일 수밖에 없는 구조기에, 어지간히 감찰이며 감사가 빡세거나, 그에 해당하는 처벌 항목 등이 극악무도하지 않은 한, 제아무리 청렴하다 소문이 자자해도 한두 가지는 알게 모르게 범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면 현실.

애초에 남보다 잘나고, 잘 살고, 더 나아지기 위해 권력이든 재물이든 힘을 키우는 건데, 남들처럼 불합리한 양보, 평등이라는 이름의 불평등을 왜 그들이 굳이 감당해야 하는가.


라는 게 특권층, 기득권층의 기본 베이스기에, 그들로선 자신들이 누리는 무언가들은  나은 삶에 일종이지, 그걸 굳이 어쩌고저쩌고할  아니었다.


이걸 빠르게 파악한 것들은 실리에 입각한 간신배의 길에 오르는 건데, 이런 놈들이 사실 제일 무서운 부류다.

능력도 있는데 시류를 파악 잘하며, 굳이 충성이니 애국이니 민족이니 이딴 거에 구애되질 않는다.

그들은 철저하게 지향점을 단정 지어둔 채 행동한다.
그것이 본인의 업적 달성이라거나, 가문의 영광, 혈통의 축성이라던가.
혹은 그것들 전부를 다 이루고자 하는, 탐욕의 극치를 추구하는 강욕주의자라던가.


사내라면 무릇 그런 걸 노려볼만 하지 않나?
라며 패기를 드러내는 걸, 그들은 결코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다만 경쟁자에게 척살 당하기 싫으니 애써 자제하는 거뿐이지.

그리고 그런 어중이떠중이서부터 잘난 것들, 못난 것들, 이상한 것들을 전부 권력의 정점에서 부리고, 짓밟고, 쥐어짜는  바로 왕이란 족속.


…왕이란 자가 유약하고 판단이 늦고 둔하면, 뭐가 됐든 잡아먹힐 수밖에 없는 구조인 거다.




“그대가 거드니 이틀 정도는 단축 시킬 수 있겠구나.”
“…….”




업무에 종사할 때 가장 막막한 건, 미래를 견지할 수 있는 상황.
예컨대 이걸 처리하려면 최소 어느 정도 걸린다.
이게 사람을 미치게 한다.


그 일정이 적다면야 한 번 해보자 하는데, 마치 밀린 방학 숙제처럼 하루 이틀로 해결할 분량이 아니면, 대개 사람은 이를 미루려거나 외면하고픈 게 아무래도 현실.


그러니 꾸준히 처리해 분량을 줄여 감당할 수 있는 범위로 축소 시키던가, 아님 마감 날짜에 쫓기는 작가 마냥 몇 날 며칠을 마구 불태운다던가….

그리고 의외인 건, 에드릭이 걸림돌이 아니라 도움이 된다는 점이 아무래도 그녀로선 이례적이었나 보다. 큰 기대를 안 했는데 잘 따라오는 것도 그렇고.


에드릭도 에드릭 나름대로 이러면서 배우는 것들이 있었고, 처음엔 여유가 없었지만 익숙해지니 단순히 도장 찍는 기계가 아니라, 내용을 살필 여유도 종종 가질  있게 됐다.

수능을  때, 사실 국어라던가 영어가 됐든 내용이 엄처 긴 걸 정독하며 다 읽는 건 시간 낭비하기 딱 좋은 악습.


아니, 정독해야 하는 게 사실 맞는데, 문제풀이 방식이 그걸 허용  한다는 게 기이하지.


그렇다고 속독법을 익힌다? 말이 속독법이지 대부분 제대로 안 배우면 흘겨 읽는 게 대다수고, 어중간히 익히면 읽었던 지문도 금세 까먹거나 잘못 오해하는 경우가 상당했다.

그러니 본론만 축약하고, 숙지하는 흐름 등이 이어지는데, 이러한 거에 잘못 적응하면 뭔가를 읽는 행위 자체가 잘못 변질될 수가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책을 비롯해 독서량이 줄었다 뿐이지, 현대인들은 인터넷을 바탕으로 꽤 많은 글들을 접하곤 한다.

…그러나 그런 글들 대다수가 간단한 양식이기에, 과거에 신문이며 한자가 남발하는 여타 책을 읽은 이들보단, 아무래도 문해력, 독해력이 떨어질 수밖에.

이러한 문자 독해, 이해력 부재는 밀레니엄 세대의 악질적 문제로 대두 돼 각 세계에서도 이에 대한 문제가 한창 언급돼 해결책들을 물색하는 형편이기도 했다.
…그런다고 제대로 해결될지 말지는 아무래도 의문이지만.


글보단 영상과 그림이 일상으로 굳어져가는 시대라서 더욱 그런 걸지도.
그런 의미에서 다행인 건, 에드릭의 연령층, 시대는 딱 신문이며 독서를 권장하던 시대였고, 에드릭은  와중에 문자를 꽤나 가까이 해왔던 층에 속했다.

그러기에 본사에 입사한 뒤에도 몇몇 독서에 적응  한 이들과 달리, 바로 이에 적응했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쪽 판타지 세계의 문자며 문장 구조는 아무래도 서사며 시적 구조를 띄는지라, 이쪽 언어를 다수 배우고 책을 읽기까지 되니, 본의 아니게 언어 구사력이 대폭 증가하게  건 덤이라면 덤.


아무튼.

“생각해보니 그대 출신이 상인이었었지. 문자며 수에 관해선 걱정거리가 없겠군. 본인이 이를 아무래도 과소평가한 모양이로구나.”
“…그거 참.”



에드릭은 실웃음을 흐리며 처리한 서류를 죄다 건넸다.
수레엔 아직 서류가 꽤 많다.

종이의 질은 왕이며 대소신료들이 직접 보는 것임에도,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저 분량을 양피지로 썼다간 이 나라에 양이란 족속들은 남아나질 않았을 거다.

과거에 중요 서류 외엔 대부분 면전에 대고 보고 및 말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고, 기록물만 남기는 식으로 일을 처리했다는 게 괜한 이유는 아니었는 게, 에드릭의 세계에서도 사무직에 종사하는 직원들이 다루는 A4를 비롯한 종이가 얼마나 허무하게, 자질구레하게 사라지는지는 안 봐도 훤하지.

컴퓨터로 작업을 하고 자시고 간에, 디지털화가 가속되어 간다 쳐도 여전히 종이를 썩어 문드러지게 소모해대는 건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을 터.


디지털화가 덜 된 나라에선 여전히 종이 소모가 압도적이기에, 이렇게 보면 자원 낭비가 참 상상을 초월한달까.

…근데 오로지 종이가 그쪽 용도로만 쓰이는  또 아니니, 이런 면에서 재활용의 여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어처구니없게도, 되새기고야 마는 에드릭이었다.


‘e북이나 전자책이 범람함에도 가격 저하가 덜 되는 것도 어이가 없고.’




하여간 세상 구조는 모든 게 불합리로 시작해 불합리로 이루어져 간다.
…그게 인간이 이성보단 감성 쪽에 휘둘린다는 명백한 증거일 테고.




‘단정 지을 필요까진 없으려나.’

잡생각을 하며, 도장을 마구 찍어댄다.

왕의 도장인 옥새가 채용되는 건 아주 중대 사항이나 총체적인 무언가라, 여기선 왕녀 전용 인장을 사용하고 있는데, 사실상 반쪽짜리 옥새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녀석이었다.


제아무리 내줄  다 내준다 쳐도 아직 왕좌와 옥새는 철왕의 소유다. 이를 빌려주는 건…  그쪽이 알아서  일이니 에드릭으로선 알 바도 아니었지만.

“후딱 전선으로 복귀하셔야겠습니다.”
“하면 혼자 할 텐가?”
“……가급적 왕좌 물려받기 전까진 떠나지 마시옵소서.”

금세 입장을 달리하는 에드릭의 대답에 패왕녀가 피식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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